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을 해치는 자는 6촌까지 사형에 처한다’
낯선 바닷가 마을,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 하가시이치키의 구시키노 시마비라와 간노가와 마을에 짐짝처럼 내팽개쳐진 피랍 조선인들은 바닷가 언덕에 앉아 망연자실 고향 하늘을 향해 눈물짓는 일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심지어 작은 배를 구해 조선으로의 도항을 시도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때 부른 망향의 노래가 ‘오나리 오나이소서’이다. “오 리 오 이소서. ㅣ일에 오 이셔서. 졈그디도 새디고 마 시고 새라난 이양 당식에 오 리쇼서”(오늘이 오늘이소서. 매일이 오늘이소서. (날이) 저물지도 새지도 마시고, 새려면 늘 오늘이소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처지에서 오로지 오늘 살아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는 절박한 심정을 나타낸 노래인데 조선 중기 남원 지방에서 널리 불리던 민요다. 이 노래는 1982년 국문학계의 원로 고려대 정광 교수가 교토대학 서고에서 사쓰마 지방에서 ‘조선가’로 불렸다는 노래를 발굴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정착을 시작한 이들에게 호구지책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했다. 일단 옹기 제작과 농사짓는 일로 연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현지 일본인들의 텃새와 공격적 행위가 극심해졌다. 일본인들과의 마찰이 일어나자 사쓰마번은 조선인들을 인근에 있는 나에시로가와 마을로 이주시키며 보호에 나섰다. 사쓰마번은 조선인들에게 조선옷 착용과 조선 이름 사용 등의 조선 풍습을 허용하고 무사계급에 상당하는 신분 대우, 집과 토지 등을 제공해 주었다. 특히 ‘조선인을 해치는 자는 6촌에 이르기까지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문을 붙인 팻말을 마을 입구에 세워놓아 일본인들이 조선인에게 행패부리는 것을 막았다. 이밖에 마을 인근에 단군을 모시는 사당, 옥산궁을 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배려도 했다. 조선 도공들에게는 조선 땅에서 천민으로 대접받던 것과는 다른 파격적인 대우였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 장수, 사쓰마번의 영주 시마즈 요시히로는 일본으로 퇴각하면서 남원성 전투에서 납치한 조선 도공 등 80여 명을 히가시이치키의 구시키노 시마비라와 간노가와 마을, 가고시마성 근처 해변 마에노하마 그리고 가세다 고미나토 세 지역에 풀어놓았다. 이 가운데 히가시이치키에 정착한 조선인들은 심당길과 박평의 등 43명이었다고 한다.
조선인 도공들의 적응 노력과 이들에 대한 사쓰마번의 보호책은 결실을 맺어 1628년 마을의 좌장 역할을 맡은 심당길과 박평의에 의해 사쓰마번 영주 일가만 사용하는 고급 진상용 명품 백자 ‘사쓰마야키’(‘야키’는 도자기를 지칭)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나에시로가와 마을은 14개의 가마가 가동되면서 사쓰마번 최대의 도자기 생산지로서 ‘사쓰마야키의 고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사쓰마번 영주들은 이곳 마을의 도자기를 도쿠가와 쇼군과 천황을 비롯한 유력 영주들에게 진상해서 큰 인기를 모으며 사쓰마야키의 이름을 일본 국내에 널리 알렸다. 나에시로가와 마을은 사쓰마번 ‘조선인 도자기특구’가 된 것이다.
이삼평의 아리타야키, 앙투와네트를 매료시켜
시마즈 요시히로 이외에도 사가번의 영주 나베시마 시게노부는 공주 계룡산에서 이삼평을, 나가사키 히라도의 영주 마쓰라 시게노부는 진해 웅천 마을에서 거관 등 100여 명을 각각 납치해 일본으로 끌고 갔다. 후일 조선 도공들은 긴란데(사쓰마), 가키에몬(사가), 가쿠란데(나가사키)라는 독특한 도자기 제조 기법을 선보이며 큰 호평을 받는다. 특히 17세기 후반~18세기 초 이삼평의 가키에몬 양식의 도자기는 유럽에 전파되어 유럽도자기 제작의 모델이 되면서 유럽 귀족사회의 문화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 왕 루이15세의 애첩 잔 앙트와네트는 아리타야키의 애호가로 유명하다.
일본 기술입국의 초석 놓은 조선 도공들
19세기 중반~20세기 초 심당길 후손 12대심수관과 박평의 후손 박정관의 사쓰마야키는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수출을 견인, 일본경제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에도막부 말기, 영주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재정확보를 위해 유럽 국제박람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사쓰마 도자기를 세계의 유명브랜드로 만들고 수출 상품으로 내놓아 성공한다. 이때 나에시로가와 마을의 도공 박정관과 12대 심수관이 각각 ‘구원투수’로 나선다. 박정백 박정관 박리행 박 씨 3대가 협업하여 제작한 회심의 역작, 백자 꽃병은 ‘SATSUMA’란 브랜드로 출품되어 큰 주목과 찬사를 받았다. 12대 심수관이 제작한 180센티미터 높이의 대형 꽃병은 현란한 금채와 섬세한 투조기법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들은 1867년 제2회 파리 만국박람회에 이어 빈, 시카고, 파리, 하노이, 세인트루이스 등의 각종 박람회에 출품하여 상을 휩쓸면서 그 명성을 세계적으로 드높였다. 박정관과 12대 심수관의 출품작들은 1870년에서 1905년까지 서구사회에 선풍적인 ‘자포니즘’(일본 붐)을 일으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면서 일본 도자기의 해외 수출에 활로를 열어 외화 획득에 크게 기여했다.
가고시마 ‘SATSUMA’ 브랜드 도자기는 태평양전쟁 전까지는 일본 최대 수출품목으로 자리 잡으면서 20세기 초반 황금기를 구가하게 된다. 이 시기에 일본의 도자기 공장 수는 4000여 곳에 이르게 되었으며 북미지역 60%, 동남아시아 20%, 기타 지역 20% 등의 수출지역 분포를 보여주었다. 특히 미국은 일본으로부터의 도자기 수입이 수량에서는 83.8%, 금액상으로는 54.8%의 비중을 차지했다. 이처럼 도자기는 일본을 대표하는 수출 품목으로서의 위상을 굳히면서 일본 제조업을 견인하는 중심산업의 위치에 서게 된다.
이밖에 조선 도공들의 활약상은 가고시마의 일본 최초 용광로 제작에서도 두드러진다. 용광로가 1500도 이상의 온도에 견딜 수 있는 내화벽돌을 제작하는데 조선 도공들의 도자기 제조 기술을 적용하여 완성시켰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를 토대로 일본은 독자적인 제철소 건설에 나서게 된다. 이처럼 오늘날 일본이 첨단기술 선도국, 경제 선진국이 된 데에는 19세기말~20세기 초의 사쓰마 즉 가고시마의 기술력과 경제력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이런 가고시마의 저력은 우리 남원 출신 도공들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덧붙이자면, “마이크론이 한국의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의 똑똑한 사람들을 데려가면, 인텔은 그 마이크론 사람들을 다시 빼내간다” 이는 어느 반도체회사 CEO가 인재 유출에 무감각한 우리 풍토를 개탄하면서 내던진 말이다. 일본은 규슈 구마모토현에 세계 최고의 대만 반도체 제조회사 TSMC를 유치하여 우리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위협하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400여 년 전 가고시마의 해변 언덕에서 부르던 남원 출신 도공들의 망향가 ‘오나리’가 다시 들려올 것 같아서 두렵다.
다음 회에서는 규슈지방 사가와 가고시마 출신 강경파 정한론자를 중심으로 해서 전개된 일본 메이지유신 초기의 조선 침략 논리 즉 ‘정한론’에 관해 소개하여 올리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