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통해 삶의 지혜 추적
오직 ‘어떻게 살것인가’질문
‘죽음을 걱정하지 마라’ 등
20개 인생지침으로 재구성
“그 책은 재미를 찾는 어린아이처럼 읽지 마라. 야심 찬 사람처럼 교훈을 얻으려고 하지도 마라. 그 책은 ‘살기 위해서 읽어라.”
소설가 플로베르는 몽테뉴의 ‘수상록’(essais)을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보여준다. 르네상스시대 마지막 인물 몽테뉴는 일반적인 글쓰기인 자신의 위대한 행적이나 업적을 기록하기 위해서 글을 쓰지 않았다. 그가 주목한 것은 일상의 문제였다. 우정에 대하여, 식인종에 대하여, 옷을 입는 습관에 대하여, 또 같은 일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까닭과 냄새, 잔인함, 심지어 엄지손가락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적어나갔다. 자신이 창안해낸 새로운 글쓰기인 ‘에세’ 서문에서 그는 극히 개인적인 목적으로 썼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바로 이런 전인격의 기록이란 측면에서 ‘에세’는 읽는 이들에게 거울 같은 역할을 한다. 앙드레 지드는 “그에게 완전히 빠져들어 그가 바로 나 자신인 것 같다”고 했으며, 랠프 월도 에머슨이 “전생에 내가 그 책을 직접 쓴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한 것도 이런 이유다.
몽테뉴의 사소한 물음들은 결국 하나의 물음, ‘어떻게 살 것인가’로 수렴된다. 어떻게 해야 잘살 수 있는지, 즉 올바른 삶 또는 명예로운 삶뿐 아니라 완전히 인간적이고 만족스럽고 풍요로운 삶이 어떤 것인지 몽테뉴는 알고 싶어했고 이 물음의 해답을 찾기 위해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저자 사라 베이크웰은 이 점에서 몽테뉴와 ‘에세’를 새롭게 읽을 필요성을 인식한 듯하다. 가치관과 환경이 급격히 변화하는 시대에 몽테뉴를 보다 면밀하게 살펴, 거기에서 20개의 테마를 뽑아 제시했다.
1장 ‘죽음을 걱정하지 말라’에서부터 ‘사랑과 상실을 이겨내라’ ‘즐겁게 어울리고 더불어 살라’ ‘인간성을 지켜라’, 마지막 20장 ‘인생 그 자체가 해답이 되게 하라’에 이르기까지 각 장은 마치 처세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몽테뉴의 실제 삶과 ‘에세’를 관통하며 인생의 지침들을 재구성한다.
첫장 ‘죽음을 걱정하지 말라’의 경우, 저자는 젊은 시절 몽테뉴의 삶에서 죽음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먼저 살핀다. 친한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과 아버지의 죽음, 동생의 죽음에 이어 결혼 후 두 살밖에 안된 첫 아이를 잃고 그 이후로 네 자녀를 잃는 등 죽음의 강박은 그에게 늘 따라붙어다녔다.
심지어 그는 사냥에 나섰다가 낙마하는 바람에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사고를 당한다. 그가 도달한 죽음은 논리적인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그냥 강물이 흘러가듯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 모르더라도 걱정하지 마라. 자연이 그 일을 완벽하게 처리할 테니 당신의 머리를 미리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채우지 마라.”
몽테뉴는 펜을 들었을 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간결하게 적어 내려가면서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주치게 되는 사물과 정신 상태를 포착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묘사했다. 그는 이런 경험들을 토대로 자신에게 질문들을 던졌다. 그 질문은 한 마디로‘ 어떻게 살 것인가’로 요약된다. |
몽테뉴가 살았던 16세기는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이 점점 쇠하고 종교 개혁이 일어난 시기였으며,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의 극렬한 전쟁으로 일관한 시기였다. 몽테뉴는 그리스도교가 극단적인 폭력사태를 주도해 파괴와 고통을 초래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이상한 일이라고 개탄했다.
그는 적개심으로 이글거리는 눈을 가진 열성적인 크리스천의 모습보다 도덕적으로 행동하고 감정을 절제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어떻게 살 것인지 잘 아는 스토아주의 현인의 모습을 그리며 명상에 잠기는 것을 좋아했다.
몽테뉴는 당대인들에게 곤경에 빠져 허우적 거린다고 생각하지 말고 다른 각도 또는 다른 척도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하라는 고대 스토아 철학의 교훈을 상기시키려 했다. 점성가들이 지금 “엄청난 변혁과 변화가 임박했다”고 경고하지만 이들은 아무리 나쁜 일이 있어도 인생은 거의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고 계속된다는 단순한 사실을 잊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가볍게 한 마디 덧붙였다.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책을 통해 만나는 건 몽테뉴의 자화상이지만 500년을 뛰어넘어 현재성이 느껴진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