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 명인 정재국(71ㆍ중요무형문화재 제46호 피리정악, 대취타 보유자) 선생은 최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크라운-해태제과 윤영달(68) 회장이 화제에 오르자, 짐짓 성가신 체 했다. 애정과 각별한 친분이 배어있는 정겨운 투정. 본 공연을 앞두고 새벽 늦게까지 줄창 리허설을 시키는 윤 회장의 열정에 정 명인을 비롯해 대부분 국악계 인사들은 혀를 내두르곤 한다. 국악 애정지수란게 있다면 그를 따라올 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를 화제로 삼은 이런 대화의 말문은 늘 기대와 희망이 섞인 가정형으로 닫히곤 한다. “윤 회장 같은 사람이 열명만 되어도 우리 국악은 크게 발전하지….”
▶논문까지 독파하며 아리랑 페스티벌 구상=경기 양주에서 크라운-해태제과가 조성 운영하는 ‘송추아트밸리’를 찾은 날은 ‘서울아리랑페스티벌’이 종료된 지 얼마되지 않은 때라, 윤 회장은 잔뜩 들떠 있었다. ‘서울아리랑페스티벌’은 서울의 심장부 서울광장과 광화문광장에서 서울 시민이 다같이 우리 소리 아리랑을 부르고 즐기게 하자는 뜻에서 윤 회장이 먼저 서울시에 제안해,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3일간 대대적으로 펼쳐진 축제다. 페스티벌 조직위원장을 맡은 윤 회장은 이 축제의 알파와 오메가나 다름없다.
“쉽게 말하면 ‘창신제’를 하면서 점점 간이 커진 거죠. ‘광화문에서 놀았으면 좋겠다’였어요. 2002년 한일월드컵 때 광화문 네거리에서 손자와 응원을 했었는데, 그때의 기분이란 참 묘하더라구. 그래, 거기서 영감을 받아가지고, 광화문 광장에서 국악으로 놀고자 했죠. 가칭 ‘광화문축제’였습니다. 광화문, 시청앞, 서울역까지 퍼레이드를 하는 구상이었는데, 우리도 일본의 마쓰리, 브라질의 삼바 같은 축제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즉흥적 발상에서 시작했지만, 철저히 준비했다. 윤 회장은 10년 뒤까지 바라보며, 단순한 퍼레이드가 아닌 조선시대 옛 행차 놀이를 복원하고자 했다. 두툼한 논문도 들췄다. “너무 복잡해서 교수님께 도와달라했는데, 조선시대 놀이를 기록한 ‘기완별록’이 있어요. 여기에 공연종목이 나와 있는데 무슨 내용이었을지 통 모르겠어요. 요즘에 알만한 사람들은 다 붙잡고 물어보고 있어요.”
윤 회장이 보여준 논문의 한 페이지에는 임금이 환궁 때 광화문 앞에 이르러, ‘노장, 취발이, 왜장녀’ ‘사냥놀이’ 등 판놀이와 ‘금강산놀이’ ‘팔선녀놀이’ ‘신선놀이’ ‘상산사호놀이’ 등 길놀이를 거행했다는 부분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당시에 전국 팔도 출신이 자신들의 아리랑을 부르고 좋아했다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도 각 도의 아리랑을 되살려 한 거죠. 그냥 한 게 아니라. 내년, 내 후년에는 이 놀이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잘 살려볼까 고민 중이에요.”
윤영달 크라운해태제과 회장 인터뷰. [이상섭 기자. babtong@heraldcorp.com] |
▶떼창ㆍ떼조각으로 직원들과 거리감 없애=10월 12일과 13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크라운-해태제과 ‘창신제’는 개최한 지 10년이 지나서 이젠 워낙 유명하다. 임직원 100명이 무대에 올라 ‘사철가’를 북을 두드리며 떼창하는 광경은 서양 종교음악의 대 합창처럼 우리 소리도 웅장하고 장엄한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를 전문 소리꾼이 아닌 연령, 성별도 다양한 아마추어들이 해낸다는 게 대견한 생각조차 든다. “작년에는 7개월 준비했는데, 올해는 6개월 가량했죠. 그런데 노래 잘하는 사람이 참여하면 재미없어요. 음치나 안하려고 뺀질거리는 사람을 쪼아다가 명창을 만들면 희열이 높죠.”
테스트에선 수준 미달이던 한 재무부장은 집에서나 어느 자리에서건 ‘이 사안~, 저 사안~’하며 소리를 연습하더니 언젠가 부터 완창을 해냈고, 지금은 음에 몸을 싣을 줄 아는 수준에 도달했다.
기업이나 상품의 홍보마케팅 차원에서 예술경영을 시도하는 것으로 으레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윤 회장의 사고는 예술과 경영의 벽이 없고, 그 한계를 뛰어넘는다. 기업경영에 필요한 수단으로서의 예술이 아닌, 예술 확산 목적을 위한 방편으로서 기업 경영을 하고 있는가란 의문이 들 정도다. 윤 회장의 떼창에 대한 원대한 포부를 들으니 그랬다. “내 예술경영의 궁극점은 1500만이 떼창으로 ‘사철가’를 부르는 시대를 보는 거에요. 그 정도의 목표는 가져야지. 이제 100명인데, 그 한명 한명이 주변에 전파하고, 앞으로 천, 만 단위로 늘어갈 거에요.”
국악이 떼창이라면 미술에선 떼조각이다. 윤 회장은 음악 장르에서 국악, 미술 장르에선 조각, 문학에서 시를 후원하고 있다. 모두 각 분야 소외 장르다. 내년 1월 송추아트밸리 일대에서 여는 스노우페스티벌에선 직원 1000명이 참가해 눈 조각 1000개를 전시할 계획이다. 얼마전엔 직원들이 직접 쓴 시집도 발간했다. “영업담당자들이 처음에는 유머를 외웠죠.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야한 내용, 저속한 유머를 하는 거라. 그래서 불러다가 자작시를 지어 낭송하도록 했죠. 근데 이건 시도 아니고 뭣도 아닌거야. 신달자씨 모셔서 강의도 듣게 하고, 시작(詩作)도 배우게 했는데 좋아지더라구요. 시간이 지나니까 이젠 그럴싸하게 들려. 협력사와의 술자리에서도 시낭송을 하니 얼마나 있어 보이겠어요. 몇달만에 직원들이 쓴 시가 2300수가 모여서, 그 중에서 추려서 책을 냈어요.”
직원들이 소리, 조각, 시 연습하느라 도대체 근무는 언제하느냐고 물으니, 윤 회장은 “일 안하고 회사가 어떻게 굴러가겠나. 노래 좀 했다고 해서 매출에 큰 변화는 없다”고 했다. 그런데 근무 분위기는 예술경영을 시도하기 전과 후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혁신됐다. 직원들은 창의적 활동을 통해 리프레시를 하며, 예술가로서 활동한다는 자부심도 갖게 됐다는 것이다. “고객에게 과자가 아닌 다른 행복감을 줘야겠다는 마음이었요. 우리는 돈이 많은 기업이 아니니 정신, 성의를 다 해보는 거죠.”
▶국악ㆍ예술이 협력사 파트너십 강화의 지렛대=윤 회장은 한번 꽂히면 몰입하는 성정을 지녔다. “경주마처럼 옆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린다”고 했다. 일 처리도 ‘휘모리급’이다.
2세 경영인은 윤 회장이 선친으로부터 처음부터 잘 갖춰진 규모있는 기업을 이어받은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과자업계 시장을 바꿔버린 장본인”이라고 힘줘 말했다. 서울 중림동에서 선친이 ‘산도’를 만들어 도매상을 통해 팔때 얘기다. 한번은 윤 회장이 동대문 한 상점에서 매대에 진열돼 있지 않은 ‘산도’를 찾으니 상점 주인이 테이블 밑에서 산도를 꺼내더랬다. 그래서 영업사원에게 많이 팔아달라고 식사 대접을 해도, 산도는 늘 매대 밑 구석에서 나왔다.
“‘아, 요거봐라. 이 사람들 고약하네’. 그래서 도매상 거치지 않고 직접 소매상에게 주는 방법을 생각했죠. 그게 루트세일이란 거에요. 그런데 다른 도매상에게 발각되면 우리 제품을 안팔아줄게 뻔하니, 도매상이 없는 지역을 찾아요. 그게 바로 전주였어요. 이리(지금 익산) 도매상에 공급을 하지 않고, 전주에서 리어커를 끌고 소매상에 공급했죠. 그 당시에 대학생들을 모아놓고 반년 동안 영업망 연습을 한 거죠. ‘과자 진열대에 몇개가 있더냐’ 일일이 적었고. ‘산도’ 없이 어디 장사가 되는 지 봐라 했죠. 과자업계를 완전히 들어 엎어놨지.”
윤 회장은 외환위기 때 부도가 난 뒤 바로 일어설 수 있었던 힘도 이 영업망 덕이라고 했다. 1995년에 선친을 설득해 설비투자를 했는데, 환율이 뛰자 부채가 수십억에서 수백억으로 불어났고 급기야 기업은 부도가 났다. 위기를 극복하고 2005년 몸집이 더 큰 해태제과를 인수하며 제과업계 2위로 도약했지만 2006년 다시 한번 위기가 닥쳤다. ‘오예스’ 포장지에 유명 작가의 장미 2000송이를 그려 넣어, 포장지를 재활용할 수 있게 하고 구매 고객에게 루브르박물관을 보내주는 이벤트를 기획하며 유통가에서 예술 마케팅으로 주목받던 때였다. 그런데 부정적 언론 보도가 한번 나간 뒤 판매와 매출이 급락했고, 윤 회장은 고객, 협력사와의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이런 고민의 산물이 국악 공연을 대대적으로 연 ‘창신제’였다.
▶한국인 고유의 신명 DNA를 깨워야...=그렇다해도 평소 예술에 대한 관심이 없었더라면 이런 기획을 하지 못했을 터. 윤 회장은 40여년전 문예지 ‘문학’을 창간해 직접 운영했고, 김환기 등 작가를 표지화로 쓰는 등 시, 그림 등 여러 방면에서 예술적 취향을 드러냈다. 알고보니 그는 조선중기 문인 고산 윤선도(1587~1671)의 11대 손이며, ‘자화상’으로 유명한 조선후기 문인 윤두서(1668~1715)의 후손이다. 윤 회장의 극진한 국악 사랑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윤 회장 뿐 아니라 그의 친동생 윤영주 ‘나무와 벽돌’ 사장은 북촌에 한옥 민가헌을 지었다. 친동생 윤영노 쟈뎅 회장은 국내에 커피 문화를 알리는 데 기여했다. 삼형제를 보면 ‘멋’과 ‘맛’도 유전인 모양이다.
“DNA는 잘 모르겠지만, 흥이나 가락이 우리 몸 속에 있다는 건 확신해요. 많은 사람들을 보면 분명 신명이란 게 있거든요.”
그는 내년 ‘창신제’에선 직접 무대에 올라 시조를 읊으며, 우리의 신명을 전파할 생각이다.
한지숙 기자/jsha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