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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위서 ‘집안 망하려 환쟁이’...열두살때 보란듯 붓 들었지”
문인화 전통 이으면서도 '탈서구화'
상금으로 집 샀을 때가 감격적 순간
마지막까지 붓 들다 이 땅 떠났으면
김병종 작가가 11일 오전 서울 중구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 회고전에 전시된 ‘생명의 노래’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전북 남원에 살던 열두 살 소년은 온종일 느린 기차에 몸을 실었다. 벌판의 마른 바람을 뚫고 당도한 1960년대 말 서울역사에서 소년은 깨달았다. 내 것인 듯한 ‘숨결 한 개’ 없는 서울은 소문과 달리 그리 대단치 않은 곳임을. 그의 발 아래 펼쳐진 잿빛 도시는 며칠은 안 씻은 부랑자처럼 꾀죄죄했다. 너른 산세가 끝없이 펼쳐진 소년의 아침 햇살같은 고향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서울역 내리자마자 한 아주머니가 귀에 속삭이더라고요. 쉬었다 가라고. 그래서 생각했어요. 서울 사람들은 되게 피곤한 모양이다.”

일흔하나가 된 그는 얼마 전까지 바로 그 서울역사(문화역서울284) 전관에서 첫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던 작가 김병종이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동 대학 미술대학장, 미술관장을 역임하며 남부럽지 않은 이력을 두루 가진 작가다. 그러나 그는 최근 헤럴드경제와 만나 이렇게 고백했다. “여전히 자연에서 문명으로 제대로 환승하지 못한 것 같아요. 여전히 빙빙 돌고 있구나, 이번 전시를 하면서 느꼈어요.”

작가 스스로 “촌스럽다”고 평가한 작품들이지만, 그 안에는 태생적으로 기거하는 한국적 정서가 깃들어 있다. 작가가 한국성을 모색하는 한국 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의 ‘K-판타지아 프로젝트’ 첫 번째 기획전의 주인공으로 선정된 이유다. 동양의 문인화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서구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 친 독창적인 궤적이 높이 평가됐다. 시간의 앙금을 질감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한국의 닥종이 판 위에 한지를 풀처럼 붙인 뒤 먹과 동양화 안료로 채색한 토담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그는 “탈중국, 비서구로서 토장국 냄새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옛 서울역사인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렸던 김병종 작가의 회고전 ‘생명광시곡’ 전경. 그의 작품 ‘풍죽’ 연작 7점이 나란히 일렬로 배치된 모습이다. [문화역서울284

작가의 ‘손맛’ 나는 그림들을 한 마디로 말하면, 이곳 아닌 저곳의 그리움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시골에서 자란 작가는 캔버스 앞에서 늦은 봄 개울가에서 멱을 감다 만난 강력한 색채 덩어리를 떠올렸다. 웅혼한 산세가 잡아끌었던 기상을 힘찬 붓질로 감각했다. 바람에 일렁이는 댓잎의 향연을 되새겼고, 노란 구름처럼 아득하게 퍼져가는 생명의 최소 단위로서 송홧가루를 기억했다. 작가는 “무의식 속에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어떤 응어리가 있다”며 “사랑에 불붙듯 격렬한 감정으로 작가의 길에 들어선 게 아니다. 그래서 애절한 마음 없이 홀로 그림은 그려지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일찍이 작가 되기를 꿈꿨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학교 공부 내팽개치고 산천을 떠돌아다닌다’는 꼬리표가 지독하게 따라다녔다. 열두 살에 아버지를 갑자기 여의면서 가세까지 기울었지만, 열네 살의 그는 남원역 앞 복지다방을 빌려 ‘혹(惑)’이라는 다소 발칙한 제목으로 인생 첫 전시를 열었다. 다방 벽 곳곳에는 문양으로 채운 여자 얼굴 그림들이 걸렸다. 그는 영락없는 ‘읍내의 문제아’로 지칭됐다.

“다방은 커피를 판다기보다는 시인, 신문기자, 아마추어 화가들이 창작물을 발표하는 공간이었어요. 그런데 어른들은 학생이 다방을 드나드니 ‘집안이 망하려고 환쟁이가 나오려나 보다’라며 눈을 부라렸죠. 그림으로 먹고살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겠다고 그때 생각했어요.”

감나무가 딸린 서울 부암동 72평짜리 주택을 구입한 것은 그 결실 중 하나다. 서울대 미술대 회화과에 입학한 그가 대학 시절 각종 미술제와 문학상 당선으로 받은 상금을 모아 산 집이었다. 순전히 붓과 펜만 가지고 해낸, 일종의 건실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은 첫 순간이었다. 다만 그는 그 시기를 “실기는 제쳐두고 분출되는 지적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하루가 멀다하고 대학신문에 기고를 했었다”고 회고했다.

한국 수묵 추상화의 길을 연 고(故) 서세옥 화백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도 이 즈음이다. 당시 서 화백은 서울대 미대의 스타 교수였다. “복도를 지나가는데 저를 부르시더니 ‘요새 무얼 하고 다니는가?’ 그러시더라고요. 묵시적인 질문이었어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죠. 하루는 서 화백의 서울 성북동 집에 초대받았어요. 그곳에서 담소를 나누고 대단히 아름다운 석물, 소나무, 풍죽을 보면서 알지 못했던 세계의 일면을 일깨우게 됐죠. 그날 이후로 연극도, 문예 운동도 다 정리하고 그림 그리는 데만 몰두하게 되더라고요.”

]김병종, 송화분분-12세의 자화상, 2004-2017, 180x220㎝, 패널에 혼합재료 [국립현대미술관]

30대 중반에 그린 문제적 연작 ‘바보 예수’, 연탄가스 중독 뒤에 그린 ‘생명의 노래’, 시진핑 중국 국가수석의 국빈 방문 때 선물로 전해진 ‘서설의 서울대 정문’, 마이크 펜스 전 미국 부통령에게 건네진 ‘화홍산수’, 무형의 바람을 시각화한 ‘풍죽’ 등 숱한 대표작을 남겼지만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그의 작품은 흐드러진 생의 반짝임이 두드러지는 200호짜리 대작 ‘송화분분’이다. 이는 2016년 무렵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주제다. 그는 적묵법을 사용해 각기 다른 노란 점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며 자연을 향한 무한한 예찬을 보냈다.

작가는 “근친교합을 멀리하고 우성인자를 얻기 위해 송홧가루는 때로 몇 ㎞까지 여행한다. 어린 시절에 본 노란 구름이 알고 보니 이상적인 배우자를 찾아 떠나는 송홧가루의 군집이었다”며 “그전까지 생명을 그린다고 했는데 생명의 원리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 작품을 가리켜 고(故) 이어령 선생은 “이 노란색처럼 보이는 노란색은 실제 노란색이 아니다. 이것은 애기똥풀의 노랑이고 형이상학적인 노랑이다. 이것은 생명의 밈이 퍼지는 색이다”고 평한 바 있다.

한편 그의 고향이자 춘향전의 본거지인 아담한 소도시 남원에는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이 있다. 지난 2018년 3월에 개관한 이 미술관에는 작가가 기증한 작품 400여 점의 그림과 3500권 가량의 책이 자리하고 있다. 이밖에도 영국 런던 대영박물관, 캐나다 토론토 로열 온타리오 뮤지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청와대 등에 그의 그림이 소장돼 있다.

작가는 “대학 퇴임 후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인지, 서울역사에서 ‘이 세상을 내 붓 아래 둘 거야’라며 각오했던 열두 살 때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며 “붓을 들 힘이 있고 할 수 있는 때까지 그리다가 마지막에 붓을 툭 떨치고 이 땅을 떠나가면 좋겠다는 소망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부터’라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작가는 내년에 미국 뉴욕 퀸스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가질 계획이다.

이정아 기자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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