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무심코 타인의 고통을 재단한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와 그 가족들은 지난 4년간 고통의 크기를 비교하고 구분짓는 시선과 마주하며 살아왔다. 죽은 사람도 있는데 산 사람이 무슨 불만이냐는 차가운 시선 앞에, 생존자 장애진(22) 양 가족은 세월호의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삶을 선택했다. 가족은 각자의 자리에서 세월호와 함께 하며 슬픔과 마주했다. ▶관련기사 9면
▶단원고 교복 입은 애진 엄마ㆍ진실호 모는 아빠=그날 이후 애진 엄마 김순덕<사진> 씨는 1인 5역을 소화하는 연극배우가 됐다. 김 씨는 지난 5일 안산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극단 노란리본) 무대에 올랐다. 4월에 16번이나 열리는 해당 공연에는 8명의 단원고 학생 어머니가 배우로 나서 세월호와 이웃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 공연에서 김 씨는 유일한 생존자 가족이다.
그가 유가족과 함께 공연에 나설 수 있었던 건 생존자 가족도 같은 고통을 떠안은 이웃으로 품어준 다른 엄마들 덕분이다. 그는 “밖에선 생존자와 사망자를 구분짓지만 다른 엄마들은 오히려 ‘미안해 하지 않아도 돼’라면서 꽉 안아줬다”며 다른 엄마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엄마들 사이가 끈끈해질수록 김 씨의 슬픔은 더욱 깊어진다. 그는 “처음에는 몸이 힘들어서 아픈 줄 알았는데 마음이 아파 몸이 아픈 것이더라고요. 함께 할수록 다른 엄마들 마음이 점점 더 깊게 전해져서 더 아픈 것 같아요. 그렇지만 그것보다 세월호를 여기서 놓아버리는 게 훨씬 더 힘들 걸 알아요. 아이 아빠도 그걸 알기 때문에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계속해서 유가족과 함께 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애진 양 아빠 장동원 씨는 참사 이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선박운항 자격증을 취득해 ‘진실호’를 몰고 있다. 장 씨는 4ㆍ16가족협의회 진상규명 팀장ㆍ생존자 대표로 활동 중이다.
▶‘생존자’ 편견 딛고 일어서는 딸…그래도 4월은 아프다=서로를 생각하는 마음만은 누구보다 애틋한 가족이지만 4월이 되면 오히려 속내를 털어놓기 어려운 사이가 된다. 엄마가 꺼내는 세월호 이야기에도 딸은 그저 ‘응응’하고만 대답한다. 애진은 세월호에 관한 일은 작은 것 하나도 엄마에게 이야기하기 힘들어했다. 엄마가 기억하는 애진의 이야기는 공부 못하는 문과가 많이 죽었다는 악플을 보고 “엄마, (학교에) 이과가 원래 별로 없었어요. 내 친구들은 이과도 문과도 똑같이 많이 죽었어요” 말한 것 정도다.
김 씨는 “2,3년 전 배안에서 어떤 친구가 이러저러했었다는 얘길 했던 게 나중에 알고보니 친구가 아닌 자기 얘기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직접 겪은 상처조차 다른 이의 경험처럼 넌지시 이야기할 정도로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생존자의 아픔이 묻어났다.
생존자로 광화문 광장에 나서기도 했던 딸은 발언대 오르거나 인터뷰를 하고 돌아오면 낮에도 가위에 눌려 엄마 옆에 누워 자기도 한다. 씩씩한 딸이지만 그날의 트라우마가 여전한 것 같아 지켜보는 엄마는 마음이 아프다. 중학교 때 요리학원을 다녔고 풍선 아트도 잘 했던 딸이 진로를 바꿔 응급구조학과에 진학한 후로는 혹시 사고 현장에서 뒤늦게 트라우마가 발현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됐다. 하지만 타인의 생명을 구하고 싶다는 그 선택의 의미를 알기에 막지는 못했다.
그런 딸이 지난해에는 ‘2017 에버트 인권상’ 시민 대표 수상자로 나섰다. 예상대로 딸은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친구들의 진실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 김 씨는 “과연 대표 수상자로 나가도 되는 것인지 많이 고민했다. 아이 아빠가 ‘어쩌면 네게 용기를 주려고 가라고 하는 것 같아. 앞에 나서는 일은 힘들지만 앞으로 너의 친구들의 진실을 밝히는 활동에 더 나설 수 있는 계기가 될 거야’라고 응원해줘 용기를 낸 것 같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4년이 지나 이제는 그만해도 되지 않냐는 이야기를 하지만 애진 가족에게 세월호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지금 아프지만 계속 함께 아프고 싶다는 애진 양 가족에게 생존자와 사망자를 구분짓고 고통의 크기를 비교하는 일은 전혀 무의미하다.
김유진 기자/kacew@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