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어느 날. 서울에서 주유소를 경영하는 이영건(사진ㆍ53) 씨는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유라시아 횡단길에 올랐다. 출발 전 그는 두 장의 각서를 썼다. 하나는 ‘사막에서 죽더라도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 다른 하나는 무사히 돌아오면 심장병 어린이 한명을 후원하겠다는 각서였다. 두 번째 각서는 고질적인 피부병으로 진료를 받던 담당 의사의 제안이었다. 사막에서 열과 땀이 나면 피부병이 악화된다며 횡단을 말리던 의사는 이 씨가 고집을 꺾지 않자 그런 제안을 하게 된 것. 이 씨는 “내가 살아 돌아오면 한 아이가 산다”는 마음으로 모래사막을 향해 달렸다.
17명이 함께 출발했다. 그런데 8명이 어깨나 갈비뼈가 부러져 중도 포기했다. 사막을 통과할 때는 48도의 온도에서 사투를 벌였다. 다년간의 운동으로 건강을 지켜온 그였지만 바람이 불면 60도까지 올라가는 사막의 온도를 견디긴 쉽지 않았다. 괴로워서 땅에 주저 앉았다. 그때 이 씨의 머릿속에 두 번째 각서가 떠올랐다.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심장병을 앓고 있는 작은 생명,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아이가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내가 살아야 그 아이가 산다.”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사막을 빠져나오는 데 3일이 걸렸다. 3일 동안 몸무게는 10㎏이 빠져있었다.
그렇게 나머지 일정까지 마치고 두 달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곧바로 서울대 어린이병원후원회에 전화를 했다. “아이 한 명 살리는데 얼마입니까”라고 물었다. 1000만원이었다. 바로 입금을 했다. 심장병을 앓고 있는, 태어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신생아가 수혜자가 됐다. 그가 유라시아 사막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던 그때 세상에 태어난 아이였다. 이 씨의 사무실 한편에는 아이의 백일 사진이 놓여있다. 사진 옆에는 “우리 수영이(가명)가 100일을 맞이했습니다. 새 생명을 선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는 편지가 놓여있다. 이 씨는 “목표가 좌절될 때마다 수영이를 보면서 힘을 얻는다. 수영이를 계기로 기부를 통해 이제까지 3명의 심장병 어린이를 살렸다. 이 아이가 날 기부 중독자로 만들었다”며 웃어보였다.
사실 이 씨의 첫 기부는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유소를 운영하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 씨는 당시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우며 유조차량 운전수로 일했다. 어느 겨울, 서울 남산에 위치한 한 고아원에 기름을 배달하기 위해 방문한 그의 눈에 부모 없이 홀로 지내고 있는 아이들이 들어왔다. 며칠 뒤 가로 30㎝ 세로 50㎝크기의 상자에 돼지고기를 가득 담아 몰래 고아원에 가져다 주었다. 이후 3~4년 동안 명절이 되면 아이들을 위해 몰래 돼지고기를 기부했다. 이 씨는 현재 해당 고아원의 후원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돼지고기를 몰래 가져다 놓던 23살의 청년이 30년간 꾸준이 아이들을 후원해오며 이젠 후원회장으로 아이들을 보듬고 있다. 이 씨는 “1년에 두 번씩 영화관도 가고 눈썰매장도 가고 그런다. 아이들을 돕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눈썰매 탄 후 같이 어묵을 먹고, 영화 보면서 팝콘 먹고 이야기도 하는 등 내 아들 딸을 대하는 것 같은 따뜻한 마음이 우선”이라며 “대기업들이 연말연시되면 많은 후원을 하는데 진정 이 아이들을 위한 후원은 내 자식을 대하는 듯한 세심한 마음이다. 고아원의 57명 아이들은 모두 내가 가슴으로 낳은 아이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이제껏 총 49차례에 걸쳐 2200만원을 기부했다. 서울대병원을 통해 심장병 어린이를 살리는 데도 앞장서고 있으며 아동보육시설 후원회장으로도 봉사를 이어가고 있다. 매년 기부금으로만 수천만원을 쓰고 있는 셈이다. 주유소를 운영하고 최근에는 에너지경영전략연구원을 세워 석유 유통과 관련한 연구에도 힘을 쏟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지만 그는 앞으로도 기부를 계속해 나갈 생각이다.
이 씨는 “유복하게 자랐다. 그런데 재물이 아무리 많아도 누구나 불안한 삶을 산다. 그런데 기부를 하면 나로 인해 한 생명이 숨을 쉬고 살아간다는 생각에 그 불안함이 안정감으로 돌아온다. 그 느낌이 참 묘한데 멈출 수가 없다. 중독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60살 이후엔 이동목욕차를 운전하며 전국 방방곳곳에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며 살 계획이다. 이 씨는 “1t 트럭을 한 대 구입해 목욕 시설을 만들어 산간벽지나 불우 이웃을 찾아다니며 목욕을 시켜주고 싶다. 지방의 일부 소외된 지역에는 목욕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며 “그렇게 방랑객처럼 전국을 누비며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싶다”고 의지를 밝혔다.
박수진 기자/sjp10@heraldcorp.com
[사진 설명=돈을 버는 것보다 돈을 ‘잘 쓰는’ 궁리를 하고 있는 기부 중독자 이영건 씨. 그는 "심장병을 앓던 한 아이와의 기부약속이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유라시아 횡단길에 오른 나를 살렸다"고 말했다. 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