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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일간 ‘부처’를 새긴 남자
법화경 7만字 등 10만字 5톤 돌에 담아낸 전각의 대가 조성주 화백…한국미술관서 24일부터‘법화경 불광’展

온 세상에 자비를 전하기 위해 오신 부처님의 탄신일을 목전에 두고 우리 불교계는 도박 파문으로 큰 홍역을 치렀다. ‘치매 예방을 위한 내기 문화’라는 강변까지 접한 국민은 허탈할 뿐이었다. 이런 씁쓸한 상황에서 한 작가가 ‘대승불전의 백미’인 법화경 전문을 6년여에 걸쳐 완각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반갑기 그지없다. 그 주인공은 서예전각가 국당(菊堂) 조성주(61) 화백. 국당은 2000일간 피땀 흘려 완성한 작품을 집대성해 ‘법화경 불광(佛光)전’을 개막한다. 진흙과 연꽃, 법화경은 중생이 불보살로 거듭나는 가르침이어서 하얀 연꽃에 비유된다. 어지러운 시대에 그 하얀 연꽃이 우리 앞에 활짝 피어났다.


하루 15시간 작업…조 화백을 살린 법화경

지난 2007년 국당은 일생일대의 시련을 맞는다. 세 번째 개인전을 마치고 충전을 하던 중이었다.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그의 가계는 풍비박산이 났다. 청천벽력이었다. 액수만도 수억여원. 글씨 쓰고, 각(刻)을 해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규모였다. 하늘은 노랗고 가슴은 두근대며 온몸의 힘은 빠지고…. 몇 날 며칠을 뜬눈으로 보냈다. 바로 그때 불교 전시기획자이자 무용가인 전수향 씨가 법화경을 건넸다. 국당은 경전을 읽고 또 읽으며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조금씩 삶의 희망을 되찾았다. 이에 전 씨는 국당을 아트 프로젝트로 이끌었다.

기획자인 전 씨의 독려에 국당은 법화경 총 28품의 전각 설계에 들어갔다. 경전의 7만자를 모두 모눈종이에 쓰고 번호를 매기며 부처님의 설법 장면인 영산회상도 등 그림과 문양을 혼합해 디자인하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 그리고 설계도에 따라 한 자 한 자 돌에 새기는 작업을 하루 15시간씩 매달렸다. 너무나 막막하고 끝이 보이지 않아 중도에 포기할 생각도 여러 번 했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고 2000일을 헌신한 끝에 마침내 법화경 7만자는 전각 작품으로 탄생했다. 사용한 돌은 5t. 돌 값만도 4억원이 들었다. 무거운 돌을 자동차에 싣고 정릉 집과 인사동 작업실을 오가며 작업했던 그는 가계가 파산하는 바람에 산 지 1년도 안 된 자동차를 1000만원이나 손해 보고 팔아야 했다. 하는 수 없이 배낭에 무거운 돌을 잔뜩 담고 버스를 두 번씩 갈아타고 집과 작업실을 오가며 작업했다. 오뉴월 무거운 배낭을 메고 정릉 집 언덕을 오르다 보면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되곤 했다. 이렇듯 힘든 고비 때마다 전 씨는 국당을 성원하며 전무후무한 전람회를 성사시켰다.

국당 조성주 作 ‘불광2-대자비’의 부분도.

5.8m 대작 이으면 70m‘하이퍼 전각’

전각은 흔히 ‘방촌(方寸) 예술’로 불린다. 사방 한 치(약 3㎝) 내외의 인면에 글과 그림을 새겨넣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당은 사방 8㎝, 심지어 무게 50㎏에 이르는 20㎝ 크기의 돌도 사용했다. 거기에 쓰고, 그리고, 새기는 서ㆍ화ㆍ인에 디자인, 조각이라는 요소를 결합한 ‘음양각의 입체 각석 작품’인 셈이다. 기법도 국당 스스로 창안한 퍼즐과 모자이크 방식을 대입했다. 그의 말로는 세계 초유의 설치미술 작품이다. 그래서 붙인 이름이 초월을 뜻하는 ‘하이퍼 전각’이다.

이번 전시(오는 24일~6월 4일 인사동 한국미술관)에 나오는 메인 작품 ‘불광-대자비’는 길이 5.8m의 대작이다. 이를 여러 점 제작해 전체 설치 길이는 무려 70m에 이른다. 법화경은 7만자이지만, 여타 경전까지 합치면 총 10만자다. 국당은 작업 기간 내내 고려 팔만대장경을 생각했노라고 했다. 정치ㆍ경제ㆍ사회가 모두 어수선한 작금의 현실이 희망차게 바뀌길 염원하면서 한 칼, 한 획을 새겨나갔다는 것. 또 오랜 침체에 빠진 우리 불교미술이 활기를 되찾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양은용 교수(원광대 한국문화학과)는 국당 작품을 ‘영산회상의 연꽃만다라’라 부르며 “한 작가의 예술혼에 의해 석존 정각에 바탕을 둔 구세 경륜이 경전에 머무르지 않고 지구촌을 정화할 연꽃으로 피어올랐다”고 평했다. 


6년간 무려 5t의 전각석에 한 획 한 획 수만자의 법화경을 새긴 ‘국당’ 조성주 화백. 전시 출품작 중 수백여점의 전각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제공=한국미술관]

수염까지 디자인하는 서예가

국당을 특징짓는 요소 중 하나가 수염이다. 그를 만나는 사람 중 열에 아홉은 “언제부터 수염을 길렀느냐”고 묻는다. 국당 대답은 이렇다. 한ㆍ중 수교 직전인 1992년 국제서법연합 사무국장이던 국당은 서예계의 거목 여초(如初) 김응현, 스승인 구당(丘堂) 여원구 선생과 중국에서 열린 행사에 참가했다. 그가 묵은 호텔에 면도기가 없어 1주일 이상 면도를 못했단다. 그런데 여초 등이 부쩍 자란 수염을 보고 “멋있다. 아예 수염을 길러 보라”고 해 기르기 시작했다는 것. 한ㆍ중 수교가 20년이듯 그가 수염을 기른 지도 20년이다. 국당은 자신의 수염을 공들여 손질하며 늘 모양을 낸다. 자라는 대로 내버려두는 수염쟁이들과는 다르다. 주위의 한 화백은 국당을 아름다운 수염을 가진 삼국지 관우(關羽)의 호인 미염공(美髥公)에 빗대 ‘조미염공’이라 부른다. 국당이 서예에 디자인을 접목하기 시작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직도 접지 않은 노래의 꿈

국당은 글씨와 전각으로 일가를 이뤘지만 아직 버리지 못한 꿈이 있다면 ‘노래’다. 스무 살 무렵엔 가수가 되고 싶어 열병을 앓았다. 그리곤 마침내 2007년부터 음반 ‘궤적’ 1, 2집을 냈다. 남들은 여유가 많아 음반을 낸 줄 안다. 그러나 그는 고통을 잊기 위해, 희망의 끈을 잡기 위해 음반을 냈다. 그래서 음반엔 슬픈 노래들이 빼곡하다. 국당은 자신이 ‘노래하는 서예가(음유서가)’로 불리길 바란다. 이번 전시가 끝나면 또 한 차례 음반을 낼 계획이다. 이번엔 잡아 빼고 꺾는 노래를 부르겠단다. 음악과 서예를 접목한 ‘서예 콘서트’도 기획 중이다. 뒤늦게 디자인도 공부한 국당은 2006년 패션디자이너 이상봉의 파리 패션쇼에서 서예필묵을 패션에 접목시켜 우리 한글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도 했다. 또 커다란 대붓 필묵 퍼포먼스를 완성해 서예의 대중화에도 앞장섰다. 아셈(ASEM)회의를 비롯해 각종 행사에서 무려 100여회의 서예 퍼포먼스를 펼쳤다.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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