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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수만 먹던 CEO, 매출이?
“죽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다친 손을 보니 오히려 오기가 생기더군요. 치료 후 금형기술부로 복직하면서 본격적으로 일을 배웠습니다. 1년간 청소, 1년간 조수 일을 하고 바로 조장이 될 만큼 빠른 기술습득이었죠. 어려서부터 눈썰미, 손재주 하나는 마을에서 제일이었거든요. 청소 생활할 때부터 어깨너머로 유심히 공정을 관찰한 것이 비결이었습니다.”

58번째 ‘이달의 기능한국인’으로 선정된 곽현근(51) 대경테크노 대표는 금형 기능인으로서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 짧은 가방끈이 장해물이 되지 않았다. 장인정신으로 끈기를 가지고 도전하고 매진하면 누구든 기능인으로 성공할 수 있다.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 같은 근성만 있으면 된다”며 자신을 172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 대표로 이끈 이야기를 조근조근 전했다.

1960년 충남 천안에서 9남매 중 다섯 번째로 태어난 곽대표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가족 생계를 위해 당시 최고의 공업 도시였던 구미로 무작정 내려갔다. 그 곳에서 도금공장, 건설현장의 막노동, 직물공장 등 온갖 어려운 일을 가리지 않고 했지만 그의 생활은 나아진 것이 없었다. 6개월 동안 꼬박 세끼를 국수로 해결해야하는 생활도 힘들었다.

그러던 중 그는 오성사(현 오성전자)에 입사했고 프레스 사업부 생산직으로 근무하게 되면서 드디어 기술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일자리에 대한 안도와 함께 못다한 공부를 해가며 기술인으로 성공하겠다는 꿈도 가질 수 있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미래에 대한 부푼 희망도 잠시 뿐이었다. 그는 야간작업 중 손을 다치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좌절하지 않고 기술로 승부를 보겠다는 강한 신념으로 오성사 공장장을 직접 찾아가 기술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전달함으로써 공장장을 감명시켰고, 금형기술부로 복직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시점부터 곽 대표는 본격적인 기능인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다친 손으로 정교한 금형작업을 해야 했으므로 남들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손에 박히는 굳은살과 비례해 실력은 쌓여갔고 그 재미에 결근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금형실에서 실력이 무르익어가며 여유를 찾아가자 잊고 있던 학업에 대한 아쉬움이 되살아났다. 늦은 나이였지만 곽 대표는 국립구미전자공업고등학교 전자과(야간)에 입학하며 주경야독의 생활을 시작했다. 매일 오후 5시30분까지 근무를 마치고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진행되는 학교수업을 일과 병행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지만 그는 무엇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힘겨웠던 생활은 이후 전자부품 금형 사업에 큰 도움이 되어 보답했다.

1983년 곽 대표는 정들었던 오성사를 나와 (주)한국대화금속으로 이직하게 된다. 한일합작법인이었던 (주)한국대화금속이 금형사업부를 확장하면서 우수한 기술자를 찾고 있었고 곽 대표 또한 대우가 좋은 곳에서 새로운 기술 영역을 개척하고 싶었다. 프레스 금형 기술직으로 입사한 지 한 달 만에 금형 기술력과 사무적 소양을 인정받은 그는 기술 영업부서로 이동하게 되면서 기능인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7년여 동안 현장에서 쌓아온 기술을 밑거름으로 새롭게 시작한 기술 영업은 그에게 기술에 대한 폭넓은 시야를 갖게 해줬다. 관련 분야 기술 정보를 빠르게 습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전체적인 기술 동향 등을 파악할 수 있어 기술 전반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계기가 됐다.

그렇게 17년간 젊음과 열정을 다 바쳐 금형 분야에서 인정받는 기능인이 된 곽 대표. 하지만 또 다른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외환위기로 인해 (주)한국대화금속은 사업부를 축소해야 했고 곽 대표는 후배들을 위해 그 동안 자신을 크게 성장시켰던 회사를 떠나 인생 2막을 열어가게 된다.

IMF 여파가 이어지던 1999년 (주)대경테크노의 시작은 미비했다. 퇴직금과 모아둔 전 재산을 털어 60평 규모의 작은 공장과 범용 프레스 기계 5대를 마련했다. 곽 대표와 아내, 직원 1명이 주문받은 부품을 밤 새워가며 열심히 만들었다. 주로 수주 받아 생산한 제품은 휴대폰 부품이었다. 다행히도 24년간 쌓은 기술력과 노하우, 성실성이 빛을 발하면서 사업은 조금씩 성장했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2004년부터는 언젠가 기회가 오리라는 믿음으로 정밀가공 분야에도 지속적인 투자를 하며 경쟁사와의 차별화를 추구했다.

이러한 믿음은 지난 2009년,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된다. 기술력을 바탕으로한 높은 품질과 경쟁력 있는 제조 단가, 안정적인 생산 가능성을 인정받아 휴대폰 부품을 주로 생산하는 회사에서 자동차 ABS 등의 필수 구성요소인 개방형 톤휠(Tone Wheel)을 수주하게 된 것이다.

이 때부터 (주)대경테크노는 급성장했고 현재 연매출 172억원에 종업원수 47명, 현대기아자동차 협력업체와 자동차 부품 글로벌회사인 타이코 일렉트로닉스에 납품하고 있는 강소기업으로 성장했다.

금형 분야에서 한 우물만 파면서 ‘지칠줄 모르는 의지력’과 ‘기술을 향한 집념’이 드디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올해는 사출성형 확대로 어셈블리 제품의 원스톱 양산 체제를 구축하며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회사 경영으로 바쁜 가운데에도 곽 대표는 44세의 만학도로 구미1대학 자동차학과에 입학해 못 다한 학업에 대한 열정을 쏟아 부었다. 현재 금오공과대학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는 그는 늦깎이 학생이지만 장학금을 2번이나 받았을 정도로 재미있게 공부하고 있다며 쑥스러워했다.

이 같이 학업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곽현근 대표는 어려운 환경으로 꿈을 접는 젊은이들이 안타까워 장학 활동을 지원해오고 있다. 그는 “내가 어렵게 공부해서 그런지 어려운 환경 속에 있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제 장학 활동으로 도움을 받은 학생이 훗날 성공해 비슷한 처지의 후학을 돕는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깊은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현재 금오공대, 구미1대학, 구미고등학교, 구미전자공고, 선주고등학교, 목천중학교에 지속적으로 장학금을 기탁하고 있다.

그의 최종 목표는 이공계 출신을 지원하는 ‘곽현근 장학재단’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공계를 지원하는 장학재단을 통해 기능, 기술에 대한 홍보도 하고 많은 인재들이 이공계로 진출함으로써 이공계 기능인 양성화에 일조하고 싶다는 것. 실제로 대경테크노는 기업부설연구소, 벤처기업, 기술혁신형 중소기업, 부품소재 전문기업 인증을 획득했고 현재 금오공대, 경북대학교, 구미1대학, 구미전자공고와 산학협력 협약을 체결하여 기술개발, 인재양성, 고용창출 등의 성과를 내고 있다.

곽 대표는 “우수한 인재들이 기능인력, 이공계로 진출해야 우리 제조업이 강해진다. 제조업이 강해야 위기에 흔들리지 않는 경제를 만들 수 있다. 미력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하겠다”는 이야기로 보람찬 인생 3막을 예고했다.

<박도제 기자 @bullmoth>
pdj24@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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