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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버스토리> “이젠 흔적만 남았지만…아직도 도전·열정은 그대로…”
글로벌‘ 삼성’ 기틀 다진 대구 삼성상회 가보니…
마산서 사업 실패 통해 자각
기업 경영인의 기본틀 다져

대구 삼성상회서 새 출발
한국전쟁에 황폐해진 국토
고통속의 국민생활 목격하며
제조업으로 ‘사업보국’ 결심

모두가 무모하다 반대할때
제일제당·제일모직 설립

취업 준비생·예비 창업자들
호암정신 잇고자 오늘도 발길



[대구=홍승완 기자] 호암 생가에서의 소회를 뒤로하고 방향을 대구 쪽으로 틀었다. 대구는 호암이 기업인으로써의 자신을 자각하고, 진정한 기업가로써의 행보를 본격화한 땅이다.

호암을 잘 모르는 사람은 그저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자연스럽게 부자가 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의 일생을 잘 들여다보면 오뚝이 인생이었다. 기업가로서 초년엔 성공보다 실패가 훨씬 더 많았다. 연이은 도전과 실패 속에서 깨달음을 얻고, ‘진짜 기업가는 무엇인가’를 숙고하면서 한발 한발 자기 개선을 통해 오늘날 삼성그룹의 토대를 만들어냈다. 대구는 호암의 제2고향이다.

호암은 아버지로부터 얻은 삼 백석으로 사업을 시작한다. 집 한 채 값은 되지만 사업자금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마산에서 정미소를 차리고, 마산일출자동차회사를 인수해 큰 돈을 번다.

이후 호암은 웬일인지 땅을 사모으기 시작한다. 땅에서 나는 쌀값보다도 토지대가 더 낮았고, 토지의 시세보다 은행의 감정가가 훨씬 높다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는 식산은행 마산지점에서 융자를 얻어 ‘김해평야의 땅을 다 사들이겠다’는 기세로 땅을 사모은다. 기업가라기에는 설익은 20대의 호암에게 눈앞에 널린 돈 벌 기회를 그냥 놓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쉽게 얻은 부는 오래가지 못했다. 1937년 중ㆍ일전쟁이 본격화하면서 식산은행이 일체의 대출을 중단하고 대출 회수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호암은 정미소와 운수회사, 보유 중이던 토지 등 모든 것을 팔아야 했다. 빚을 청산하고 나니 전답 10만평과 현금 2만원이 남았다. 이것 역시 공동 출자자와 나눠 청산했다.

이 같은 경험은 호암에게 사업가로써 첫 자각을 불러일으키면서 엄청난 교훈이 된다. 투기는 무모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만 이익이 되고, 많은 사람에게 피해가 되는 사업이라는 교훈을 얻는다. 기업경영 기본 틀에 대한 깨달음이다.

세월은 가고 터는 남았다. 삼성그룹의 출발이 된 대구 인교동의 삼성상회 터에 세워진 대리석 건물 모형(④)에선 삼성 태동의 역사가 묻어난다. 1938년 첫 사업의 실패를 딛고 삼성의 모체가 된 삼성상회의 모습(③). 당시에 생산되던 사이다를 비롯한 각종 음료수들(①). 4층 건물 삼성상회의 1층에는 사무실이 2·3·4층에는 음료와 국수 등을 만드는 공장이 있었다. 40년대 삼성상회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모습(②) .

호암의 대구생활은 이런 경험을 밑거름 삼았다. 그는 전국을 비롯한 북한 지역에의 탐방을 통해 무역업을 하기로 결심한다. 최적지는 대구였다. 중국으로, 일본으로 오가는 막대한 농수산물과 화물이 철도와 도로를 통해 오가는 요충지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28세 때인 1938년 3월 1일 대구 서문시장의 끝자락, 지금의 인교동에 삼성상회를 차린다. 오늘날 삼성그룹의 출발점이다.

세상에 변해 서문시장에서 호암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기억 속에서 그 체취를 가늠할 뿐이다. 서문시장에서 40년 이상 장사해온 박모 씨는 기자에게 “지금이야 많이 죽었지만 옛날에는 없는 것이 없는 시장이라고 불렸다. 일제시대만 해도 포목과 주단, 과일 같은 것은 한강 이남 제일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고 귀띔한다.

삼성상회는 그 서문시장의 서쪽 끝자락인 북성로 공구골목 한 편에 자리잡았다.

삼성(三星)이라는 이름도 이때 처음 등장한다. 크고, 강력하고, 영원한 별이 되라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 삼성이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기업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은 이 같은 작명(?)과 무관치는 않아 보인다.

삼성상회 설립 1년 뒤에는 조선양조를 인수해 양조업에도 뛰어든다. 호암은 언제나 한 가지 사업이 자리잡으면 다음 사업을 생각했다. 사업의 성공해 취해 있기보다는 다음 도전을 살폈다. 타고난 기업가의 본능이다.

1945년의 광복은 호암에게 기업가로서의 본격적인 고민을 안겨준다. 자주독립국가의 경제건설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의 숙제 앞에 놓였다. ‘인간 이병철’이 경영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해답을 찾아가는 시기였다.

이후 삼성의 사업 확장은 이 회장의 이러한 ‘사업보국’의 신념 아래 이뤄진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잘 되던 회사 자산의 대부분을 북한군에 빼앗기고 사실상 재창업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호암이 무역업 대신 제조업을 택한 것도 수입만 가지고는 국민생활이나 산업활동에 긴요한 물품을 충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무리한 계획이라고 손사래를 치는 와중에도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창업하고, 고집스럽게 순수 우리 기술로 공장을 설립한 것도 이 같은 사업보국의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일제당 설립 2년 만에 그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거부가 됐지만, 당시를 호암은 이렇게 회상한다.

“일신의 안락을 위해서는 그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나, 언제나 축재가 목적이기보다는 신생조국에 기여할 수 있는 사업을 모색하고 있었다. 기업가는 기업을 구상해 실현시키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운영하면서 국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발전적으로 파악해 새로운 기업을 단계적으로 일으켜 갈 때 더없는 창조의 기쁨을 가지는 것 같다.”

지금의 삼성상회 터는 휑하다. 전쟁 후 서문시장이 터전을 조금 옮기면서 터가 있는 북성로 공구골목은 오히려 한산해졌다. 삼성상회 건물은 목조건물이라는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1997년 노후건물로 지목돼 헐렸다. 지금은 당시의 상점 모양을 복원한 아이보리빛 건물 모형이 남겨져 있을 뿐이다.

삼성상회 시절의 호암의 자각이 있었기에 태어났을 제일모직 터는 오페라하우스가 들어선 멋들어진 시민공원으로 거듭났지만, 삼성상회 터의 인근에는 나지막한 건물의 공구상과 ‘자갈마당’이라 불리는 허물어져가는 윤락가, 모노레일 설치를 위해 북적거리는 공사현장과 먼지만 가득할 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삼성상회 터를 찾는 사람은 많다. 기자가 몇 시간 방문한 사이에도 수 십명의 사람이 조용히 삼성상회 터를 둘러보고 갔다. 경기도의 한 대학에서 왔다는 3명의 남자 대학생은 “가을 취업시즌을 앞두고 왠지 한 번은 들르고 싶었다”고 했다.

흔적만 남은 삼성상회 터지만 그곳에 여전히 청년 이병철의 도전정신과 책임감, 더 나은 기업인이 되려는 열정이 맴돌고 있었다.

sw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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