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수치심,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만 국한 안돼
불법촬영 대상 신체, 노출 부분으로만 한정되지 않아
1심 유죄→2심 무죄→대법, 유죄 취지 파기환송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법원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연합] |
[헤럴드경제=안대용 기자] 대법원은 최근 이른바 ‘레깅스 촬영 사건’에서, 본인 의사에 반한 불법 촬영으로 성적 대상화가 되지 않을 ‘성적 자유’가 있다는 점을 처음으로 밝혔다. 성적 자유를 침해당했을 때 느끼는 성적 수치심은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뿐만 아니라 분노와 공포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연합] |
A씨는 2018년 5월 자신의 휴대전화를 이용해 같은 버스에 타고 있던 여성을 몰래 동영상 촬영한 혐의로 기소됐다. A씨는 당시 레깅스 바지를 입고 있던 여성의 엉덩이 등 하반신을 약 8초간 촬영한 것으로 조사됐다.
1심에서 유죄로 인정돼 벌금 70만원을 선고받은 A씨는 항소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이 사건이 사회적 논란이 된 것도 2019년 10월 항소심 무죄 선고가 알려진 이후였다.
항소심 재판부는 A씨가 촬영한 피해자의 신체 부위가 성폭력처벌법 14조 1항의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에 해당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이 조항은 카메라 등 기계장치를 이용해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신체를 의사에 반해 촬영한 사람에 대해 7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으로 처벌하도록 규정한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당시 엉덩이 바로 위까지 내려오는 다소 헐렁한 운동복 상의를 입고 있었던 점 ▷외부로 직접 노출되는 신체 부위는 목 윗 부분과 손, 레깅스 끝단과 운동화 사이 발목 부분이 전부인 점 ▷엉덩이 등을 부각해 촬영하지 않은 점 등을 판단 근거로 들었다.
아울러 레깅스가 운동복을 넘어 일상복으로 활용되고 있어 ‘레깅스를 입은 젊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적 욕망의 대상이라 할 수 없다고 봤다. 또 피해자가 경찰 조사에서 “기분 더럽고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나. 왜 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 진술이 불쾌감이나 불안감을 넘어 성적 수치심을 나타낸 것이라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항소심 재판부는 촬영된 피해자 사진을 판결문 본문에 첨부하면서 법원 안팎에 2차 가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의 모습. [연합] |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이 사건에서 성적 수치심이 유발됐는지 다시 판단해야 한다며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최근 유죄 취지로 사건을 의정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성적 수치심’에 대해 “피해자가 성적 자유를 침해당했을 때 느끼는 성적 수치심은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라며 “분노‧공포‧무기력‧모욕감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밝혔다. 성적 수치심의 의미를 좁게 이해해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이 표출된 경우만을 보호 대상으로 한정하면, 피해자가 느끼는 다양한 피해 감정을 소외시키고서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을 느끼도록 강요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분이 더럽다’는 이 사건 피해자의 진술은 함부로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이용당했다는 분노와 수치심의 표현으로 볼 수 있기에 성적 수치심이 유발됐다는 의미로 충분히 이해된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이 죄의 대상이 되는 신체가 반드시 노출된 부분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의복이 몸에 밀착해 엉덩이와 허벅지 굴곡이 드러나는 경우에도 이에 해당할 수 있다”며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피부가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으로 신체 부위가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특정한 신체 부분으로 일률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촬영 맥락과 결과물을 고려해야 하고, 같은 신체 부분이라 해도 장소나 상황 및 촬영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밝혔다. 때문에 설사 공개된 장소에서 드러낸 신체 부분이라도, 본인 의사에 반해 함부로 촬영당하는 맥락에서는 성적 수치심이 유발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 대해 성폭력처벌법상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의 보호법익인 ‘성적 자유’를 구체화해서 자기 의사에 반해 성적 대상화가 되지 않을 자유를 의미한다고 본 첫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기존에 대법원은 강간죄, 강제추행죄 등의 보호법익으로서의 성적 자유에 대해 “적극적으로 성행위를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소극적으로 원치 않는 성행위를 하지 않을 자유”라고 판단했다. 이번 판결은 여기서 더 나아가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에서의 보호법익을 구체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dandy@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