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10㎝와의 전투’ 박신한 단장
6·25 격전지 누비며 6년째 유해발굴 진두지휘…마지막 한 구의 유해까지 ‘가족 품’으로…
현장에서 돌아서면 10㎝만 더 깊게 팠었다면

10㎝만 더 옆으로 팠었다면

답이 나올 텐데 하는 아쉬움

땅굴 21만여개 파낸 덕(?)에 지금까지 총 6226구 발견했지만 

정보 부족으로 유가족 품으로 돌아간 건 단 64구에 불과


60여년간 기다리다 끝내 눈 감으신 109세 할머니 

외아들 유해 못 찾아드려 죄송

왜 이런 일 하냐고? 

호국의 얼 거둔다는 자긍심 있지만 한편으론 

국가가 국민에게 진 빚 내가 대신 나서서 갚는 것 뿐…





“남들은 다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라고 해요. 하지만 의지와 과학이 있다면 왜 못 찾겠어요? 하물며 바늘 같은 하찮은 게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한 선열들의 유해인데….”

지난 6년여간, ‘총’ 대신 ‘삽과 솔’을 들고 전선을 누빈 사람이 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박신한(54ㆍ육군 대령) 단장이 그 주인공. 때로는 주먹밥을 싸들고 산을 넘으며, 때로는 점점 줄어 들어가는 6ㆍ25 전사자들의 유가족을 찾아 마을 구석구석을 찾아간다. 때로는 전투가 어디서 벌어졌다는 사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 무작정 헤매고 다닌다. 6월 25일 한국전쟁 기념일을 1주일여 앞둔 지난 17일, 대동여지도를 그려도 몇십 번은 완성했을 것 같다는 그를 만났다.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학군 18기 보병특기로 임관한 박 대령. 그는 2005년 말 육군본부 전사자 유해발굴과장을 거치며 처음으로 ‘유해발굴’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그는 2007년 창설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초대 단장에 임명돼 유해발굴단을 조직하고 절차와 과정을 만들어가는 데 주력했다. 2~3년마다 보직을 옮기는 다른 장교들과는 달리 무려 6년 동안이나 한자리에서 꾸준히 업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박 단장은 “유해발굴사업은 대한민국이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하고 있는 작업입니다. 아직은 새로 창설돼 궤도를 잡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전문성이 크게 요구된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고 운을 뗐다. 그는 특히 “보병특기이지만 당시의 전투기법이나 전사(戰史)연구 등을 주로 해왔기 때문에 이 분야에 익숙합니다. 발굴을 하며 책상 위에서 배웠던 당시의 전투기법, 전쟁터의 위치 등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나가다 보면 생생한 당시의 현장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고 말했다.

박 단장은 지난 2007년, 유해발굴감식단이 만들어진 이래 올해까지 5년을 ‘1기(창설기)’라고 표현한다. 그는 “올해 말까지 GIS(지리정보시스템)에 근거해 전국 기초조사지도를 만들고 있습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바늘을 찾을 백사장을 좁히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이 작업까지 완료되면 정말 1기 사업이 완료되는 것입니다”고 설명했다.

                                                                                                 [이상섭 기자/bobtong@heraldcorp.com]

현재 유해발굴감식단은 금속탐지기 등으로 예정지를 살피며 유해가 묻혀 있을 가능성을 점친다. 현장에서 태블릿PC로 입력된 자료들은 중앙 서버에 모여 기초조사지도로 만들어진다. 이후 발굴단은 이 지도를 참조해가며 가능성이 높은 곳을 우선적으로 발굴하게 되는 것이다. 

2기(발전기)에는 유가족들의 DNA 자료, 당시 기억에 따른 격전지 증언 등 자료를 모으는 것이 큰 숙제로 남는다. 특히 6ㆍ25 전쟁이 발발한 지 60년이 넘게 흐르면서 당대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 줄어드는 것이 큰 문제다. 박 단장은 이를 ‘시간과의 싸움’이라 표현했다.

“시간은 계속 흐르면서 우리를 방해합니다. 유가족분들이 사라지면 발굴한 유해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고, 당시를 기억하는 분들이 사라지면 어디서 격전이 있었는지를 알 수 없게 됩니다. 특히, 지난해부터 만들어 운영 중인 ‘전사자 종합정보체계’를 통해 컴퓨터로 그동안 모은 자료를 매칭해 신원을 확인하고 있지만, 아직 13만 실종자의 10% 선(1만5000~1만6000여명)밖에 안 되는 DNA 자료만으로는 신원 확인이 어렵습니다. 앞으로 4만~5만여명의 유가족으로부터 DNA를 채취할 경우 더 많은 유해의 신원을 확인해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낼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고 박 단장은 말했다.

박 단장과 유해발굴단원들의 전장은 바로 발굴 현장. 주로 산 위에 있는 격전지를 찾아 두시간씩 산을 올라간다. ‘밥차’를 끌고 가거나 밥을 먹으러 나오기도 어려운 두메산골. 그래서 단원들은 미리 주먹밥을 싸거나 전투식량을 들고 산으로 올라간다.

“산을 왔다 갔다 하는 데만 4시간은 걸려요. 그러면 정작 현장에서 오래 있을 수 없으니까 최대한 파보고 있는 거죠. 주로 6ㆍ25 때 파놓은 전투개인호나 참호 위주로 팝니다. 그러다 보면 돌아올 때 항상 아쉬움이 남아요. ‘10㎝만 더 깊게 파면 답이 나올 텐데, 10㎝만 옆을 더 파도 나올 것 같은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 보면 일 양이 늘어나지만 오는 시간 가는 시간 생각하면 살짝 파다가 갈 수는 없는 거죠.”

이들의 ‘전투’는 주로 시간과의 싸움. 1년 중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땅이 녹은 3월부터 11월 정도까지. 12~2월 결빙기 동안은 땅을 팔 수 없어 작업을 멈춘다. 한번 포인트 잡아서 발굴을 하면 평균 150개의 굴을 파내려가야 한 개 정도의 유해를 발굴할 정도로 고된 노동이 뒤따른다. 지난 2010년. 그들이 발굴한 유해는 총 1443구. 대략 땅굴 21만개를 파내려가 얻은 ‘소득’이다. 이러다 보니 편한 잠자리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동가식 서가숙(東家食 西家宿)’해가며 발굴하고 유해를 정리하는 이들의 원동력은 어디서 나올까?

“어머님들을 보면 말이죠. 이웃에서 바가지를 빌려도 깨끗이 씻어서, 뭐라도 담아서 돌려줍니다. 고맙다는 표현이죠. 우리나라는 국민들로부터 바가지보다 천 배는 소중한 자식들을 빌렸습니다. 그런데 유해마저 돌려주지 않는다면 뭐가 되겠습니까? 또, 만약의 사태가 난다면 무슨 염치로 ‘당신의 아드님을 또 빌려주십시오’ 할 수 있겠습니까? 다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발굴현장에서 최선을 다해 임하고 있습니다.” 박 단장의 말에 그냥 가슴이 뭉클해질 따름이다.

유해 발굴이 끝나면 다음엔 감식 절차가 따른다. 야전에서의 감식은 크게 우리 군의 유해인지, 적성군의 유해인지를 따지는 일. 아군이나 유엔군의 유해라면 절차를 밟아 현충원에 있는 정밀 감식소로 모셔간다. 적성군의 유해는 현충원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야전감식소에선 피아 식별을 위한 절차에 들어간다. 먼저 유해를 세척한 뒤 피아를 구별할 수 있는 특징 확인에 들어간다. 같이 출토되는 복장, 단추, 전투화, 탄피 등 7~8가지를 고려해 분류작업이 이뤄진다.

아군의 시신으로 확인되면 현충원 정밀 감식소로 모셔가 DNA를 추출한다. 유족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추출된 DNA는 전사자 종합정보체계에 입력돼 기존에 입수된 유가족 DNA와의 자동 매칭 과정을 거친다. 유족이 확인되면 유족에 통보한 뒤 영안작업에 들어가며, 유족이 확인되지 않았을 경우 이를 기록하고 영안작업에 들어간다.

적성군의 유해는 파주에 있는 적군묘지에 들어가 가안장된다. 적군의 시체지만 그들의 품에 돌려줄 것을 전제로 관리하는 것이다. 매년 유엔사령부를 통해 적성군에 일괄적으로 유해를 통보하지만 아직도 유해를 가져가겠다는 응답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한다.

박 단장은 “적군의 유해라고 해서 수습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고 잘라 말했다. 이는 ‘우리도 적군의 시체를 소중히 하는 만큼, 너희도 발굴하게 되면 잘 관리해 달라’는 기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박 단장은 “이 땅에서 6ㆍ25를 정리하기 위해선 땅에 피아를 막론하고 전사자를 남겨둬서는 안 됩니다. 과거 정부나 지금 정부나 모두 국정과제 중에 남북 공동발굴사업을 넣고 매년 예산을 편성하고 있지요”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서로 상대방의 유해를 발굴해 서로의 품에 돌려보내는 것이야말로 화해ㆍ협력의 상징이고 시작이 아닌가 합니다”고 말했다. 

박 단장은 아군의 유해를 최고의 예의와 절차를 통해 안장하는 것은 ‘조국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라 표현한다. 그러나 박 단장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유해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이 과정은 험난하기 그지없다. 지난 2000년 이후 총 6226구(아군 5356구, 적군 870구)의 시신을 발굴했지만, 정작 이 중 유가족 품으로 돌아간 유해는 64구에 불과하다. 100구 중 한 구도 제대로 가족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박 단장은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작업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다.

그는 “업무 맡았을 때 주변에서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는 고사성어를 읖조리더군요. ‘그 오래된 것을 어떻게 찾겠나’는 유족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지금이 딱 맞다’고 주장했습니다. 시대적으로 DNA기술이 발달하고 상용화됐으며, 관련해 유가족들과 시신의 DNA를 자동으로 비교 분석해주는 기술도 생겼습니다”고 말한다.

물론 DNA 비교 분석 기술은 원래 용의자를 20~30명 선으로 압축한 뒤 실시하는 기술이다. 13만개의 유해를 13만명의 유가족과 비교해 매칭하는 기술은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그러나 박 단장은 이 작업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전장(戰場)은 60여년 전 한국전쟁 당시의 격전지다. 한겨울 결빙기를 빼고는 전국을 돌며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부터 양지녘까지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지난해만 21만개의 땅굴을 파냈고 2000년 이후 지금까지 총 6226구의 시신을 발굴했다. 남들은‘ 짬밥’이라며 고개 돌리는 군대밥도 사치인 이들은 전투식량과 주먹밥으로 허기를 떼우며 지금도‘ 시간과의 싸움’을 하고 있다.                                          [김명섭 기자/msiron@heraldcorp.com]

“아직은 1%도 안 되는 성공률이지만 이것도 금방 높아질 수 있습니다. 유해를 2만~3만구 정도 찾아내고, 유가족들의 DNA 정보도 3만~4만명 이상 모으게 되면 매칭 확률이 눈에 띄게 올라갈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국민 여러분, 특히 유가족분들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물론 지금의 젊은 유가족들에게는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일 수 있겠지만, 나라와 당신을 위해 싸우다 전사해서 찬 이슬ㆍ비바람에 누워 있는데 그깟 침 한 번 제공하는 게 뭐가 어렵습니까? 1577에 오~육이오(5625)로 전화하시면 등록이 가능합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박 단장은 간곡하게 부탁했다.

이런 발굴과정에 대해 박 단장은 “우리가 유해를 찾고 유가족을 찾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열과 성을 다하면 그분들이 나타나 줍니다”고 설명했다. 몇 년 동안 다니고 또 다녀도 없던 지역이지만 찾고 또 찾기를 반복하다 유해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 경이감마저 든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지난 2008년, 경남 하동의 화개장터 부근에서 있었던 일이 그 예다. 6ㆍ25 당시 그곳은 우리 학도병 부대가 긴급히 소집돼 소총과 탄피만 받아 이틀간 군사교육을 받고 전장에 투입되다 북한군 6사단의 매복에 걸려 전투를 벌인 지역이다.

“가보니까 지역주민 중 한 분이 우연히 발굴해서 수습해 놓으셨더라고요. 10개의 총알 중 9개는 탄피에 걸려 있고 딱 한 개만 사라졌어요. 아마 총 안에 있었겠죠. 총은 당시 전리품으로 들고 갔으니까. 딱 보니까 17세 정도 된 학도병인데 총 한 번 못 쏘고 돌아가신 것이에요. 그래서 일부러 지금 그 학교 출신 학생회 임원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나라가 위기에 처할때 공부할 나이에 있는 학생이 나라에 목숨을 바쳤다. 지금 여러분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하고 물었습니다. 국가가 힘이 없어지거나 전쟁에 대비 못하면 저런 비극이 발생합니다. 발굴하면서도 참 마음이 착잡한 사례였습니다.”

발굴에 실패해 죄송스런 사례도 있다. 아들을 기다리던 109세의 할머니의 얘기다. 2008년, 유전자 시료 채취 과정서 알게 된 그분은 60년 동안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는 외아들을 그리며 홀로 살아왔다. 혹시나 아들이 자기 집을 찾아오지 못할까 봐 이사를 가지 않는 것은 물론, 대문이 부서져도 고치지 않은 채 무너져 가는 집에서 살아오셨다. 결국 그분은 지난 2009년 유명을 달리하셨다. 영결 미사에 참석한 뒤 영현병들이 직접 예를 다해 장지로 관을 운반했다.

“당시 미사에 참석하면서 ‘60년 기다리다 지쳐서 스스로 아드님을 찾아가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주어진 책임이 얼마나 큰지 느꼈습니다. 호국의 얼을 거둔다는 자긍심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직도 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고 박 단장은 회상했다.

현재 이런 사업을 제대로 하는 것은 미국과 우리밖에 없다. 미국은 전 세계 어느 전장에서도 사라진 단 한 구의 시신을 찾아 몇 년 동안 전장을 뒤진다. 바로 이런 것이 그 나라를 ‘내 목숨을 바칠 만한 나라’로 각인시킨다는 게 박 단장의 말이다.

 “전후에는 복구, 이어지는 경제개발 등 물질적 가치를 소중히 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정신적 가치를 명예롭게 하는 것, 국격을 높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10년이고 20년이고 계속해 작업을 해나가야 합니다. 유해발굴감식단과 국가는 최후의 일인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결코 이 작업을 멈출 순 없습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나드는 가족 찾아주기. 어느새 그에겐 숙명이자 존재의 이유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김재현 기자/madpen@heraldcorp.com




‘유해발굴감식단’이란

국방부 2007년 창설…전문가 170여명 활동


유해발굴감식단은 지난 2000년 6ㆍ25 전쟁 50주념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호국영령들의 유해발굴사업을 모태로 한다. 당시 2000~2003년까지 29개 지역에서 유해발굴을 실시한 이후 육군에서 이 사업을 이어받아 추진해오다 2006년 5월 유해발굴감식단 창설에 관한 법령이 제정되면서 이듬해인 2007년 1월 국방부 차원에서 정식으로 유해발굴감식단이 창설됐다.

초대 단장인 박신한 단장(육군 대령)을 필두로 한 감식단은 총 170여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 실제로 발굴을 담당하는 인원은 100여명으로 8개 팀으로 나뉘어 운영된다. 이들은 발굴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 다시 반 개의 팀으로 분리, 각 발굴지역으로 들어가며 지역별ㆍ사단별로 구성된 100여명 규모의 ‘지역잠정팀’과 합류해 발굴을 실시한다.

유사학과 출신 등으로 구성된 지역잠정팀은 전투 직후 유해 및 유물 위로 쌓인 퇴적층을 제거하는 데 주로 동원되며, 이 인원은 연간 10만여명 수준이다. 퇴적층 제거가 끝난 후 유해나 유물이 발굴될 경우 발굴감식단 소속 전문인원들이 들어가 솔 등으로 먼지를 제거해가며 세밀하게 유해를 발굴한다. 발굴된 유해는 현충원 내에 있는 유해발굴감식단으로 들어가 정밀 감식과정을 거쳐 신원을 찾고, 유가족을 확인한 후 안장된다.

현재까지 이들은 24개 시ㆍ군 지역에서 아군 5356구, 적군 870구 등 총 6226구의 유해를 발굴해왔다. 특히 이들은 정식으로 유해발굴단이 결성되기 전까지는 연간 500여구 이하의 유해를 발굴하는 데 그쳤으나 공식 결성된 지난 2008년에는 837구, 2009년에는 1278구, 2010년에는 1443구나 발굴했으며 2011년에는 현재까지 총 670구(아군 665구, 적군 5구)의 유해를 발굴해 감식을 진행 중이다.

김재현 기자/madpen@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