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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펑리위안, 중국의 브루니 될까
시진핑 차기 주석의 아내 가수출신 

‘스타급 예비 퍼스트레이디’로 대중적 인기


WHO 친선대사 등 세계무대 활약 기대

왕예핑·류융칭 등 전현직 영부인 은둔의 삶과는 대조적




지난달 29일 중국 공산당 창당 90주년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우리의 기치(旗幟)’라는 경축 문화예술 행사에서 군복을 입은 한 중년의 여성이 무대에 올라 혁명가요인 ‘기치송(旗幟頌)’을 열창했다.

공연이 끝나고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비롯한 중국 최고지도부 9명이 무대에 올라와 공연단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을 때 이 여성은 후 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사이에서 포즈를 취했다. 중국 권력 서열 1위와 3위 인물 사이에 선 그녀는 바로 차기 퍼스트레이디인 펑리위안(彭麗媛ㆍ49)이었다.

차기 주석으로 내정된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의 아내인 그는 총정치부 가무단 예술 책임자로서 이 공연을 총지휘했다.  

시진핑의 아내 펑리위안

차기 퍼스트레이디가 현 최고지도자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것, 정치인 남편과 가수 아내가 한 무대에 올랐다는 점은 중국 정가에서 상상하기 힘든 이색적인 풍경이다.

장쩌민 전 주석의 아내 왕예핑(王冶坪ㆍ83) 여사나 후진타오 현 주석의 아내 류융칭(劉永淸ㆍ71) 여사의 경우 그림자 내조를 뛰어넘어 존재감마저 희박한 퍼스트레이디였다. 대중의 기억 속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물론이고 얼굴 생김새조차 가물가물할 정도다.

하지만 차기 퍼스트레이디인 펑리위안은 정식 권좌에 오르기도 전에 이 틀을 깨부수고 있다. 중국의 퍼스트레이디도 미국의 미셸 오바마나 프랑스의 카를라 부르니와 같은 스타급 퍼스트레이디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이유다.

▶펑리위안=펑리위안은 산둥(山東)성 출신으로 산둥예술학원을 졸업한 뒤 18세 때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소속 가무단 단원으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1982년 CCTV의 대표 프로그램인 춘완에서 ‘희망의 들판 위에서’라는 노래를 불러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됐다.

그가 시 부주석과 만난 것은 이미 가수로서 이름을 알린 후인 1986년이다. 친구 소개로 당시 푸젠 성 샤먼 시 부시장이었던 시진핑과의 첫 만남은 너무 진지한 시 부주석 때문에 썰렁했지만 그 진지함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것으로 알려진다. 두 사람은 이듬해 9월 샤먼에서 정식 부부가 됐다.

현역 인민해방군 소장, 총정치부 가무단 예술책임자, 정협 위원으로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치고 있는 펑리위안에게 카메라는 매우 익숙한 존재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남편과 딸에 대해 언급하는 등 아내와 어머니로서 친근감을 어필하는 여유를 부리기도 한다.

한 관영잡지에서 그는 “집에서 시진핑을 한 가정의 평범한 가장으로만 인식할 뿐 국가지도자라는 사실을 잊고 지낸다. 남편도 나를 스타로 대우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2008년 쓰촨 대지진 위문공연 때는 “16세짜리 딸 시밍쩌(習明澤)가 자원봉사활동을 자처한데다 힘든 내색도 전혀 하지 않아 자랑스러웠다”고 말해 박수 갈채를 받았다.

그의 이 같은 행보는 ‘인민에게 다가서는 퍼스트레이디’라는 인식을 심어주면서 호응을 얻고 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런민르바오 자매지인 환추런우 최신호는 펑리위안을 커버스토리로 썼다. ‘펑리위안의 새로운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이야기를 무려 14쪽에 걸쳐 상세히 다뤘다. 이는 지난 6월 펑리위안이 세계보건기구(WHO) 결핵 및 에이즈 친선대사로 임명됐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최고지도부의 아내가 국제기구에서 활동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가수 출신 퍼스트레이디’도 흥미로운데 해외에서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퍼스트레이디가 난 것이다. 

WHO 친선대사는 세계 각국에 에이즈와 결핵 예방을 촉구하는 임무를 띤 자리여서 앞으로 국제무대에서 그에 대한 스포트라이트는 더 강해질 전망이다.

▶류융칭(劉永淸)=후진타오 현 국가주석의 부인 류융칭 여사는 1940년생으로 후 주석보다 두 살 연상이다. 두 사람은 칭화(淸華)대 수리공정학과 59학번 동기동창생이다. 대학시절 춤과 노래 등 예능에 능했던 후 주석과 여성스럽고 귀여운 용모의 류 여사는 학교에서도 유명한 캠퍼스 커플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후 주석이 대학 졸업 후 간쑤(甘肅)ㆍ구이저우(貴州)성 등 오지로 발령이 났을 때 베이징에 있는 좋은 보직을 포기하고 남편을 따라 시골로 내려간 점에서 전통적인 여성상이 느껴진다. 하지만 젊은 시절 공청단 산하의 중국청년여행사 부사장, 베이징 시 도농규획위원회 부주임 등 사회활동도 꾸준히 했다.

후 주석이 국가 최고지도자에 오른 후 공식 활동이 거의 없어 류 여사에 대한 평가는 전무후무하다. 다만 가끔 해외 방문길에 따라 나설 때 카메라에 비춰진 모습을 두고 “온화하고 부드러워 보인다”는 인상이 전해질 뿐이다.

하지난 2010년 서울에서 열린 G20 때 컴퓨터 마니아로 알려져 화제가 된 바 있다. 6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외출할 때 꼭 노트북컴퓨터를 챙기고, 해외에 나갈 때는 노트북 2대를 들고 다니며 사회 각 분야의 뉴스를 체크한다고 한다. 후 주석이 그를 ‘나의 대리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왕예핑=상하이 출신인 왕 여사는 장쩌민 전 주석의 여섯째 외숙모의 조카딸이다. 조부는 상하이의 성공한 기업가이자 골동품 수집상이었고, 부친은 공예품 공장을 운영해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어린시절을 보냈다. 상하이 외국어대를 졸업한 재원이기도 하다.

1949년 12월 장 전 주석과 결혼 후 창춘(長春)자동차공장 비서, 상하이 전기과학연구소 주임 등을 역임했다.

장 전 주석은 사교적이고 활발한 성향인 반면, 왕 여사는 조용한 성격이다. 또 그의 소탈한 외모 때문에 벌어진 일화는 유명하다.

장 전 주석이 상하이 시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왕 여사가 손자를 유모차에 태우고 시 정부청사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문전박대 당했다. 청사 수위는 그의 차림새를 보고 가정부 정도쯤으로 본 것. 수위는 왕 여사에게 처음에는 못 들어간다는 식으로 하다가 나중에는 정 들어가고 싶으면 방문일지를 쓰라고 했다. 그는 심지어 “글씨는 쓸 줄 아느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나중에 그를 알아본 다른 직원이 이 상황을 보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는 일화다.

한희라 기자/hanira@heraldcorp.com




中 최초의 퍼스트레이디는

여황제 꿈꾼 마오의 여인 ‘장칭’

문화혁명 주도 파란만장한 삶 옥중 자살로 마감


1991년 베이징에서 마오쩌둥(毛澤東ㆍ1893~1876) 전 주석의 미망인 장칭(江靑)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77세였다.

퍼스트레이디라 부를 만한 여유도 없었던 변혁기의 중국에서 그는 퍼스트레이디 그 이상을 꿈꾼 정치적 야망이 강한 여인이었다.

1914년 산둥(山東)성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장칭은 1933년 공산당에 입당, 좌익혁명운동을 하다 34년에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듬해 석방된 후 상하이에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으며 인기 여배우로 주목받았다.


1937년 공산당의 근거지였던 옌안(延安)에서 혁명에 투신하면서 마오쩌둥을 만나게 된다. 노래와 연극 등 예능에 능하고 적극적인 활동가였던 그는 마오쩌둥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38년 45세의 마오쩌둥은 21살이나 적은 장칭과 결혼했다.

당시 공산당 지도부는 장칭과의 결혼을 탐탁지 않게 여겨 결혼 후 장칭이 아내로서의 역할 외에 정치활동과 당 직책을 맡지 않는다는 조건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두 사람 모두 네 번째 결혼이었다. 마오는 14세 때 정략결혼했던 네 살 연상의 뤄(羅) 씨와 사별했고, 연애결혼한 신세대 여성 양카이후이(楊開慧)와도 사별했다. 혁명동지이자 아내였던 허쯔전(賀子珍)은 소련에 머물기를 고집하면서 둘의 결혼생활은 지속되지 못했다.   

장칭이 퍼스트레이디로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62년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 해 9월 인도네시아의 영부인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영접한 사진이 처음으로 공개되면서다.

장칭은 1966년부터 10년간 진행된 문화대혁명에서 건강이 악화된 마오쩌둥을 대신해 군과 홍위병을 장악, 본격적으로 정치적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장칭은 왕훙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등과 함께 사인방(四人幇)을 결성해 문화대혁명을 주도했으며 스스로를 여황제 측천무후에 비유할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장칭은 당시 “마오 주석을 대신해 내가 당신들을 만나러 왔다”는 말을 자주 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를 들은 마오는 “나는 내가 대신한다. 장칭은 자신을 대신해야 할 것”이라며 직접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고 한다.

덩샤오핑이 복권되면서 체포된 뒤 1981년 사형선고, 집행유예 2년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77세에 옥중에서 자살했다.

신중국 성립 후 첫 퍼스트레이디였던 장칭은 남편인 마오쩌둥에게는 정치적 짐이 됐고, 국민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한희라 기자/hanir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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