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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크엔드] “대선 이기자” 노무현의 기상천외한 승부수…20년 전에 만들어졌다
세종특별자치시 탄생하기까지…
1994년 지방자치분권연구소가 출발점
2002년 9월 대선공약으로 구체화
지역균형발전 주효 대통령 당선

‘수도’명칭 논란에 행정도시로 추진
盧대통령 탄핵 가결뒤 곧바로 총선
열린우리당 압승에 다시 탄력받아

MB정부 ‘경제도시’변경추진으로 위기
朴대통령 원안 안굽혀 지금의 세종시로



지난 2002년 9월 30일은 오늘의 ‘세종특별자치시’가 있게 된 역사적 순간이다. 노무현 민주당 대선 후보가 충청권 행정수도 공약을 발표한 날이었기 때문. ‘수도를 옮기자’는 ‘발칙한’ 공약은 논란을 일으켰고, 논란의 중심엔 노 후보가 섰다. 사실 수도 이전은 ‘승부사 노무현’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지역 균형 발전’이란 대의와 ‘충청 표심’이란 실리의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묘수.

노 전 대통령의 측근들은 수도 이전 공약의 연원을 1994년 노 전 대통령이 설치한 ‘지방자치분권연구소’(1994년) 때부터라고 전한다. 참여정부 마지막 비서관 김경수 노무현재단 봉하사업본부장은 “1995년 원광대 강연에서 노 전 대통령은 ‘서울 위주 발전의 한계’와 ‘지역 발전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그때 발표문을 보면 대선 공약 발표 때와 자구까지 거의 동일하다. 그의 지론이었다”고 설명했다. ‘친노’ 박범계 의원은 “수도 이전계획을 노 후보에게 공약으로 삼으라고 제안한 것은 대전의 한 교회 목사였다. 대선을 앞둔 시점에 목사를 만났고, 두 분의 생각이 일치되던 그날 대선 공약도 확정됐었다”고 회고했다.

▶노무현 ‘당선 공약’ 세종시=노 전 대통령의 ‘수도 이전’ 공약은 대선 당선에 주효했다. 경쟁 상대였던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의 표차는 불과 57만여표.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효과와 더불어 ‘수도 이전 공약’을 통한 충청 표심 끌기가 없었다면 대선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신승’의 결과물은 취임 후 꼭 열두 달째가 되던 2004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정부는 신행정수도특별조치법을 공포하고, 수도 이전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과 정치권은 정부 이전에 따를 ‘비효율성’과 법안 자체의 ‘위헌성’을 문제 삼으며 반대했다.

이명박 정부의 마지막 통일부 장관이었던 류우익 서울대 교수 등 ‘수도이전반대 국민연합’은 2004년 7월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했고, 헌재는 이 사안을 ‘긴급’을 요하는 사안으로 보고 불과 3개월여 만에 ‘위헌 결정’을 내렸다. 서울이 수도라는 것은 600여년 동안 형성된 ‘관습헌법’이라는 것이 헌재가 내놓은 위헌 결정의 이유였다. 헌재의 위헌 판결 이후 노무현정부는 ‘수도’라는 두 글자를 빼고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특별법’을 이듬해 3월 공포해 사실상의 수도 이전을 재추진했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충청권 행정수도의 연원은 1994년 지방자치분권연구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오늘의 세종특별자치시는 노 전대통령 탄핵안 가결과 열린우리당의 총선 승리, 이명박 전대통령의 수정론과 박근혜 대통령의 원안 고수 등 우여곡절 속에 자리를 잡아 지금에 이르렀다.

위헌 결정이 났는데 어떻게 수도 이전을 재추진할 수 있었을까. 이 과정엔 ‘대통령 탄핵’이라는 커다란 정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2004년 3월 국회는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가결시켰고, 불과 한 달 후인 4월에는 총선이 있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부당하다’는 인식이 세간에 퍼지면서 소수 정당에 불과했던 열린우리당이 2004년 총선에서 152석, 과반을 넘는 거대 여당으로 탄생했다.

국토 균형 개발이란 대의와 소외됐던 충청 민심 자극, 그리고 예상외의 ‘대통령 탄핵’이란 변수가 어우러지며 오늘의 ‘세종시’는 이후, 착실히 진행됐다. 그러나 정권교체의 여파는 컸다.

▶갈등만 부추긴 이명박정부=이명박정부 중반 이후는 세종시를 둘러싼 논란과 갈등으로 얼룩졌다. ‘원안 고수’를 주장하는 지역민과 ‘수정안 방침’을 내세운 청와대의 의지가 충돌했다. 2009년 9월 취임한 정운찬 국무총리는 취임일성으로 “행정중심복합도시는 경제학자인 제 눈으로 보기에 그리 효율적인 플랜은 아니다. 원점으로 돌리기는 어렵지만, 원안대로 다 한다는 것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세종시 수정론’이었다.

‘세종시 수정론’은 교육과 과학을 중심으로 한 ‘경제도시’로 세종시를 성장시키는 방안을 담고 있다. 정부 이전계획은 빠진 것이다. 때문에 지역민들은 ‘반쪽짜리’ 도시계획이라 비판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재임 기간에 “세종시는 사실상 수도 분할”이라며 세종시 수정론을 강조했다.


사실 ‘국토 균형 발전론’이 옳으냐, ‘강한 수도권론’이 옳으냐의 문제는 여전히 학계에서도 논란이 있다. 국토가 골고루 발전해야 한다는 논리는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 몰려 살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비정상적’이라 보는 반면, 정부 이전에 반대하는 측은 국정 운영의 비효율성과 ‘통일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통일 이후 한반도의 중심이 될 서울을 굳이 지금 옮길 필요가 있느냐는 논리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지론 ‘균형발전론’을 내세워 수도 이전을 ‘대못’처럼 단단히 박았고, ‘효율성’을 앞세운 세종시 수정안 논리는 ‘강한 수도권론’으로 이어진다. 일각에선 서울을 중국의 수도 베이징 수준으로 성장시켜야 선진국 대열에 오를 수 있다는 논리도 나온다.

세종시가 현재의 모습으로 탄생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분수령은 2010년 6월 본회의였다. 당시 본회의엔 ‘신행정수도 후속 대책을 위한 연기ㆍ공주 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 개정안(행정도시특별법)’이 상정됐는데 재석 275명 중 반대표를 던진 의원이 164명이나 됐다. 반대표 가운데엔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친박계 여당의원 40여명도 포함됐다. 여당 내 야당 역할을 한 박근혜 대통령의 힘이 컸다는 평가다.

홍석희ㆍ조민선 기자/h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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