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생활 39년째인 소설가 박범신(67)이 39번째 소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문예중앙)를 내면서 밝힌 포부가 마치 갓 등단한 20대 청년 같다. 끊임없이 자기 갱신을 해온 작가의 또 다른 펄떡임이다.
살인이라는 불편한 소재를 ‘어느 날 손바닥에 말굽이 생긴 사나이’를 내세워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꿰어나간 작가는 추악하고 구조화된 폭력적 현실을 존재론적 밑바닥까지 훑어낸다.
작가는 뜨겁고 팽팽하고 가혹하고 생생한 날것의 현실과 고요와 서늘함, 맑고 깊은 초월적인 것, 두 실을 한줄로 꼬아 무늬를 만들어 나간다.
나는 개장수의 아들이다. 특수부대 장교들이 몰려와 개를 패며 폭력의 본능을 풀고 먹는 게 나의 집이다. 나는 그런 집이 불타 없어졌으면 싶다. 다만 이웃집 맹인의 딸 여린으로 인해 살아갈 힘을 얻는다. 여린과 사귄다며 맹인에게 얻어터진 날, 맹인의 집에 불이 난다. 부나비처럼 불에 뛰어들어 소녀와 아버지를 구하지만 방화범으로 몰려 4년 감옥살이 끝에 노숙자로 떠돈다. 그러다 다시 돌아오게 된 곳은 살던 곳. 그곳엔 원룸 건물 샹그리라가 들어서 있다. 그곳엔 꿈에도 잊지 못할, 여린이 맹인 안마사로 있다. 눈가 보랏빛 점을 보는 순간, 나는 심연에서 하나하나 기억들을 끄집어올린다.
소설의 공간은 두 축으로 이뤄진다. 원룸의 주인, 이사장이 현실적으로 생활하는 샹그리라와 그가 운영하고 교주 격으로 있는 절, 안명진사다. 사람들의 눈을 밝혀주고 병을 치유해준다는 곳이다. 이사장의 몸은 검투사처럼 잘 발달된 근육으로 다져져 있다. 어느 순간 나는 문득 이사장의 눈빛이 낯익다고 느낀다. 섬광처럼 어린시절, 개끈을 놓아줬다고 나를 개 패듯 팼던 특수장교의 눈빛과 겹쳐진다. 그리고 나의 손바닥 말굽이 꿈틀거린다. 살인본능이다. 어느 날 손바닥에 생겨난 말굽은 사람을 처리할 때마다 손금을 먹으며 더 단단해지고 대신 손은 작아진다.
작가는 소설공간과 인물들을 아이러니로 엮어간다. 이사장의 건강한 몸은 자본주의의 번지르르한 얼굴을, 진짜 주름투성이 얼굴은 생리적 존재의 모습이다. 샹그리라나 안명진사 역시 말이 담고 있는 낙원이나 개안과는 먼 죽음과 폭력의 장소일 뿐이다. 말굽 사나이인 나는 살인자지만 어떤 슬픔, 알 수 없는 근원적 슬픔에 자주 눈물을 흘린다. 관음보살로 불리는 해맑은 애기보살과 해사한 여인 여린은 구원의 순수성을 표방하지만 실은 이사장의 성놀잇감일 뿐이다. 더 결정적 아이러니는 손에 박인 말굽이다. 발이 곧 손이란 얘기다. 손이 인간의 역사를 바꾼 생산, 도구와 연결돼 발전을 의미한다면, 발은 원초적이고 존재와 닿아있다.
작가가 “자본주의의 폭력을 탄생 이전의 슬픔에 비끌어 매는 건 내 나이가 시킨 짓”이라고 한 말은 이런 뜻으로 읽힌다. 그 나이에만 볼 수 있는 것, 그건 아이러니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여린의 존재는 전작 ‘은교’와 겹쳐진다. 작가는 “쓰다보니 어느새 은교의 구조가 들어와 있더라. 여린은 은교 같은 것이다. 진선미를 갖춘 영원한 가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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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들이 차갑고 서늘하며 때로는 구역질나게 만들지만 피가 낭자한 하드코어와 다른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오는 7월 말로 명지대에서 정년퇴임하는 작가는 고향인 논산에 내려가 소설을 쓰겠다고 밝혔다.“소설 한 권 쓴 것 같은 느낌으로 지나간 것 같다”는 그는 “머릿속에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다. 질주를 멈출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