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핑거프린트’,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 ‘은하해방전선’등 다수의 독립영화의 주연을 꿰찬 그이지만 상업영화 주연은 처음이다. ‘김태균 감독의 영화 ‘봄, 눈’을 통해 관객 몰이에 나선 임지규를 꽃샘추위가 유독 기승을 부리던 날, 서울 논현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실제 마주한 임지규는 ‘배우’라는 다소 딱딱한 호칭보다 ‘옆집 오빠’가 더 어울렸다. 그에게 첫 상업영화 주연을 맡아 떨리지 않느냐고 심심한 인사말을 던지자 “아직 개봉 전이라 모르겠다”는 쑥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가 주연한 ‘봄, 눈’은 윤석화가 24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작품이다. 극의 내용이 엄마와 가족들의 따뜻한 이별을 그린 만큼 윤석화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곧 임지규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는 뜻이다.
“영화 자체가 엄마의 아픔을 담은 내용이잖아요. 저는 작품 속 비중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주연이라고는 하지만, ‘엄마’의 영화나 다름없죠. 만약 아들 역으로 유명한 배우가 출연했다면, 관객들은 작품을 주는 메시지를 보는 게 아니라 배우를 보겠죠.”
이처럼 자신을 서슴없이 낮추는 임지규는 윤석화, 이기영, 김태균 감독에 대한 칭찬을 늘어놨다. 그는 자신의 매력을 전혀 어필하지 않았다. 타인을 돋보이게 했다. 이 같은 행동이 오히려 그에 대한 궁금증을 끊임없이 유발했다.
“윤석화 선배님이 첫날부터 아들로 대해줬어요. 처음 만난 날 갑자기 ‘너 생일이 3월 7일’이지? 우리 아들도 7일이야’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사실 음력 생일이 3월 7일이었지만 당시에는 말하지 않았죠.(웃음) 또 한번은 엄마가 남긴 편지를 읽는 장면이 있었어요. 중요한 감정신이라 몰입하기 힘들었죠. 그런데 윤석화 선배님이 제 감정에 도움이 되도록 뒤 켠에서 읽어주고 계시더라고요. 정말 감동스러운 순간이었죠.”
그의 말에 따르면 이기영은 정이 많고 멋있는 선배이며 회식 자리에서 늘 자리를 지키는 의리파였고, 김태균 감독은 배우의 감정 몰입에 도움을 주기 위해 아픈 속사정까지 털어놓는 인물이다. 임지규는 당시를 회상하듯 깊은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
“사실 제가 남들 이목을 신경쓰는 편이에요. 특히나 감정신 같은 경우는 더욱 그렇죠. 극중 혼자 교회에서 기도하며 우는 장면이 있었어요. 그때 감독님이 오셔서 누이에 대한 이야기를 무릎을 꿇고 제 옆에 앉아서 귀에 대고 해주시더라고요. ‘가만히 앉아서 대충 기도하는 게 아니라 간절함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 않겠냐’며 당신의 아픈 이야기를 고스란히 들려주셨어요.”
대부분의 배우들은 작품을 선택한 계기로 작품성, 시나리오 등을 꼽는다. 하지만 임지규의 대답은 보편적이지 않았다. “영재의 모습이 실제 나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란다.
“단편적으로 봤을 때 고향을 떠나서 직장 생활을 하는 모습이 닮았죠. 12년 째 부모님과 떨어져 살고 있거든요.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 등 특별한 일이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자주 발걸음을 하기 힘들죠.”
그에게는 영재와 닮은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그는 3년 전 여동생을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 보냈다. 그래서일까. 저린 눈빛이 말해주듯 그는 영재가 겪어야 했던 ‘남겨진 가족의 슬픔’을 깊숙이 알고 있다. 임지규는 이번 영화를 통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가족을 잃었던 경험과 아픔이 이번 역할에서 굉장히 크게 작용했죠. 이 아픔이 좋은 재료가 되는 것 같아요. 이번 영화가 부모님에게 상처를 극복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어머니나 아버지는 제가 어떤 작품을 선택하든지 늘 응원해주셨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고요.”
올해로 34세에 접어든 그의 삶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20대의 끝자락에서는 ‘포기’와 질리도록 싸워야만 했다.
“스물 아홉 살 때였어요. 정말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죠. 20대와 30대를 넘어가는 시점에서 뭔가 준비돼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못한 것 같았죠. 그 때가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를 찍었을 때였는데, 연기를 하고 있지만 독립영화라 가족들에게 보여줄 기회가 별로 없었죠. 이럴 바엔 안정적인 직장을 구해서 부모님 용돈이라도 드리는 게 낫겠다 싶었죠.”
하지만 그는 결코 연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이후 ‘은하해방전선’에 출연했다. 이는 곧 ‘역전의 여왕’ 캐스팅으로 이어졌고, 그는 브라운관을 통해 발군의 연기력을 발휘하며 대중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결국에는 독립영화 ‘은하해방전선’ 덕분이죠.“
이번 작품에서 임지규는 ‘어떤 양념도 넣지 않은 연기’를 선보인다. 과거 ‘과속스캔들’, ‘최고의 사랑’에서 선보인 찌질하고 코믹한 연기와는 상반된다고 할 수 있다. 계산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감정 연기다.
“단맛, 짠맛을 다 뺀 담백한 느낌이죠. 과거 ‘과속스캔들’, ‘최고의 사랑’을 통해 이 맛, 저 맛을 내고 싶어서 인위적으로 캐릭터를 만들었다면, 이번에는 아니에요. 인위적으로 만들었던 이미지를 다 걷어냈죠.”
그에게 연기는 여러 사람의 인생을 살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그는 과거 자신이 경험했던 것을 토대로 캐릭터를 구축해냈다. 결국 연기란 바로 자신의 모습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이다.
“연기라는 건 저를 기억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처음 막 연기를 시작할 때 ‘연기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여러 사람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죠. 하지만 이렇게 늦은 나이에 오랜 시간을 보내며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남들이 연기했던 것들을 그대로 쓰면 제 것이 안되더라고요. 결국에는 ‘내가 과거에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지?’라고 생각하게 되죠.”
임지규는 연기 뿐 아니라 신앙생활을 통해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아픔과 슬픔을 나누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늘 자신보다 타인을 더 생각하는 그가 가슴 속 그늘을 다 걷어내고 완연히 웃을 그 날을, 영화 제목처럼 찬란한 봄이 그를 마주하기를 바란다.
양지원 이슈팀기자, 사진 송재원 기자/ jwon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