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뉴스
  • 떠난 그 자리서 짙어지는 삶의 자취와 가르침...‘바보야’와 ‘법정스님의 의자’
“앙코르는 순서에 없던데…. 아무거나 불러도 돼요?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도 울고 싶어라…당신은 나의 친구여~”

다큐멘터리영화 ‘바보야’는 한 성당에서 교인들의 요청에 못 이겨 노래를 부르는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생전 모습으로 시작한다. 평생을 가난한 자, 힘없는 자들의 곁에 있었던 김 추기경의 사람좋고 자애로운 얼굴 위로 배우 안성기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이제 우리는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없습니다”

‘법정스님의 의자’의 첫 문을 여는 것도 법정스님의 마지막 육성, 유언이다.

“살다가 다 가는 것이지 영원히 사는 사람 없잖아. 만약 내가 여기서 생을 마친다면 시신을 운반하지 말고 여기서 화장해서 뼛조각이 나오면 뼛조각이나 가지고 가지, 시신 어디로 운반할 생각 말라고. 장례식은 우리가 지금까지 봤잖아. 그렇게 야단스럽게 할 것 없이 조촐하게 그냥 불일암에 흩어 버리라고. 그것이 수행자의 회향이 아니냐고.”






지난 2009년과 2010년 차례로 세상을 떠난 우리 사회의 큰 스승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스님의 삶과 가르침이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에 담겼다. ‘바보야’는 부활절(24일)을 앞둔 21일 개봉했고, ‘법정스님의 의자’는 석가탄신일(5월 10일) 이틀 뒤 관객을 만난다. 미리 본 두 영화의 울림은 크고 깊었고 여운이 길었다.

▶가르침을 완성한 그들의 마지막

두 편 모두 두 사람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 김 추기경은 2009년 2월 16일 오후 6시 “생명연장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없이” 생을 마감했다. 병석에서도 “(내 몸 중에서) 더 줄 것이 없는가”를 늘 물었던 김 추기경의 시신 중 각막은 두 사람에게 이식됐다. 가톨릭에서 교황 아래 가장 높은 자리라는 추기경 김수환의 시신을 감싼 수의는 생전 가난한 여성들의 모임으로부터 선물받은 것이었다. 그런가하면 법정스님은 관도 없이 수의도 없이 생전 입고 있던 낡은 가사 그대로 다비식에 들었다. 생전 저술한 10여권의 수필집 인세만 수십억원. 모두 다 내주고 법정스님은 40년전 글로 남긴 약속 그대로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이 떠났다. 법정스님은 전설적인 고승들의 죽음형태를 일컫는 ‘천화’(遷化)에 대해 아주 가끔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이는 “이승의 교화에서 다른 세상의 교화로 옮긴다는 뜻”이다. ‘고승열전’의 작가 윤청광씨는 이에 대해 법정 스스로 표현하길 “옛날 중들이 가장 멋있게 죽는 방법”이라 했고 승려가 인적없는 산속으로 기운이 다할 때까지 들어가 시체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흔적없는 죽음을 맞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수행과 무소유를 완성하는 경지다. “수행을 통해 쌓은 공덕과 깨달음을 다른 사람에게 돌린다”는 ‘회향’과 함께 법정이 꿈꾸던 마지막이었던 셈이다.

▶청년시절과 그들의 정신적 스승

대구 순교자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김 추기경은 일제 시대였던 학창시절 독립투사 이야기에 몰두하고 “황국신민으로서의 자세”를 묻는 시험질문에 “나는 황국신민이 아니므로 소감이 없다”고 썼던 당돌한 학생이었다. 어머니의 권유로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일본을 거쳐 독일에서 수학하던 유학시절 “사회적 불행에 맞서야 된다”며 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한 제 2차 바티칸공의회를 지지하던 열혈 청년 수도자였다. 이를 바탕으로 최연소 추기경이 된 그는 광주항쟁 시 교황청을 통해 더 이상의 희생을 막으려고 했고, 엄혹한 5공 시절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당시엔 성경 속 ‘카인과 아벨’의 비유를 통해 “너의 아들, 너의 제자, 너의 국민, 우리의 젊은이 박종철이 어디 있는가 하느님이 묻는다”라는 유명한 강론으로 시민들의 행동을 촉구했고 권력에겐 날선 비판을 던졌다.

그의 정신적 스승은 형인 고 김동한 신부였다. 혹여 동생에게 누가 될까 평생 외진 곳에서 결핵환자들과 함께 하며 온전하게 헌신했던 형의 삶은 오히려 김 추기경이 평생을 동경하고 존경했던 삶이었다.

홀어머니의 외아들로 집안의 기대를 온몸에 받던 대학 3학년 시절 출가한 법정스님은 사미승 시절 만난 효봉스님이 무소유의 가르침을 전해준 스승이었다. 효봉은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최초의 판사가 된 인물로 한 범죄자에게 사형선고를 했던 36세, 인간이 인간을 재판하는 삶에 회의를 느껴 출가한 고승이다.

▶인간적인 면모

영화 속에는 김 추기경과 법정스님의 인간적인 면모도 담겼다. 어머니의 권유에 의해 형과 함께 사제서품을 받으면서도 “나는 아닌데…”라고 생각했다던 회고나 평생 생가인 초가집의 단란한 가정에 큰 향수를 느꼈다는 토로, 신부가 된 후 첫 부임지인 안동의 시골 성당에 대한 그리움 등이 영화 속에 그대로 드러난다. 이러한 인간적인 면모는 김 추기경으로 하여금 평생 가난한 자를 보듬는 바탕이 됐다. 특히 첫 부임지에서 고해소에 들어오는 시골의 촌부들에게 매번 돈봉투를 건네고 그것을 위해 구호단체에 손을 벌리거나 영어 번역까지 했다는 일화는, 출판사에 수필집 인세까지 독촉하며 가난한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나눠줬다는 법정스님의 이야기와 그대로 겹친다.

김 추기경은 평생 약자들의 곁에서, 그들의 발을 씻겨주고 손을 잡아주며 세상 속에서 불의와 불행에 맞섰다. 법정스님 역시 40대 초반까지 사회참여를 마다하지 않았으나 43세 때부터 63세까지는 전남 순천의 소박한 암자인 불일암에서, 70세 이후 입적 전까지는 강원도 오대산의 수유산방에서 수행에 정진했다. 정기 법회와 수필집만이 대중들과의 통로였다.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스님. 이처럼 종교도, 걸었던 길도 달랐지만 남긴 자취와 가르침은 하나가 아닐까. ‘바보야’와 ‘법정스님의 의자’는 그 증언이다.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