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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크엔드] 생각할수록 부러운…美·유럽 특검, 그들에게 성역이란 없다

美 1978년 특검 상설화…비리 본격수사
‘워터 게이트’ 닉슨 대통령 임기도중 사임
‘이란-콘트라 스캔들’ 레이건 정권 치명타

伊 1990년대 ‘마니 풀리테’ 부패정치 척결
국회의원 25% 검찰조사…3000여명 체포
디 피에트로 영웅 부상…반부패 대명사로



미국, 유럽 등에선 검사들이 무차별 수사로 각종 권력 비리와 부패 척결에 앞장섰다. ‘제4의 권력’이라는 특별검사의 본고장 미국에선 국가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은 물론 그 측근까지 특검 대상에 줄줄이 올라 단단히 곤욕을 치렀다. 그런가 하면 바다건너 이탈리아에선 한 젊은 검사의 ‘송곳 수사’로 40년 부패 정권이 종말을 맞았다. 엄정한 진상 규명으로 비리 정치인과 공직자들을 혼쭐낸 미국과 이탈리아 검사들의 활약상을 소개한다.

▶美 닉슨, 레이건, 클린턴…특검에 수모=미국에서 특검이 빛을 발한 것은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재선을 꾀하는 비밀공작반이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돼 체포된 것. 닉슨 대통령은 이 사건 수사를 위해 아키발드 콕스를 특검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콕스가 사건 해결의 열쇠인 ‘백악관회의 녹음 테이프’를 끈질기게 요구하자 닉슨은 그를 해임하려 했고, 이를 거부한 법무장관과 차관을 동시에 잘랐다. 그러자 국민 여론은 닉슨 정부에 등을 돌렸고, 결국 닉슨은 미 역사상 최초로 임기 도중 사임했다. 이후 1978년 미국에는 특검이 상설화되었고 외부권력으로부터 독립해 권력비리를 수사하게 된다.

1986년 로널드 레이건 정부 시절의 ‘이란-콘트라 스캔들’ 수사 때도 특검의 활약은 돋보였다. 니카라과 정부군과 레바논의 한 신문에 의해 미 정부가 이란에 비밀리에 무기를 판 돈으로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들통나자, 미 역사상 7번째 특별검사로 로런스 월시가 임명됐다. 그는 정권의 온갖 압박을 받아가며 수사를 강행해 88년 레이건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인 존 포인덱스터, 롭트 맥팔레인 및 올리버 노스 국가안보회의 보좌관 등 최측근들을 기소함으로써 레이건 정권에 치명타를 입혔다. 다만, 월시의 무차별 수사에 반발한 공화당 의원들의 법개정 요구로 특검법은 1992년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후 1994년 7월 빌 클린턴 대통령 부부의 부동산 투자 부정사건인 ‘화이트워터 스캔들’이 터지면서 특검법은 부활한다. 이를 수사하기 위해 1994년 1월 첫 번째 특별검사 로버트 피스크가 임명됐으나 일단 무죄로 결말이 났다. 이어 8월 케네스 스타가 특별검사를 맡으면서 클린턴 부부를 궁지로 몰아갔고 클린턴에 관한 성추문 조사를 벌였다. 그는 대통령의 불륜에 초점을 맞춰 1998년 9월 대통령의 위증과 권력남용이 충분한 탄핵사유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 클린턴 전 대통령을 사임 직전까지 몰고갔다.

다만 일각에선 스타 검사가 수사 명목으로 4100만달러를 물쓰듯 쓰고, 전화통화 도청과 협박 등 불법 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나타나자 국민의 여론에 반해 대통령의 개인비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는 지적이 일기도 했다. 


▶검찰의 칼끝에 40년 권력의 철옹성도 흔들=이탈리아의 부패한 정치는 1990년대 초반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로 전기를 맞는다. 이탈리아 정치권에서 부정과 비리는 당연한 일로 치부됐다. 정치인과 재벌의 유착, 마피아와의 결탁, 정치자금 유용 등 각종 부정부패는 늘 끊이지 않았다.

부패척결운동은 작은 사건이 발단이 됐다. 1992년 2월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젊은 검사는 정치인의 집에서 700만리라가 담긴 현금봉투를 찾아냈다. 이 봉투는 ‘마니 풀리테’의 도화선이 됐다. 피의자를 조사하던 밀라노 검찰은 비리가 정치권에 거미줄처럼 엮인 사실을 감지하고, 연립여당인 기민ㆍ사회당에 대한 수사에 들어갔다. 시장이 구속되고 장관이 잡혀 들어가고 국회의원이 체포됐다.

사정을 주도했던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 검사는 1년 동안 3000여명을 체포 또는 구속했다. 이탈리아 전체 국회의원의 25%인 177명이 검찰 조사를 받았고, 2년이 채 안돼 고위 공직자와 기업인 등 이탈리아의 내로라하는 정ㆍ재계 실력자 1400여명이 법정에 섰다. 이 가운데 1000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마니 풀리테의 칼끝은 권력의 최정점에 서 있던 당시 베티노 크락시 총리를 정조준했다. 수백억원대 불법 정치자금을 조성한 혐의를 받던 크락시 총리는 끝내 해외망명을 택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50년 동안 이탈리아 정치를 주물렀던 기민ㆍ사회당 연립정권도 붕괴됐다. 40년 권력의 철옹성이 검찰의 칼끝에 무너진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 국민들은 이 같은 활약상을 보인 검찰을 ‘마니 풀리테’라고 부르며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981년 검사가 된 피에트로도 뿌리깊은 정경유착을 척결하면서 국민적인 영웅으로 부상했다.

몇 년에 걸친 사정혁명으로 이탈리아 정치지형은 단숨에 바뀌었다. 부패와 연루된 정치인들이 유죄판결을 받으면서 정계는 한순간에 물갈이됐던 것이다. 위기를 느낀 정치권은 선거제도 개혁에 나섰다. 기존 정치관계법들을 폐지하고 선거구 제도도 새로 만들었다. 모든 기성 정당은 당명을 바꾸거나 새로운 정당을 만들기 위해 이합집산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마니 풀리테’는 이제 수사기관이 주도하는 반부패운동의 대명사가 됐다.

김영화ㆍ권도경 기자/bettyki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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