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한국영상자료원에 남아있는 자료 중 간첩을 소재로 한 가장 오랜 극영화는 1946년 제작된 ‘똘똘이의 모험’이다. 아동용 반공영화다. 간첩잡는 어린이들의 모험을 다룬 반공영화는 ‘창수만세’(1954)로 이어지고 1970년대 애니메이션 ‘똘이장군’ 시리즈로 절정에 이르렀다. 반공이라는 국시는 때로 영화 작가들의 발목을 잡는 족쇄였지만, 상상력의 불을 지피는 원천이 되기도 했다. 1954년 제작된 한형모 감독의 ‘운명의 손’은 여러모로 한국영화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바걸’로 신분을 감춘 여간첩 ‘마가렛’과 방첩대 청년 장교간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 스릴러액션 영화였다. 여간첩이 등장한 것은 한국영화 최초였으며, ‘바걸’로 위장한 여주인공은 청순미와 퇴폐미를 동시에 갖춘 ‘팜므 파탈’로 당시로선 선구적인 여성상이었다. 이 작품은 한국영화 최초의 키스신이 담긴 작품으로도 남아있다. 간첩 소재는 반공이라는 주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액션, 로맨스, 스릴러, 갱스터, 첩보물 등 한국영화 장르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탁류’ ‘비밀통로를 찾아라’ ‘육체는 슬프다’ ‘붉은 장미는 지다’ ‘빼앗긴 일요일’ ‘검은 장갑’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라’ ‘포리호의 반란’ ‘여간첩 에리샤’ ‘제 7의 사나이’ ‘동경을 울린 사나이’ ‘그 여자를 쫓아라’ 등 제목만으로도 그 풍요로움을 짐작할 수 있는 수많은 작품들이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여간첩, 액션, 로맨스, 스릴러, 첩보전 등이 어우러지며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1999년작 ‘쉬리’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할리우드에서 날아온 것만은 아니었다.
간첩 소재 코미디영화도 이미 1950년대부터 제작됐다. 주로 “시련을 겪고 오해를 받던 주인공이 간첩신고나 간첩검거의 공을 세워 큰 상금을 받고 행복하게 살았더라”는 줄거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1958년작 ‘사람팔자 알 수 없다’가 전형적인 사례였다. 미움받던 며느리가 간첩을 잡아 시가와도 화해하고 행복하게 됐더라는 이야기를 담은 ‘팔푼며느리’라는 영화도 있었다. ‘후라이보이 박사소동’ ‘잡았네요’ ‘역전중국집’ ‘요절복통 일망타진’ ‘소문난 구두쇠’ 등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들인 서영춘, 구봉서, 곽규석, 양훈, 양석천을 기용하고 간첩을 소재로 한 코미디영화들이 1970년대초까지 큰 인기를 누렸다.
이러한 한국영화의 전통을 뿌리로 하는 간첩 소재 영화는 코미디, 스릴러, 휴먼드라마 등으로 계승돼 1990년대와 2000년대에도 꾸준히 제작됐으며 최근 다시 붐을 맞고 있다. 그 중의 특기할만한 경향은 간첩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며 분단의 비극을 조명하는 휴먼드라마다. ‘간첩 리철진’은 남파되자마자 택시강도에게 당한 어설픈 간첩을 주인공으로 했으며 ‘의형제’는 북으로부터의 연락선이 끊어져 고립된 남파 간첩을 주인공으로 했다. ‘간첩’까지 포함해 북의 경제난과 냉전의 해체로 인해 사실상 ‘무적자’로 간첩을 그리는 시각이 새롭다. 현재 제작중이거나 개봉예정인 간첩 영화로는 ‘베를린’이 스릴러 첩보물의 전통을 잇고 있으며 ‘은밀하게 위대하게’와 ‘동창생’은 각각 청춘스타 김수현과 최승현을 내세운 ‘꽃미남 간첩’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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