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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건식의 도의상마] 무술(戊戌)무술(武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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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년 새해를 무예 움직임으로 표현한 무예전문 이진혁 작가의 ‘무술(戊戌)무술(武術)’.


무술(戊戌)은 육십 간지 중 35번째로 '무(戊)'는 황(黃)이므로 '노란 개의 해'라고 하여 ‘황금개띠의 해’라 불린다. 무술(戊戌)과 무술(武術)은 우리 말로 같은 음이다 보니 무예계에서는 올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물론 무예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개띠 마케팅’이 유행하는 것처럼 새해들어 많은 사람들이 변화와 성장을 바라고 있다.

역술인들은 동서남북 주변국 조화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기운이 2018년 무술년에 좋은 결과로 나올 것이고, 고생하고 꿈꾼 만큼 이루어지는 해라고 말하고 있다. 모두가 희망적인 한 해로 보고 있는 것이다.

무술(戊戌)년 무술(武術)은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무술년의 역사적 사건은 698년 발해건국을 시작으로, 1418년에는 세종대왕의 즉위가 있었다. 1658년에는 조선이 청나라를 도와 2차 나선정벌에서 우리 군이 사격술과 전술을 과시하였으며, 1598년은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을 계기로 7년간 계속되었던 조선과 일본의 전쟁을 끝낸 해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무예와 관련해서는 1778년 정조시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1778년 정조의 무예체계 정비

조선후기 정조의 개혁 의지는 무술년이던 1778년 6월에 발표한 ‘경장대고(更張大誥)’에 담겨 있다. 여기서 ‘경장’은 ‘개혁’을 의미하며, ‘경장대고’는 개혁을 하기 위해 국왕이 제시한 큰 정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 중 군사제도 개혁 중 하나가 표준화된 무예체계 정비를 추진하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은 각 군영의 무예체계가 통일되어 있지 않아 군영마다 명칭과 훈련체계가 달랐다고 한다. 이 무예체계 정비는 각 군영의 군권을 일원적으로 통제하고 체계를 통일하기 위한 것으로, 정조는 한성의 주요군영인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용호영의 훈련체계를 정리하게 하였다. 이를 통해 1785년 ‘병학통’이 편찬되었으며, 다음 해인 1789년에는 ‘무예도보통지’ 편찬을 명하여 1790년에 완성하기에 이른다.

조선시대에는 인재등용방식의 하나로 과거제도(科擧制度)가 있었다. 과거시험에는 문과(文科)와 무과(武科)로 구분되었는데, 무술년 1838년은 무과에서 더 많은 인원을 선발하는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문과에 3명을 선발한 반면, 무과에 71명을 뽑은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무술년 1838년 1월 11일(음력) 비변사에서 좌의정 이상황(李相璜)이 효종에게 ‘봄가을로 강무(講武)하여 군병(軍兵)을 조련하고 만약을 대비하자’고 제안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898 고종의 황학정

서울의 대표적인 활터는 황학정(黃鶴亭)이다. 이 황학정은 1898년 무술년에 고종의 명에 따라 세워진 경희궁 내 회상전(會祥殿) 담장에 있던 활터를 말한다. 한때 고종이 이곳에서 직접 활쏘기를 하였던 곳으로, 고종이 “노란색 곤룡포를 입고 활을 쏘는 고종의 모습이 노란 학이 춤추는 것 같다”고 하여 황학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활터는 1922년 일제가 이곳에 학교를 짓는다는 이유로 지금의 서울 사직공원(사직단) 북쪽 인왕산 아래로 자리를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활쏘기 금지령을 내리기도 하였지만 유일하게 황학정만이 그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대한제국 왕의 활쏘기 장려가 있었던 1898년 무술년은 혼란스러웠다. 개혁의 사회적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이에 대한 반동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해 황국협회 설립은 독립협회의 활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함이었다. 관청과 관련을 맺으면서 단결이 잘 되는 부보상을 동원하여 민중집회를 물리적으로 훼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무관학교 출신의 길영수를 비롯하여 홍종우와 이기동 등이 각 처의 보부상들을 규합해 협회를 설립하는 등 혼란의 역사를 만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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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경관들로 구성된 국회경위 사건을 다룬 동아일보의 보도.


1958 아시안게임 유도와 국회경위사건


다음 무술년인 1958년은 한국전쟁 이후 재건과정에서 큰 변화를 가져온 시기다. 격동의 시대였던 이 시기의 현대사는 베이비붐 세대를 가리키며 ‘58개띠’라는 말이 거의 관용어로 굳어졌다. 사상 최고의 출산율인 6.3명을 기록하며 지금도 전체인구의 1.5%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현대사의 주역들로 불리기도 한다. 1973년 이들이 중학교 3학년일 때 고등학교 평준화 제도가 생겼고, 1977년 본고사를 끝으로 역대급 경쟁률로 대학에 진학하였으며 대학에서는 ‘서울의 봄’을 맞이했다고 할 정도였다.

이 시기 무예는 사회 안정을 담당하던 경찰과 교도관중심의 수련과 대회가 주를 이루었다. 경찰의 날을 기념한 전국경찰무술대회가 개최되었고, 1958년 5월에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아시안게임에서 시범경기였던 유도에서 우리나라는 일본과 무승부로 비겼다. 당시에 출전한 유도선수는 우리나라가 2명, 일본이 6명, 대만이 4명이었다. 한국의 유도 감독은 이제황 당시 대한유도학교(현 용인대) 교장이었고, 이석국, 권용우, 김위생, 서정현이 국가대표로 선발돼 권용우와 이석도가 출전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 무예사에서 잊지 못할 사건이 벌어진다. ‘국회 경위사건’이 일어난 배경에 무술경관들이 관여한 것이다. 당시 신문기사(동아일보, 12월 24일자)에 따르면 1958년 12월 지방 각 경찰국 소속의 무술경관들이 대거 서울로 상경했다. 야당의원들이 국회에서 농성투쟁 중인 긴박한 상황에서 무술경관들이 투입될 것이고, 경북과 경남 경찰국의 유도특기 경관 70여 명과 전남과 전북경찰국의 무술경관이 차출돼 서울에 집결한다는 내용이었다. 야당의원들은 자유당이 발의한 신국가보안법안을 반대하고 있었다.

이 기사는 사실이었다. 그 다음해인 1959년 3월에는 300여 명의 무술경위(당시 무술경관들로 구성)들의 완력에 의해 야당의원들을 제지하고 법이 통과된 것이다. 큰 사회적 비난이 일었고, 이 무술경위사건을 계기로 사회적으로 무예인들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

2018 희망의 무예

2018년 무술년 무예계에도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우선 유네스코 국제무예센터 건립이 시작된다. 유네스코의 무예를 관장하는 재단이 설립되고 1년이 지난해인 만큼 전통무예의 활로가 펼쳐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또, 국립무예진흥원 설립을 위한 정부의 사전조사가 이루어진다. 이미 학술용역에 대한 국비가 확보된 상태여서 무예인들의 희망인 (가칭) 국립무예원 청사의 목표가 설정될 것으로 보인다. 또, 2019년 개최될 충주세계무예마스터십의 조직위원회가 연 초에 발족해 대회준비에 들어가며, 2021년 제3회 세계무예마스터십 유치도시의 윤곽이 드러난다. 무엇보다 전통무예진흥법의 개정을 통해 무예단체의 국비 또는 지방비의 지원에 대한 법률적 근거를 확보함으로써 무예계의 새로운 변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역대 무술년은 변화와 개혁의 분위기였다. 그리고 큰 혁신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무술년, 무예계도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무예단체들의 단합과 무예진흥 시스템 구축이 우선되어야 하며, 10년간 잠자고 있는 전통무예진흥법도 이제는 깨워 일으켜세워야 한다. 무예가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그들에게 다가 갈 수 있는 분위기가 창출되길 기대해 본다.

* 허건식 박사는 용인대에서 무예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세계무예마스터십위원회, 유네스코 국제무예센터, 국립태권도박물관, 예원예술대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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