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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진 것, 자본에 과세하라’, 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지속가능한 자본주의를 위한 비판과 제언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카를 마르크스는 19세기의 영국을 보면서 자본주의의 필연적 붕괴를 예언했다. 토마 피케티가 요약한대로 “자본은 계혹 축적되면서(무한 축적의 원리) 갈수록 소수의 손에 집중되는 움직일 수 없는 경향이 있으며” “자본의 수익률이 끊임없이 감소하거나 국민소득 가운데 자본가의 몫이 무한히 증가해 (그래서 조만간 노동자들이 단결해 폭동을 일으켜) 결국 자본주의는 최후를 맞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스스로 “자신의 기반을 발밑에서부터 무너뜨리고” “부르주아지가 생산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 자신의 무덤을 파는 일꾼들”로 “부르주아지(유산계급)의 파멸과 프롤레타리아트(무산계급)의 승리는 똑같이 필연적인 것”이라는 ‘공산당 선언’의 결론이었다.

그러나 약 100년 후인 20세기의 한 가운데, 1945년부터 1975년까지의 미국과 프랑스의 ‘황홀한 시대’를 목격하면서 경제학자 쿠즈네츠는 는 산업화와 경제발전의 초기에는 불평등이 커지다가 자본주의의 높은 발전단계에 이르면 전체 인구 중 갈수록 더 많은 사람이 경제성장의 과실을 나눠 가지면서 불평등이 자동적으로 감소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장은 모든 배를 뜨게 하는 밀물”이라는 수사는 자본주의의 무한한 발전에 축하하는 ’팡파레’였다.

그러나 21세기의 자본주의는 마르크스의 종말론적 예언처럼 ‘양극화’의 양상을 보이지만 파국을 맞지 않았고, 쿠즈네츠의낙관론처럼 성장은 계속됐지만 부의 분배는 악화되고 불평등은 심화됐다. 43세의 젊은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마르크스의 묵시록과 쿠즈네츠의 복음을 모두 거부하는 동시에 ‘불평등’이라는 마르크스적인 주제를, ‘역사ㆍ통계적 조사’라는 쿠즈네츠의 방법론으로 전개한다.

“내 연구는 많은 부분은 1913년~1948년 미국 소득불평등의 변화에 관한 쿠즈네츠의 혁신적이고 선구적인 연구를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더 광범위하게 확장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식으로 나는 쿠즈네츠가 확인한 (매우 정확한) 변화들을 더욱 잘 조망할 수 있었고, 경제발전과 부의 분배의 관계에 관한 그의 낙관적인 견해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 ”(‘21세기 자본’ 중)

두터운 경제학 저서로는 이례적으로 미국과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파리경제대 교수 토마 피케티(43)의 ‘21세기 자본’(장경덕 외 옮김, 글항아리)이 드디어 한국에 상륙했다. 지난해 8월 프랑스와 4월 미국에 이어 첫 출간 1년여만인 이달 우리말로 번역 출간됐다.

이 책은 출간 이후 “올해, 아니 향후 10년 동안 가장 중요한 경제학 저서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경제학과 교수의 찬사를 시작으로 수많은 열광적 지지와 찬반 논쟁을 이끌어냈다.

토마 피케티가 스스로 밝힌대로 ‘21세기 자본’은 1913년~1948년간 미국 소득불평등의 역사적 변화를 통계자료에 입각해 분석한 쿠즈네츠의 방법론을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 3세기 동안의 20개국’으로 확장해 적용한다. 그 결과 산업발전과 함께부의 불평등이 증가하다가 성숙 단계에 이르면 감소한다는 쿠즈네츠의 ‘벨 커브’(종모양의 곡선 그래프)는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마르크스가 가질 수 없었고, 쿠즈네츠가 볼 수 없었던 21세기까지 이용가능한 자료를 인용한 토마 피케티의 주장과 결론은 명쾌하다. 3세기에 걸친 역사적인 통계는 ‘연평균 자본수익률(r)이 경제성장률(g)을 앞선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것은 자본에서 얻는 이윤, 배당금, 이자, 임대료, 기타 소득 등이 노동생산을 통해 얻는 소득보다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가진 것’으로 얻는 돈이 일해서 버는 돈보다 클 뿐 아니라 자본주의 역사에서 비교적 새로운 21세기 미국의 ‘슈퍼경영자’(초고액 연봉수령자)의 출현이 상징하듯 소득불평등도 증가하게 됐다. 자본소득이 노동소득을 앞선다는 사실 뿐 아니라 직종과 계층에 따른 노동소득의 불평등의 심화는 부의 분배를 19세기 수준까지 악화시켰다. 쿠즈네츠가 열광적으로 찬미한 1913년에서 1948년, 더 나아가 1970년대까지 일시적으로 나타난 불평등의 감소는 성장에 따른 ‘자동적인 결과’라기보다는 전쟁수행을 위한 과세와 전쟁으로 인한 파괴, 대공황에서 자본소유자들의 몰락, 루스벨트의 경제부양책 등과 같은 ‘인위적인 요소’가 컸기 때문이다.

토마 피케티는 자본, 즉 축척된 과거가 노동, 곧 살아있는 현재를 지배하는 세습자본주의로부터 미래를 구해내려고 할 뿐 아니라마르크스의 종말론이나 쿠즈네츠의 ‘해피엔딩’과 같은 자본주의의 시나리오와 모두 결별하면서 ‘역사적 경험에 근거한 실존적인 결단’을 요구한다. 그것은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는 마르크스 혹은 사회주의와는 상관없고, 전면적인 경쟁과 규제 완화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와도 거리가 멀다. 토마 피케티가 일관되게 문제삼는 것은 ‘부의 분배’이며 ‘합리적 불평등’이다. 그는 “불평등은 그 자체로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핵심적인 문제는 그 불평등이 정당화 될 수 있는가, 그 불평등에 합당한 이유가 있는가이다”라고 썼다. 그의 책 첫머리 첫 줄은 “사회적 차별은 오직 공익에 바탕을 둘 때만 가능하다”는 1789년 프랑스혁명 인권 선언이다.

토마 피케티의 제언은 상속세와 소득세에 이은, 누진율이 적용되는 자본세다. 각국 정부 및 중앙은행의 정보 공유 및 통제를 통한 ‘글로벌 자본세’의 부과다. 핵심은 ‘번 것’(연간 소득) 뿐 아니라 ‘가진 것’(자본)에 대해서 매년 과세를 하자는 것이다. 그는 한 예로 재산이 100만 유로(10억원) 미만일 때 0.1 또는 0.5%, 100만~500만 유로(10억~50억원)일 때 1%, 500만~1000만 유로(50억~100억원) 일 때 2%, 몇 억 유로일 때는 5% 또는 10%의 글로벌 자본세를 제안한다. 글로벌 자본세는 정부의 세수를 늘릴 뿐 아니라 각 국가와 (중앙)은행간 협력을 통해 금융 투명성을 높이고, 금융 위기시 관리와 대처 능력을 키울 것이라는 주장이다. 글로벌 자본세는 자본주의가 기초한 사유재산제도와 경쟁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보호하면서도 ‘행운의 보수’(경영성과가 아닌 환율, 원자재가격, 전반적인 경제상황 등 기업 외부적인 요인에 의한 실적으로 취하는 높은 연봉)로 죽어가는 기업가 정신을 되살리고, 부를 재분배하며 불평등을 개선시킴으로서 21세기형 ‘사회적 국가’를 달성하는 핵심적인 수단이라는 게 토마 피케티의 주장이다. 사회적 국가란 세수에 바탕해 의료와 교육, 대체소득(연금과 실업급여), 이전지출(가족수당, 최저보장소득) 등 공공 기능을 가진 현대 국가를 의미한다.

토마 피케티는 자본소득과 노동소득의 비율, 자본의 수익률, 국민 소득 중 정부의 세수, 국부의 총량, 자본총량과 국민소득의 비율에 대한 ‘역사적 균형’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동학에 대한 대중적 통찰을 제공한다. 오노레 드 발자크와 제인 오스틴, 제임스 조이스, ‘타이타닉’을 인용하고 방대한 자료를 취한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은 이론과 수학적 모형 속에 죽어가던 ‘정치경제학’과 ‘경제사연구’를 되살렸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학자들의 골방과 컴퓨터로부터 ‘경제학’을 대중 곁으로 다시 불러낸 문제작이라고 할 것이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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