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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교육과 사교육 사이…석록쌤·만기쌤의 교육인생
스타교사·강사로 20여년…늘 마음 속엔 공교육에 대한 원죄의식…이석록 실장·이만기 이사 그들의 삶

인터넷강의가 대중화 되기 전엔 EBS강의가 최고였어요…가요계에 H.O.T.와 젝키가 있다면 언어영역 강의엔 이석록과 이만기가 있다고 할 정도로

오전 7시 학교로 출근해 수업 마치고 방송 녹화, 집에 오면 새벽 3시까지 방송원고를 썼어요…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행복했어요

하지만 점점 무너져 가는 학교현장을 견딜 수 없어 사교육 강사로 이직…돈이 아니라 공교육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

그래도 항상 미안했어요 결국 방향을 다시 잡았죠…교사·강사로 지금껏 같은 길 걸어온 우리이지만 한 사람은 공교육으로 한 사람은 사교육에 남기로… 


2000년대 초, 학원을 다니지 않아 방과 후 집에 오면 교육방송(EBS) 강의를 시청했다. ‘인강’(인터넷 강의)이 아직은 대중화되기 전이다. 당시 EBS 강의는 소중한 ‘공교육’이자 ‘사교육’이었다. 매일 브라운관을 통해 만나던 강사들은 실제로 얼굴을 마주한 듯 친밀했다.

당시 가요계는 아이돌 그룹 H.O.T.와 젝스키스가 양분했다. EBS 언어영역 강의는 이만기(51ㆍ유웨이중앙교육 평가이사)와 이석록(54ㆍ한국외대 입학사정관실장)이 자웅을 겨뤘다. 당시 인천 문일여고, 서울 화곡고 국어교사였던 이들은 EBS 강사 중 ‘1타’였다.

당시 학생들은 이들을 ‘만기쌤’ ‘석록쌤’이라고 불렀다. 강의 중간에 ‘뮤직비디오’를 틀어주는 ‘파격’과, 브라운관 너머 학생들에게 “졸지마”라고 말하는 친근한 말투가 ‘만기쌤’의 매력이었다. 지상파 채널 장학퀴즈 프로그램의 논술 출제자로 먼저 명성을 떨쳤던 ‘석록쌤’은 차분하고 따뜻한 말투와 핵심을 짚어내는 명강의로 유명세를 탔다.

2003년 대학에 진학하며 EBS 강의도 추억이 됐다. 이후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언어영역을 공부하며 머리를 쥐어짜던 여고생은 서른을 바라보는 3년차 기자가 됐다. 공교육 스타 교사였던 그들은 입시업체 평가이사와 사립대 입학사정관실장이 됐다. 친근한 ‘쌤’에서 이제는 한국교육의 대표적 전문가가 된 이들을 지난 14일 서울 태평로의 한 카페에서 설레는 마음을 안고 만났다.

외모 만큼이나 스타일도 무척 다른 두 사람. 나이를 묻자 이 실장은 “저는 1958년생 입니다”라고 평범하게 답했다. 그러자 이 이사가 냉큼 말을 이어갔다. “아, 형이 58년 개띠였지. 그때 개들이 많이 죽은 거 알아?” 폭소가 터졌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전 1961년생 입니다. 아주 영(young)하죠.” 능청까지 더했다.

이 실장은 한마디 한마디가 묵직한 사람이다. 배를 잡게하는 유머와는 그리 친하지 않다. 사실 재미는 좀 떨어진다.

이 이사는 정반대다. 말마다 늘 위트가 묻어난다. 허나 그를 ‘허허실실’이라고 여기면 오산이다. 가볍게 던지는 듯 하지만 말 속 핵심은 명확하다.


오랜 벗은 말이 필요 없다. 오가는 눈빛이 수많은 말을 대신한다. 지난 20여년간 같은 길을 걸어왔기 때문일까. 이만기(왼쪽) 유웨이중앙교육 평가이사와 이석록 한국외대 입학사정관실장의 얼굴에 핀 미소가 어딘가 모르게 닮아 있다.
안훈 기자/rosedale@heraldcorp.com


# “조용필, 비보다 우리가 나았어”

스타일은 다르지만 이들의 행보는 쌍둥이마냥 닮아있다. 어려서부터 교사에 대한 꿈을 키워온 것이 첫 번째 닮은 꼴이다.

이 실장은 대학 졸업 후 국회 사무처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안정된 직장이었지만 그는 답답해 했다. “가르치는 일이 의미 있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아이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 보람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이 이사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전 이북에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다. ‘장래희망’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새겨진 뒤부터 교사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그다. 그는 “교사밖에 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이 실장은 1985년, 이 이사는 1986년에 교편을 잡았다. 교직생활 10년을 넘길 때쯤 기회가 왔다. EBS가 고교 교사를 대상으로 강사 오디션을 진행한 것. 학교의 추천을 받은 교사들이 카메라 테스트와 면접을 거쳤다.

강의로 스타덤에 먼저 오른 건 이 이사였다. 당시 그는 이전 EBS 강의와는 전혀 다른 강의를 선보였다. 유머는 물론 최신 유행어도 사용하고, 스튜디오가 아닌 야외에서 강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생방송 강의도 했다. ‘EBS 강의의 틀을 바꿨다’는 평가가 나왔다.

“당시 조용필과 비가 부럽지 않았을 정도”라고 말하는 이 이사. “EBS 강의할 때 방송국과 집에 팬레터가 계속 왔다”면서 “우리 나이로 서른 여섯이었는데 외모가 좀 먹어줬다. 애가 둘일 때였는데 남들이 총각인줄 알았다니까(웃음)”라며 그는 너스레를 떨었다.

이 실장도 마찬가지였다. 장학퀴즈 프로그램을 지방에서 녹화할 때면 이 실장의 사인을 받기 위해 마을 어귀까지 줄이 길게 늘어설 정도였다.

학교 수업과 방송일을 병행했던 이들의 당시 스케줄은 ‘0교시가 시작되는 아침 7시 출근→ 오후 6시 수업 종료→ 오후 8시 녹화 시작→ 자정께 귀가→ 새벽 2~3시까지 방송 원고 작성’이었다. 살인적이었지만 두 사람은 그저 ‘행복’했다.



# ‘둥지’를 떠나기로 하다

현실은 마음같지 않았다. EBS 강의로 유명세를 타니 주변 교사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사립학교 교사로서 겪는 남모를 고충도 있었다.

특히 이 실장은 무너져 가는 교실현장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는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잠을 자고 집중하지 않는 등 면학분위기가 점점 엉망이 됐다”며 “가끔은 너무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2002년 이 이사는 메가스터디로, 2004년 이 실장은 강남 대성학원 대표강사로 자리를 옮겼다. 교직생활을 시작한 지 각각 17년, 20년째 되던 해였다.

세상은 그들을 곱게 보지 않았다. 이 이사는 “학생들이 ‘이젠 이만기 강의 들으려면 돈주고 봐야하는 거냐’며 항의하더라”고 전했다. 공교육 대표 스타교사였던 그들이 사교육의 첨병이 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이들의 갑작스러운 선택의 배경을 ‘돈’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들은 ‘돈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당시 일반교사 봉급보다 두 배 이상의 돈을 벌었습니다. 10년 전인 당시 억대에 달하는 돈을 벌었어요. 돈에 아쉬울 건 없었죠.”(이 실장)

그들을 이끌었던 건 공교육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을 함께 이뤄가자는 달콤한 제안이었다. “연구재단이나 대안학교 등을 세우자는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했어요. 내가 공립학교 교사였다면 학교에 머물렀을 테죠. 공립고 특채를 치렀지만 낙방하기도 했고요.”(이 이사)

“당시 제 나이가 마흔일곱이었습니다. 정말 돈을 벌고 싶었다면 적어도 30대 후반에는 나왔을 거에요. 학원에 가니 아이들이 수업을 너무 잘 들어주고…. ‘가르친다’는 느낌이 들어 좋았어요.”



# “공교육에 대한 원죄의식이 있다”

사교육업체 대표강사로, 그들의 ‘교육자 인생’도 2막이 올랐다. ‘스타 교사’에서 ‘스타 강사’로 자리매김했지만, 스스로 느끼는 죄책감이 그들을 괴롭혔다. ‘공교육에 대한 원죄의식’. 두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엔 이것이 늘 짙게 깔려 있었다.

“선택에 대한 착잡함이 계속해서 마음에 남더라고요. 미안함과 죄의식이 항상 마음을 지배했습니다.”(이 실장)

“아쉬움이나 후회는 없었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과 도전만 있었어요. 하지만 공교육에 죄를 졌다는 미안함은 컸습니다. 일종의 ‘원죄의식’이죠. 사실 지금도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이 이사)

이런 ‘원죄의식’은 사교육업체에서 일하는데 때론 걸림돌이 됐다. 이 이사는 “몸은 사교육에 있는데 머리는 공교육에 가있었다”고 했다. “학원강사에게 요구되는 자세가 있어요. 거칠게 말하면 공교육을 까면서 사교육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우리는 자꾸 ‘사교육은 보완재다. 공교육이 우선이다’라고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이 실장은 결국 ‘원죄의식’으로 인해 인생의 방향을 다시 설정하게 됐다. 그는 지난해 1월 모교인 한국외대 입학사정관실장으로 자리를 옮기며 다시 공교육의 일원이 됐다. 강의는 물론 운영하던 학원도 접었다. 소득은 반토막이 났다.

이 실장은 “외대에서 ‘공교육으로 다시 돌아와 의미있는 일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의가 왔다”며 “고민 끝에 ‘내가 다시 돌아갈 곳은 공교육’이라고 결론 내렸다. 소득문제 때문에 말리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건 문제가 안됐다”고 말했다. 


# 20년 가까이 ‘같은 길’ 앞으로는 ‘각자의 길’

이 이사와 이 실장. 두 사람은 단순히 고교 교사에서 사교육업체 강사가 된 것을 넘어, 함께 참고서를 저술했고 학원을 운영하고 강의 노하우를 공유하는 등 ‘협업’ 해왔다.

하지만 이 실장은 입학사정관이 돼 공교육으로 돌아갔고 이 이사는 사교육에 남았다. 이 이사는 “내가 학교로 돌아갈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두 사람의 미래가 이젠 다른 형태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이사는 “오라는 곳이 없어서 못 가”라며 농담으로 운을 뗐다. “난 지금도 공교육을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유웨이중앙교육은 학원이 아니라 입시기관이고 순수한 평가기관이죠. 난 유웨이를 ‘민간 평가기관’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진로진학적성 전문가로 인생의 3막을 시작하고자 한다. 최근 EBS 라디오 강의 프로그램 출연을 제외하고는 모든 국어ㆍ언어 강의에서 은퇴했다. 공부도 시작했다.

이 이사는 “이제 성적만으로 결론짓던 단순한 입시시대는 끝났다”며 “아이의 적성, 진로를 고려한 육아가 필요하고 이를 바탕으로 진학상담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이 실장이 펼쳐갈 인생 3막은 일단 학교현장에서 끝까지 봉사하는 것. 은퇴 후에는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학업을 이어가기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가정형편이 어려운 대학생 3명에게 지정기부를 하고 있다.

“돈이 없어 공부를 할 수 없는 저소득층 학생 등 후학을 위해 도움을 주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나도 촌놈이었고, 공부할 때 어려움이 많았거든요.”



박수진 기자/sjp10@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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