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골프 스타들을 키워낸 유명 코치이자 골프 교습가인 데이비드 리드베터(61)는 브리티시여자오픈 3라운드가 끝나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자청해서 약속을 잡고 30분 간 ‘무료’ 특별 과외를 해준 선수가 우승에 다가섰기 때문이다. 리드베터를 들뜨게 한 선수는 다름아닌 박희영(26·하나금융)이다. 지난 5일(한국시간) 끝난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 아쉽게 2타 차 준우승에 그치긴 했지만, 마지막날 박희영의 기세는 리드베터도 흥분시킬 만큼 매서웠다. 브리티시오픈을 마치고 오랜만에 귀국한 박희영은 미간을 찡긋하며 웃는 특유의 살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상승세 타고 올해 마지막 메이저 우승 한번 해볼까요?”
▶긍정의 여신, 다시 한번 진화하다=15일 강원도 홍천 힐드로사이CC에서 열리는 넵스 마스터피스 2013에 출전해 오랜만에 국내팬들과 만나는 박희영은 “브리티시오픈 4라운드서 기회가 두 번 정도 있었는데 짧은 퍼트를 놓치면서 전환점을 못만든 게 아쉽다. 하지만 정말 최선을 다한 경기였다”고 돌아봤다.
프로골퍼 박희영 인터뷰. [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
박희영은 지난 7월 매뉴라이프 파이낸셜 클래식에서 올시즌 첫 승을 올렸다. LPGA에 데뷔한 후 4년 만인 2011년 CME그룹 타이틀홀더스 대회서 ‘95전96기’ 스토리를 쓰며 첫 우승한 뒤 꼭 20개월 만에 들어올린 두번째 우승컵이다. 2년 전 첫 우승 당시 “매주 새로운 대회가 시작된다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4년을 버텼다. 포기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나 기회가 온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말해 ‘긍정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하필이면 시즌 마지막 대회서 우승하는 바람에 상승세가 꺾였다. 다시 마음이 복잡해졌고 좀처럼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올해 또한번 진화했다. 4월 첫 메이저인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서 톱10(7위)에 오르며 시동을 걸더니 6월 숍라이트 클래식 3위, 7월 매뉴라이프 우승, 8월 브리티시오픈 준우승으로 질주를 멈추지 않고 있다. 세계랭킹이 한 달 만에 37위에서 15위로 수직 상승했다. 원인은 분명히 있었다. 아버지 박형섭(52) 대림대 사회체육학과 교수는 “스윙을 다듬었기 때문”이라고 했고 박희영은 정신적인 부분에서 이유를 찾았다.
박희영은 “원래 성격은 긍정적인데 코스에선 걱정이 많았다. ‘이 퍼트가 들어갈까 안들어갈까’ 결과를 미리 예측하고 두려워했다. 그런데 이젠 샷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하면 결과는 따라온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마음이 편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프리루틴’이 있었다.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를 등두드려주는 일이었다.
“주위에서 멘탈코치를 권유하더라고요. 나는 충분히 많은 책을 읽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고 자신했기 때문에 필요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멘탈코치를 통해 엄청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어요.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 ‘너는 할 수 있어. 잘 할 수 있어. 최고가 될 수 있어’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어요. 돌이켜 보니 제 자신에게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이더라고요. 그 말을 하다보니 행복감이 밀려왔어요.”
▶오늘부터 넌 골프 선수야=다음은 아버지의 원인 분석 차례. 박형섭 교수는 “새로운 스윙 코치를 만난 게 효과를 봤다”고 했다. 박희영은 올초 수잔 페테르손(노르웨이)의 스윙코치인 션 호건에게 배우기 시작했다.
“남들은 희영이 스윙이 교과서라고 하지만 본인은 불만이 많더라고요. 그런데 새 코치와 훈련하면서 스윙이 한층 간결하고 컴팩트해졌어요. 스윙에 대한 자신감이 좋은 성적으로 이어진 것 같네요.”
박희영-주영(23·호반건설) 자매를 프로골퍼로 키운 ‘골프대디’ 박형섭 교수는 테니스 선수 출신으로 경기고와 서울대 체육교육과를 졸업했다. 박희영의 할아버지는 국가대표 기계체조 선수를 지내고 서울대 체육과 교수를 거쳐 동아대 학장, 대학원장을 지낸 체육계 거목 박길준(85) 옹이다. ‘스포츠 DNA’가 꿈틀대는 집안이다.
여성스럽게 자라길 바랐던 엄마와 달리 아버지 박 교수는 무조건 운동선수였다. 골프로 첫발을 디딘 것도, 박희영이 장타여왕이 된 것도 박 교수의 무모해 보이지만 강인한 뚝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희영이 11세 되던 해, 경기도 성남의 남서울골프연습장에 데리고 간 뒤 “넌 오늘부터 골프선수를 하라”고 했다. 그게 다였다. 3주 후 태국으로 전지훈련을 갔는데, 9홀만 돌면 수영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바베큐도 먹을 수 있어 좋았다. ‘골프를 하면 이렇게 재미있게 놀 수 있구나’란 생각에 선수의 길로 들어섰다.
장타 본능도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타고난 신체조건이 워낙 좋기도 했지만 “파5는 무조건 투 온!”이라는 아버지의 고집이 있었다. 경기 중 두번째 샷을 준비하면서 갤러리 쪽을 바라보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고개를 그린 쪽으로 홱 돌렸다. ‘무조건 때려’라는 사인이다. 세컨드샷에 드라이버를 잡을 때도 많았다. 박희영은 “지금도 파5홀에선 아빠 생각이 나서 세컨드샷에 드라이버를 잡게 된다”고 웃었다.
‘로켓’은 박희영이 좋아하는 별명이다. 호쾌한 장타를 날린다고 해서 붙여진 것도 있지만 사실은 한번 버디를 잡기 시작하면 4~5개홀 연속 버디쇼를 펼친다고 해서 시작된 별명이다.
“한번 시동 걸면 로켓처럼 상승세가 쭉쭉 이어진다고 처음 붙여진 거예요. 재작년엔 마지막 대회서 우승해 상승세가 끊겼지만 이번엔 좀더 이어졌으면 좋겠네요. 올해 목표요? 상승세 타고 메이저대회(9월 에비앙 챔피언십) 우승 한 번 해볼까요? 하하.”
조범자 기자/anju1015@heraldcorp.com
사진=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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