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일본 현대미술’하면 우리는 만화를 현대적으로 차용한 무라카미 다카시와 나라 요시토모의 그림을 떠올린다. 조금 더 현대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 조각이라든가 그물 페인팅 쯤을 덧붙일 수 있겠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일본 현대미술=만화적 팝아트’라는 등식은 너무 편향된 시각이다. 지금껏 우리가 쉽게 접하지 못했던 동시대 일본미술의 감춰진 면모를 한자리에서 살필 수 있는 전시가 서울 관악구 신림동 서울대미술관(관장 권영걸)에서 개막됐다.
오는 4월 14일까지 ‘리:퀘스트(Re:Quest)’라는 타이틀로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일본 현대미술 40년의 다채로운 결이 망라됐다. 지금껏 국내서 일본 유명작가들의 개별 전시는 종종 열렸지만, 현대미술사를 관통하는 주요작가의 대표작이 총출동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권영걸 관장은 “한국에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는 1970년대 이후 활발하게 활동해온 53명의 작품 112점을 통해 일본 현대미술을 재검토하고, 아시아 및 한국미술과의 동시대성에 대한 담론도 개진하고자 전시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전시는 모두 6개 섹션으로 짜여졌다. 첫 번째 ‘울트라 사고’ 섹션에서는 기존 체제에 대한 변혁의 의지가 강했던 1970년대부터 서구중심주의에서 탈피해 ‘차별성’에 방점을 찍었던 1980년대, 정보화와 세계화가 가속화된 오늘날까지 시대적 경향에 주목하며 자아를 확장시킨 작가들의 작품이 모였다. ‘울트라 사고’란 새로운 스토리를 세계에 들려주고자 한 경향을 일컫는다.
미술관 중앙의 뻥 뚫린 아트리움에는 ‘폴카도트의 여왕’ 쿠사마 야요이의 붉은빛 풍선 ‘물방울 강박’이 설치됐다. 후나코시 가츠라의 기이한 인체조각 ‘날개를 펼친 새가 보였다’와 현대사회 속 가족을 형상화한 카토 이즈미의 독특한 조각 ‘IK0616P’도 눈에 들어온다.
이어 ‘이해ㆍ오해ㆍ커뮤니케이션’ 섹션에서는 1990년대 이후 일본 내 미술시장이 위축되면서 해외로 눈을 돌리는 작가들이 러시를 이루던 시기의 작품들이 나왔다. 문화 교류와 이동의 경험을 통해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이루고자 한 작품들이다. 인상파 화가 마네의 회화 ‘피리 부는 소년’을 자신이 직접 퍼포먼스를 펼치며 패러디한 모리무라 야스마사의 작업 ‘초상 소년1, 2, 3’과 아라키 노부요시의 사진연작 ‘센티멘털한 여행, 겨울 여행’ 등 꽤 널리 알려진 작업도 포함됐다. 세계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무라카미 다카시와 나라 요시토모, 미야지마 타츠오의 작품들도 이 섹션에 나왔다.
세 번째 ‘우선 확실성의 세계를 버려라’ 섹션에서는 기존의 기법을 철저하게 해체한 실험적 프로젝트들을 만날 수 있다. 물질을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상정했던 기존의 인간관에 반기를 들고, 근대에 대한 원리적인 재검토를 시도했던 작가들의 작품이 여럿 나왔다. 서구근대주의를 뛰어넘어 동양철학을 예술에 접목한 ‘모노하(일명 물파)’에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주며 일본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이우환의 회화 ‘다이얼로그’가 출품돼 눈길을 끈다. 또 물질에서 출발한 ‘초물질적 흐름’, 사람과 장소와 연관된 스토리성에서 출발한 ‘초인간적 흐름’을 표방했던 다카마츠 지로의 ‘천의 느슨해짐’, 노무라 히토시의 ‘달의 악보’ 등 기념비적인 작품들도 감상할 수 있다.
네 번째 섹션 ‘모더니즘의 유산과 그 너머’, 다섯 번째 섹션 ‘미술의 언어로 말하기’에서는 회화 형식으로 복귀하거나 기존 고급예술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일련의 시도를 살필 수 있다. 마지막 ‘위기 시대의 유연한 상상력’ 섹션에서는 일군의 젊은 작가들이 개인의 삶에 주목하며 소소한 일상용품을 예술로 승화시킨 재기발랄한 작품이 나왔다. 강렬한 사선의 축들과 계단식 내부공간 때문에 현대미술을 담기에는 만만찮은 렘 쿨하스의 건축물을 발랄한 감성으로 재치있게 요리한 다나카 코키의 공간 설치작업도 만날 수 있다.
이번 전시를 큐레이팅한 마츠모토 토루 도쿄 국립근대미술관 부관장은 “40여년간 일본의 현대미술을 돌아보는 회고전은 일본에서도 1994년 이후 열린 적이 없는 만큼 이번 전시는 우리에게도 귀중한 기회로, 전환기를 맞은 일본 현대미술을 돌아볼 수 있는 자리”라고 말했다.
또 서울대미술관 오진이 학예연구사는 “일본현대미술을 통시적으로 훑은 이번 전시는 자국의 문화적 정체성 설정방식이 본질적 문제라기 보다는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대한 개인적 분투의 소산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며 “그렇다면 일본과는 다른 배경을 가진 한국현대미술이 그리는 또다른 궤적도 이를 통해 살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관람료 3000원. (02)880-9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