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여 전인 지난달 17일 한국상장회사협의회 회원총회에서 회장에 재선출된 박승복(89) 샘표식품 회장의 얘기다.
시가총액 1000조원을 웃도는 유가증권시장 상장사를 총괄하는 자리다. 규모로만 보면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주요 경제단체를 압도한다. 그 자리를 1996년부터 5차례나 지켰음에도 아들뻘 되는 부회장들의 간곡한 권유에 다시 3년을 맡게 됐다.
‘상장협 회장=박승복’이라는 인식이 굳어져 있다 보니 협의회 측은 박 회장의 재선출 결과에 대해 짧은 보도자료 하나 내지 않았다.
“상장사협의회가 잘 드러나진 않아도 조용히 많은 일을 해야 하는 곳이에요. 이런저런 행사도 많고.”
2009년 미수(88세)를 맞아 회고록 ‘장수경영의 지혜’를 출간하기도 했지만,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 보인다. 매일 회사로 출근하면서도 걸친 직함이 경영자총협회부회장, 국총회(전 총리실 직원모임) 회장,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부회장 등 손으로 꼽기가 어렵다.
그는 1922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나 함흥공립상업학교를 나와 산업은행 전신인 식산은행에 입사했지만, 이후 은행에서 모셨던 송인상 씨가 재무부 장관으로 간 인연으로 59년 재무부에 발을 들여놨고 66년부터 10년간 국무총리실에서 3명의 총리를 모셨다.
“가장 보람있게 일한 때는 공무원 생활인 거 같아. 정일권, 백두진, 김종필 세 분을 취임부터 퇴임 때까지 함께 했는데 그때가 내 전성기였지. 그것도 가장 (성격이) 모난 분들만 모셨으니…(웃음).”
총리실에서 머무는 동안 소양강댐 건설, 민속촌 설립, 환율변동제 시행, 주민등록번호 도입 등 국가적 대사가 쉴 틈 없이 쏟아졌다. 그러다 1976년 김종필 전 총리가 퇴직할 때 함께 물러났다.
하지만 ‘백수’ 생활이 오래가진 못했다.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부친이 작고해 샘표식품 경영을 이어받은 것. 늦은 나이에 경영 일선에 뛰어든 만큼 발로 더 뛰면서 부지런히 간장, 된장 맛을 익혔다. 그 덕분인지 샘표식품은 ‘무차입ㆍ무적자’를 자랑하는 ‘알짜’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1997년에는 장남인 박진선 사장에게 경영을 넘기고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열정은 여전하다. 샘표식품이 2009년 내놓은 히트상품 ‘백년동안’(발효 흑초)은 그의 작품이다.
아침ㆍ점심ㆍ저녁 하루 세 차례 꼬박꼬박 흑초를 마신다는 그는 ‘흑초 전도사’를 자처했다.
“1980년대 일본에서는 식초를 만병통치약으로 부를 만큼 열풍이 불었습니다. 가족이 먹지 않는 것은 만들지도 팔지도 않아요. 식초 마시기 한번 시작해 보세요.”
최재원 기자/jwchoi@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