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수출입 물동량 90% ‘바닷길’로...경제 ‘좌지우지’
온난화로 북극해 항행시간 늘자 ‘북극항로’ 확보 힘겨루기
주요 해로 병목지역인 ‘초크포인트’ 주도권 싸움도 치열
러시아 “북극은 우리 영토” 경고...미사일 배치 등 초강수
미국 “ ‘항행·무역 자유’ 해양규칙 수호” 군사훈련 ‘맞불’
중국도 ‘북극 인접국’ 지칭...‘북극 실크로드’ 영향력 확대
‘말라카해협 딜레마’ 美·中 남중국해 군사 긴장까지 연결
美, G7서 B3W통해 中의 ‘일대일로’ 초크포인트 확보 견제
러-우크라 갈등 고조...터키 보스포러스해협 중요성 커져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무역을 지배하고, 세계의 무역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의 부를 지배하며, 마침내 세계 그 자체를 지배한다.”
유럽 각국이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을 향한 신항로 개척에 경쟁적으로 나선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 the Age of Discovery)’를 살았던 영국의 군인이자 탐험가 월터 롤리가 남긴 말이다.
이후 전 세계 주요 바닷길을 확보한 스페인과 네덜란드와 영국, 미국은 차례로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했다. 어쩌면 롤리의 말은 과거보다 지금 더 정확히 들어맞을 수 있다. 전 세계 수출입 물동량의 약 90%를 바닷길에 의존하고 있는 지금, 바닷길 패권을 장악하는 국가는 곧장 전 세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패권을 둘러싸고 경쟁이 본격화된 미국과 중국이 남중국해와 말라카해협 등 주요 수로(水路)에서 충돌하고, 지구 온난화로 인해 빙하가 축소되며 열린 ‘북극항로’를 두고 러시아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국가들이 힘겨루기를 하는 것은 그만큼 전 세계 주요 강대국들이 바닷길에서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물러서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대항해시대는 수백년이 지난 21세기에도 끝나지 않고 더 치열하게 이어지고 있다.
▶‘파란 북극’ 선점 경쟁에 긴장감 높아져= 미국 해군은 올해 초 ‘파란 북극(A Blue Arctic)’이란 제목의 북극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북극이 더 이상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곳이 아니라 물결이 넘실대는 ‘항로’가 됐다는 의미다.
기후변화의 직격탄을 맞으며 북극해의 연간 항행 가능 기간은 기존 5개월 정도에서 지난해 9~10개월로 늘었다. 이르면 2030년경 여름에는 북극해에서 얼음을 보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우세하다.
지난 3월 좌초한 초대형 컨테이너선 에버기븐호에 수에즈운하가 막힌 글로벌 물류 ‘동맥경화’를 겪으며 북극항로(Northern Sea Route·NSR)의 가치는 더 크게 부각됐다. 극동아시아에서 유럽까지 물류 운송 시 수에즈운하를 통과해야 하는 인도양 항로보다 운항거리가 최대 37% 짧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북극을 둘러싼 국가들의 움직임도 더 빨라지고 있다.
북극 해안선이 가장 긴 러시아가 제일 먼저 치고 나가고 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북극이 우리 영토, 우리 땅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모두에게 분명했다”며 “우리는 북극해 연안이 안전하다는 것을 보장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AFP 통신은 “러시아가 서방 세계에 북극을 침범하지 말라는 경고를 보낸 것”이라고 해석했다.
러시아는 북극 지에 대함 미사일을 배치하고, 군사들이 상주하는 기지를 건설 중이다. 북방함대 소속 신형 함정과 잠수함을 동원한 군사 훈련도 이어지고 있다.
알래스카를 영토로 갖고 있지만 그간 북극 진출에 소극적이었던 미국의 태도도 달라지고 있다.
미 해군은 올해 1월 공표한 북극 전략을 통해 “북극에서 지속해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러시아와 중국이 이 일대의 평화와 번영에 점점 도전할 것”이라고 명시했다. 이후 대규모 ‘맞불’ 군사 훈련을 진행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해안경비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항행과 무역의 자유’ 등 기존 해양 규칙 수호를 강조하며 북극 항로 방어를 위한 적극적인 군사적 활동 가능성을 열어뒀다.
북극권 국가가 아닌 중국도 스스로를 ‘북극 인접국’으로 지칭하며 야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중국은 지난 2013년 캐나다, 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러시아, 스웨덴, 미국 등 북극권 8개 국가로 구성된 ‘북극이사회’에 옵서버 자격으로 가입했고, 급기야 지난 2018년에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주도해 ‘북극 실크로드’로 명명한 계획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영향력 확대에 나서고 있다.
구체적으로 중국은 경제력이 부족한 러시아를 비롯해 여러 북극권 국가들과 협력을 강화하고, 매년 쇄빙선을 북극으로 보내 군사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미·중·러의 북극 팽창에 덴마크·스웨덴 등 유럽 연안국들도 군사적 대비를 강화하고 있다.
덴마크 국방부는 지난 2월 북극권 자치령인 그린란드와 페로 제도에 러시아군에 대항해 군사적인 감시 능력을 키우기 위해 2억5000만달러를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스웨덴과 핀란드 일각에선 러시아에 맞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 ‘초크포인트’ 둘러싸고 美·中 힘겨루기 진행 중= 주요 해로의 병목 지역인 ‘초크포인트(Choke Point)’를 차지하거나 영향권 아래에 두기 위한 경쟁도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글로벌 패권을 둘러싸고 갈등을 벌이고 있는 미국과 중국 사이엔 ‘말라카해협’이 가장 대표적인 초크포인트다.
그동안 중국의 최대 고민 중 하나가 바로 ‘말라카해협의 딜레마’였다. 전체 에너지의 80%를 중동과 아프리카 등에서 말라카해협을 통해 운송해온 중국의 입장에서는 언제든 미국이 앞서는 해군력을 바탕으로 말라카해협을 봉쇄해 자신들의 생명줄을 죌 수 있다 걱정해왔다.
최근 양국 간에 잇따르고 있는 남중국해, 대만 해협 등에서의 군사적 긴장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중국이 ‘배후’의혹에도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도 ‘말라카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지난 2014년 중국은 미얀마 군부 세력과의 결탁을 통해 미얀마 짜욱퓨에서 중국 쿤밍(昆明)에 이르는 총연장 2806㎞의 송유관을 완공, 미 해군이 장악한 말라카해협을 통과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에너지 수송로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이제 중국은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통해 미국과 서방 국가들이 장악한 인도태평양에서 ‘숨통’을 트는 것을 넘어 지정학적 요충지 확보란 오래된 제국주의 수법을 답습 중이다.
중국은 수에즈운하로 연결되는 홍해의 입구 격인 바브엘만데브 해협 근처 아프리카 국가 지부티의 항만을 임대해 기지를 설치했다. 호르무즈 해협으로 이어지는 오만해에 인접한 파키스탄의 항구도시 과다르도 빌려 개발 중이다. 여기에 인도양에 접한 스리랑카의 남단 함반토타 항구도 확장 중이며, 벵골만에 접한 방글라데시 차토크람 항구도 중국 건설사들이 확장 공사를 벌이고 있다.
비록 현재는 사실상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중국은 미국의 턱밑인 중남미 국가 니카라과에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운하 건설에 나선 적도 있다. 사실상 미국의 영향권 아래에 놓인 파나마운하를 대신할 수 있는 수로를 얻기 위해서다.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지난 11~13일 영국 콘월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중국의 일대일로에 맞서 G7이 주도하는 글로벌 인프라 투자 구상인 ‘더 나은 세계재건(Build Back Better World·B3W)’을 발표한 것도 중국의 초크포인트 확보에 제동을 걸어 글로벌 영향력 확대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 밖에도 대표적인 초크포인트 중 하나인 터키의 보스포러스 해협은 크림반도 강제 합병 등으로 우크라이나를 압박 중인 러시아의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병력의 주요 이동로로 각광받고 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정치적 명운을 걸고 160억달러(약 18조원)를 투입해 ‘이스탄불 운하’를 건설, 초크포인트로서 보스포러스 해협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신동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