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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업공단 50년, 사라진 역사의 현장…구로공단 투어 참여해 보니
[헤럴드경제=이해준 선임기자]‘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일본과의 역사 갈등이 터질 때마다 등장하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이다. 역사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가.

올해로 설립 50년을 맞은 구로수출산업공단(구로공단)의 역사 현장은 은 그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었다. 소중한 역사가 배어 있는 곳에 그 사실을 알리는 표지판 하나 만들어놓지 않은 씁쓸한 망각의 현장이었다.

구로공단은 맨땅에서 시작해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 산업화의 현장이자 경제성장의 손과 발 역할을 했던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다. 지금은 벤처산업단지로 탈바꿈해 새로운 역사를 써가는 곳이기도 하다.

‘추억과 희망의 구로공단 여행’ 프로그램에 참여한 시민들이 지금은 대형 아파트형 공장으로 대체된 옛 구로1공단 자리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다.

구로구는 이러한 역사를 되새기기 위해 구로공단 투어 프로그램을 마련해 지난 11일부터 운영하고 있다. 오는 10월말까지 진행되는 이 투어 프로그램은 공단의 흥망성쇄에 따라 변화해온 시장을 중심으로 돌아보는 ‘구로공단 장터길(1코스)’과, 산업화의 현장과 노동자들의 애환의 흔적을 찾아보는 ‘산업화와 노동의 길(2코스)’ 등 두개의 코스로 나뉘어 진행된다.

지역주민 10여 명과 함께 ‘산업화와 노동의 길’ 투어코스를 돌아보았다. 옛 구로공단역인 구로디지털단지역에서 출발해 한국 최초의 수출산업공단인 구로 1공단, 가리봉5거리에서 수출의 다리를 거쳐 옛 가리봉역(지금은 가산디지털단지역)까지 돌아보는 코스다. 1964년 수출입국을 기치로 시작된 산업화의 역사와 노동자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뜻깊은 투어였다.

옛 구로1공단 가운데 자리잡은 한국수출산업공단 건물 앞에서 투어 참가자들이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다. 1974년 세워졌다 재개발 바람에 사라졌던 ‘수출의 여인상‘이 다음달 15일 이곳에 다시 세워진다.

투어를 진행한 천경희 가이드는 전문 체험학습 강사로서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다양한 에피소드와 문학작품, 영화의 장면을 곁들여 흥미진진하게 진행했다. 산업화의 주역인 ‘공돌이’, ‘공순이’들의 눈물겨운 삶을 펼쳐보일 때엔 가슴이 뭉클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남는 곳이었다. 거기엔 과거 공단건물과 공단을 둘러싼 철조망 대신 현대식 아파트형 공장과 초대형 쇼핑몰이 들어서 있었고, 산업현장의 역사를 보여주는 어떠한 표지판이나 표석도 없었다.

1966년 설립돼 1980년대까지 한국 전자산업의 씨앗 역할을 했던 싸니전기 자리엔 코오롱사이언스밸리, 바비인형을 만들던 대협 자리엔 대륭포스트타워, 1공단 최초 수출기업이었던 동남전기 자리엔 테크노타워 등 대형 아파트형 공장이 들어서 있었고, 대우어패럴과 효성물산 등 섬유와 봉제산업의 메카 역할을 했던 자리엔 대형 아웃렛 매장이 들어서 있었다.

과거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애환이 담겨 있는 가리봉시장이 ’옌벤거리‘로 탈바꿈해 이 지역의 주인이 달라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1974년 공단 설립 10주년을 기념해 세워놓았던 ‘수출의 여인상’은 20층짜리 비즈니스센터가 들어서며 화단으로 밀려났다가 이젠 자취를 감추었다. 올해 50주년을 맞아 다음달 15일 이 동상이 다시 세워진다는 설명문이 그나마 위안이 됐다.

남아 있는 것이라곤 과거 가난한 노동자들이 몸을 부비고 피곤한 몸을 눕혔던 가리봉시장의 ‘쪽방’ 일부와, 한국 최초의 아파트형공장인 구로봉제협동조합 건물 등 극히 일부일 뿐이었다. 노동자들이 순대와 떡볶이에 소주로 고단한 삶을 달래던 가리봉시장은 이제 중국동포들이 상권을 장악한 ‘옌벤거리’로 바뀌어 있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건물과 거리가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거기에 스며있는 역사의 소중함을 이해한다면 최소한 그 역사를 알리는 표지판이나 설명문 정도는 만들어 놓을 수 있는 것 아닐까. 제대로 된 기념관이나 박물관은 물론 그러한 표식조차 만들어 놓지 않은 것은 산업공단 역사에 대한 경시의 징표가 아닐 수 없다. 역사를 잊었다고 남의 탓을 할 처지가 아니다.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 체험 프로그램 포스터

당국은 예산 문제를 제기한다. 서울시와 구로구, 금천구 등이 기념관 건립을 위한 논의를 진행 중이나 예산문제로 진전에 어려움을 보이고 있다. 구로구가 이 투어를 진행할 수 있는 것은 시민참여예산과 정부의 산업단지투어 공모에 당선됐기 때문이다.

산업공단 50주년을 맞아 거창한 행사보다 현장의 의미를 살리는 게 필요하다. 대규모 고층빌딩으로 둔갑한 디지털산업단지를 방문하는 시민들이 최소한 ‘여기가 수출산업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표지판 하나 없는게안타깝다.

/hj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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