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해 ‘레베카’부터 ‘모차르트!’, ‘베르테르’, ‘몬테 크리스토’까지…
‘오페라의 유령’ 보고 뮤지컬계 입문…
“의상은 무대 위 제2의 연기자…하나 하나 살아 움직여”
일본 의류 브랜드의 패션 디자이너에서 2008년 국내 뮤지컬계로 입문한 한정임 의상 디자이너는 지난 12년간 50여편의 작품 속 의상을 무대에 올렸다. ‘엘리자벳’과 ‘프랑켄슈타인’은 각각 제6회, 8회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의상상을 안긴 작품이다. 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레게머리에 찢어진 청바지. 10년 전, 무대 위 모차르트는 ‘센세이션’이었다. 현대와 고전의 절묘한 만남에 ‘파격’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패션은 정체성의 표현이에요. 자기 자신을 가장 쉽게 표현할 수 있는 요소가 바로 패션이죠.” 시대를 뛰어넘은 설정이었고, 이유 없는 창조는 없었다. “자유를 향한 갈망, 억압된 상황에 대한 반항의 표현이었어요. 청바지가 저항의 상징이잖아요.” 10주년을 맞아 다시 무대에 오른 ‘모차르트!’는 클래식한 재킷에 더 거칠게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가슴 속 음표를 피아노 위에 그렸다.
“모차르트는 시대를 초월한 천재 예술가이지만,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 아버지의 울타리를 넘어 자신이 원하는 삶과 자아를 찾아가는 일생이 평범한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수백억원대 매출의 일본 브랜드에서 초고속 승진을 한 패션 디자이너로 출발했다. 뮤지컬과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일에만 치이다 보니 정작 하고 싶어했던 옷이 싫어지더라고요. 회사를 그만두고 영국에서 단기 유학을 하던 중에 ‘오페라의 유령’을 보게 됐어요. 너무나 감동이었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울음을 줄 수 있구나. 내가 하고 싶은 것도 이런 일이었구나 싶었어요.”
뮤지컬에 입문한지 12년. ‘실연남녀’를 시작으로 50여 편의 작품 속 의상들이 한정임 디자이너의 손을 거쳐 무대에 올랐다. 최근 서울 성수동의 의상실에서 만난 한정임 디자이너는 “이곳이 뮤지컬 의상의 시작과 끝을 만지는 곳”이라고 말했다. 올 한 해 ‘레베카’를 시작으로 ‘모차르트!’(23일 폐막)까지 거쳤다. 이제 ‘베르테르’(8월 28일 개막), ‘몬테 크리스토’(11월 14일 개막), ‘삼총사’(올해 개막 예정) 등이 무대로 향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10주년을 맞은 ‘모차르트!’에는 개별 의상이 무려 500벌이 등장한다. 한정임 디자이너는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모차르트의 여정, 그의 내면을 재킷의 색깔로 표현했다”고 말했다. 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
무대 뒤는 전쟁터다. ‘모차르트!’만 해도 30~40명의 인원이 의상 제작에 투입된다. 대량 생산을 하는 기성복과는 달리 ‘한 땀 한 땀’ 수작업 위주의 ‘손이 많이 가는’ 의상들이 대다수다. 이번 무대에선 개별 의상으로 500벌 가량이 등장했다. 초연(350벌) 때보다 20% 이상 늘었다. 스타킹부터 바지, 셔츠, 베스트, 재킷 등 세트로도 400세트 가량 된다. “앙상블 중엔 많게는 8~10벌까지 입는 경우도 있어요. 여자 의상은 액세서리에 팔찌, 장갑, 모자, 귀고리 등 디테일이 많아요. 아무래도 고전 의상이 더 손이 많이 가요.”
단 하나뿐인 옷을 만들기 위해 의상실은 공연 일 년 전부터 분주해진다. 감독과의 대화를 통해 논의하는 과정이 첫 단계. 그런 다음 자료 수집과 디자인 작업을 준비하는 기간을 갖는다. 이 과정에서 한 디자이너는 전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대본을 읽진 않아요. 대신 실존 인물이라면 그 시대를 리서치하고 현지을 방문해요.” 다양한 매체를 통하기도 하고, 직접 그 나라를 찾기도 한다. “역사극에 있어 가장 큰 기둥은 시대예요. 그게 흔들리면 배가 산으로 가죠. 일단 기둥을 잡은 뒤에 퓨전으로 갈지, 고전으로 갈지, 둘을 어떻게 섞을지 농도를 정해요. 그런 다음 내가 직접 작품 속 캐릭터가 돼 감정을 이입하려고 해요.”
본격적인 의상 작업은 3개월 전 시작된다. 제작 전 가봉을 하고 미리 옷을 만드는 샘플링을 준비한다. 이 기간 동안 소재를 준비하고, 의상을 만들고, 각 배우들의 체형에 맞게 여러 차례 피팅을 거듭한다. 핵심은 무대 위 배우들이 연기를 잘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배우마다 의상의 디테일이 조금씩 달라요. 배우마다 연기가 모두 다른데 의상이 같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저마다의 표현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 잘 표현할 수 있는 디자인이 필요해요. 이 의상과 배우가 한 몸이 돼 연기할 때 작품이 완전해지는 거죠.”
디테일도 생명이다. 칼발인 배우들은 신발 디자인에서 더 신경을 쓰고, 복식으로 노래하는 배우들은 의상의 절개까지 고민한다. “절개가 배에 오면 노래할 때 굉장히 불편해하거든요. 성악을 기반으로 노래하는 배우들은 복통이 굉장히 커요. 기능적 디자인이 필요하죠. 보이지 않는 곳에 고무줄을 넣어 잘 늘어나도록 해요.” 의상이 배우들의 체형을 보완하는 역할도 한다. “다리를 길어보이게 하거나, 오자 다리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해요. 마치 의료기구를 만드는 사람 같을 때도 있어요. (웃음)”
‘모차르트!’를 다시 무대에 올리며 한 디자이너는 10년 전 노트를 다시 꺼냈다. 공연 때마다 남겨둔 스케치와 문장들을 한 번 더 찾아봤다고 한다. “이번 무대는 10년간 쌓인 것을 집대성했어요.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모차르트의 여정, 그의 내면을 재킷의 색깔로 표현했죠.” 모차르트의 재킷의 곧 그의 자아였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은 어린 아마데우스의 빨간 재킷, ‘차가운 대도시’ 빈에서 지낼 때 입은 파란 재킷, 자유를 찾을 때 걸친 하얀 재킷, 2막에서의 무채색 재킷과 블랙 블라우스는 모차르트의 일생을 상징적으로 담아냈다. “블랙은 그림자이기도 하고, 죽음이기도 하죠.” ‘엘리자벳’에선 아들을 잃은 엘리자베스의 삶의 무게를 무거운 드레스로, 곧 막이 오를 ‘베르테르’에선 계급과 신분의 차이를 의상의 색상으로 표현했다.
“의상은 제2의 연기자예요. 제 눈에는 이 의상들이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여요. 생명력을 가지고 희노애락을 표현하고, 살아 움직여요. 어떤 생명력을 불어넣느냐에 따라 연기를 달라지죠. 잘 살아났을 때 자기가 맡은 것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고요. 의상 하나하나에 메시지를 담아 감동을 주고, 좋은 영향력을 전달하는 것이 의상 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작품을 만나든 관객들이 공연장을 떠날 때는 가슴이 따뜻해져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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