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나무 앙상한
가지 틈새로 가까스로
걸려 있는 날들이여,
꽃빛 찬란한 봄이
그리로 오시는 줄을
알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
(홍수희 ‘2월 편지’)
‘…
얼음새꽃
매화
산수유
눈 비비는 소리
실핏줄로 옮겨온
봄기운으로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햇살이 분주하다’
(목필균 ‘2월’)
새해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이다. 전원의 2월은 여전히 겨울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렇지만, 절기상 입춘(4일)과 우수(19일)가 끼어있는 2월은 봄에 대한 설렘과 기대가 살며시 고개를 드는 달이기도 하다. 하얀 눈을 머리에 인 채 황금빛을 뿜어내는 얼음새꽃(복수초)이 유난히 아름다운 이유다.
앙상한 고사목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전원의 2월은 보기만 해도 저절로 몸이 움츠러든다. |
■꿩과 참새, 고라니는 반가운 겨울 친구들
2월 전원에선 늘 찾아오는 반가운 친구들이 있다. 각종 새들과 고라니, 토끼 등 야생동물이 바로 그들. 꿩, 참새, 곤줄박이 등 각종 새들은 춥고 눈 덮인 겨울이 길어지면 산속에서 민가로 날아든다. 자연히 논밭에 떨어진 곡식 이삭과 각종 풀씨는 새들에게 훌륭한 먹이가 된다.
필자의 집 주변 풀덤불에도 숲속에서 먹이를 구하지 못한 각종 새들이 떼를 지어 찾아온다. 바짝 말라버린 풀 가지 위에 사뿐히 내려 앉아 마치 시소를 타듯이 흔들리는 풀 가지 위에서 멋진 곡예 식사를 즐긴다. 마른 풀밭은 이때만큼은 새들의 천국이다. 새들의 풀씨 식사를 가만히 지켜보노라면 세상 만물의 순환구조가 참으로 놀랍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대표적인 텃새인 꿩들도 집 뒷밭을 느긋하게 거닐면서 풀씨를 찾아 먹는다. 가끔 심술궂은 들고양이들이 습격하기도 하지만, 이제껏 꿩 사냥에 성공한 것을 본 적이 없다. 꿩은 생김새가 닭과 비슷하지만 꼬리가 길다. 빛깔이 고운 수컷은 장끼, 암컷은 까투리라고 부른다.
새들과 함께 하는 겨울에는 차마 웃지 못 할 해프닝도 곧잘 발생한다. 그중에서도 새들의 ‘자폭(?)’사고는 빼놓을 수 없다. 집 주변을 날아다니던 새들이 유리창에 비친 하늘을 진짜 하늘로 착각해서 그대로 돌진하다가 머리를 세게 부딪쳐 그 충격으로 죽는 것이다. 새들의 머리가 나쁜 것인지 유리를 구별 못하는 시력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런 사고가 매년 수차례씩 발생한다.
물론 사고 후 운 좋게 살아난 행운의 새도 있다. 지난해 2월의 어느 날, 딸아이가 “작은 새 한마리가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친 뒤 땅바닥으로 떨어졌다”고 알려줬다. 즉시 밖으로 나가보니, 창문에 부딪친 충격이 워낙 컸던지 작은 새가 꼼짝도 못한 채 간신히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딸아이가 계속 쓰다듬으며 돌본지 한참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린 그 새는 인간의 손길에 화들짝 놀라 도망치듯 날아가 버렸다.
아마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면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는 들고양이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개체수가 크게 늘어나 농촌의 골칫거리가 되어 버린 고라니와 너구리도 수시로 만나게 되는 겨울 손님이다. 이들과의 만남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면 전원의 겨울은 외롭고 쓸쓸할 뿐이다.
강원도 인제군 내린천 주변의 2월 모습. |
■봄이 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2월의 꽃’
사실 산골에서, 그것도 2월에 봄을 말하기는 너무 이르다. 하지만 2월에도 꽃은 피어난다. 매화, 산수유, 얼음새꽃, 동백꽃 등이 그렇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겨울꽃’이지만, 가장 먼저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봄의 전령’으로 사랑받는다.
매화는 1월 하순~2월 초순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고, 2월 중순부터 3월 중순 사이에 본격적으로 피어난다. 매화꽃은 잎보다 먼저 피며, 향기를 내기 시작한다. 흰 꽃이 피는 것을 백매, 붉은 꽃이 피는 것을 홍매, 푸른 꽃이 피는 것을 청매라고 부른다. 백매는 가장 맑고 깨끗하며, 홍매는 가장 아름답다. 경남 거제시 일운면에 있는 세 그루의 백매는 1월 말경에 꽃이 피기 시작하여 2월 중순이면 만개하고, 2월 하순에 지기 시작한다.
‘2월의 신부’로 불리는 연분홍 동백꽃도 많은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거제도의 동백은 입춘이 지나면 활짝 피어나기 시작해 2월에 절정을 맞는다.
날아다니다가 창문 유리에 부딪쳐 땅바닥에 추락한 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새 한마리. |
필자가 살고 있는 강원도 홍천 산골에서도 2월에 피는 꽃이 있다. 바로 얼음새꽃이다. 산골 동장군의 심술에도 아랑곳 않고 따사로운 황금색 꽃을 피워내는 얼음새꽃은 결코 겨울이 다가오는 봄을 이길 수 없음을 보여준다. 얼음새꽃은 우리나라 각처의 숲 속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 초본이다. 햇볕이 잘 드는 양지와 습기가 약간 있는 곳에서 잘 자란다.
2월 하순께 산속 계곡을 찾으면 음양이 어우러진 산수화를 감상할 수 있다. 계곡 음지쪽에는 여전히 흰 눈이 수북이 쌓여있지만, 양지쪽은 모두 녹아 누런 풀들이 포근하게 느껴진다. 음지와 양지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게 이맘때다. 양지쪽 개울물은 얼음이 녹으면서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고, 양지쪽 버들강아지도 서서히 물이 오르며 생기를 머금는다. 생동의 봄이 저 멀리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준다.
강원도 산골짜기에서도 2월 금빛 찬란한 꽃을 피워내는 얼음새꽃. |
■농사 워밍업, 자가 세차, 그리고 시골 졸업식
그러나 2월의 농토는 아직 꽁꽁 얼어있기 때문에 본격적인 농사 준비는 이르다. 다만 육묘장에서는 종자를 키우고, 숲속 낙엽 등을 긁어모아 퇴비를 만드는 등 사전 작업은 진행된다. 황토고구마로 유명한 해남에서는 2월이 되면 고구마 종자 묻기가 한창이다.
2월에는 내한성 작물인 보리, 마늘, 양파 밭에 웃거름 주기를 하고, 과수원에는 밑거름 주기를 한다. 또 한우 젖소 등을 키우는 축산농가에서는 호흡기 질병과 피부병 등을 예방하기 위해 겨우내 추위에 고생한 가축들에게 운동을 시킨다. 사과, 배, 단감 등 과수는 거친 껍질을 벗겨 주고 과종별로 알맞은 가지치기를 해준다.
2월의 끝이 가까워질수록 낮에는 포근한 날씨가 찾아오기도 한다. 이때가 산골에선 몇 가지 미뤄놓은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중 한 가지가 세차다. 겨우내 눈과 얼음이 뒤덮인 시골 길을 누비다 보면 애마의 몰골은 말이 아니다. 그러나 세차장은 읍이나 큰 면사무소 소재지에서나 볼 수 있고, 그나마 겨울에 가동하는 곳은 거의 없다. 따라서 자가 세차에 필요한 간단한 장비를 갖추어놓고, 날씨가 풀릴 때 즉시 더러워진 차량을 세차하는 것도 전원생활의 지혜다.
2월 산골행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벤트가 있으니, 바로 졸업식이다. 필자가 살고 있는 마을에는 오래된 초등학교가 있는데 전 학년 학생 수가 고작 10여명에 불과하다. 그중 졸업생은 많아야 손에 꼽을 정도다. 그래도 시골의 졸업식은 동네경사이자 축제다. 소위 면에서 ‘내노라’하는 ‘○장님’들은 총출동한다. 졸업생 학부모 말고도 수십 명은 족히 되는 하객들로 비좁은 시골 졸업식장은 늘 시끌벅적하다. 마을공동체가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그들의 앞길을 격려해 주는 ‘축복의 졸업식’이다.
농촌에서 학교란 배움의 터일 뿐 아니라 지역공동체의 구심점 역할도 한다. 귀농·귀촌한 외지인의 경우에는 자녀교육을 통해 자연스럽게 학부모 등 원주민들과 가까워지고, 그 결과 자녀교육과 주민융화 문제 등 두 가지 애로사항을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다. 여기에 깨끗한 자연환경 속에서 창의·인성교육, 지덕체 교육은 물론 튼튼한 건강 또한 덤으로 얻게 되니 교육적 효과 또한 크다고 할 수 있다.
(전원 칼럼리스트,cafe.naver.com/rm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