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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 산책] 무패로 은퇴한 고아복서, 권철을 아십니까?

  • 2017-10-16 20:23|유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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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MBC신인왕전 최우수선수 권철.

1928년 동아일보사가 후원한 제1회 조선권투선수권대회가 개최되면서 한국 복싱의 역사가 태동한 이래 43명의 세계 챔피언이 탄생했습니다. 그들을 포함해 많은 복서들이 명멸(明滅)하며 무수히 많은 발자취를 남겼죠. 그중 영화 속 주인공 같은 험난한 삶을 살아온 권철(본명 강은길, 61년생, 밀양)이라는 복서가 오늘 링사이드 산책의 주인공입니다.

권철은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과 함께 걸출한 복싱 실력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10연속 KO퍼레이드를 펼치며 27전 26승(19KO) 1무의 기록과 함께 한때 IBF와 WBC 페더급에서 각각 1, 2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복싱인들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권철은 프로 데뷔 이듬해인 1980년 신인왕전에서 12전승(8KO)을 기록하며 최우수상을 차지했으며 ‘고아 출신의 복서’라는 특이한 이력과 맞물려 언론의 조명을 받았죠.

권철은 3살 때인 1964년 고아가 됩니다. 부친 강성일(31년생)과 함께 성북구 친정집에 요양차 머물던 모친(한계숙,33년생)을 상봉하고 부산으로 내려가던 열차 안에서 아버지와 헤어집니다. 이후 부친의 과음으로 인해 권철의 험난한 역경이 시작됐고, 가정은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났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권철의 모친과 제가 통화해서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

대구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밀양에서 병원(내과 및 소아과)을 운영하던 부친은 아들을 잃은 이 일로 병원을 폐업하고 폭음으로 일관하다 결국 화병으로 이듬 해 35세를 일기로 삶을 등지고 맙니다. 권철은 필자에게 그동안 단 한번도 언론에 공개하지 않았던 가슴에 묻어두었던 비화를 조심스럽게 풀어놓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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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철과 방송인 임성훈 씨(우측).


고아가 되다

6.25 사변이 끝난 지 10년 남짓한 그 시절에 권철은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시립아동보호소로 옮겨져 유년시절을 보냈죠. 총 3,000명이 넘는 아이들은 대부분 나이도, 이름도, 고향도 몰랐다고 하네요. 그들은 비좁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이런저런 이유로 삶을 등졌다고 합니다. 그런 처참한 광경과 함께 새벽이면 청소차가 쓰레기를 치우듯 연고자가 없는 시신을 운구해가는 장면을 숱하게 목도하면서 자랐다고 합니다. 후에 알려진 바로는 그 시신들은 병원에 실험실습용으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지옥이 따로 없는 아비규환과 같은 그 곳의 생활에서 울타리 너머 가정집 TV에서 본 복싱 경기는 권철에게 어둠속에서 솟구치는 한줄기 빛과 같았다고 합니다. 1975년 면목동에 있던 애향원(보육원)으로 옮겨진 권철은 1976년 11월 상원 복싱체육관에 등록하면서 삶의 변곡점을 맞이합니다. 관장은 김명복 박사 휘하에서 전국최강 경희대 복싱의 산파 역할을 했던 복싱 해설자 노병엽(32년, 작고)선생이었죠.


복서 권철은 중화중 1학년 때인 1977년 전국신인선수권대회에 플라이급으로 출전해 단번에 6연승을 거두며 결승까지 치고 올라갔습니다. 노병엽 관장은 “철이는 키는 작지만 선천적으로 유연성과 순발력이 남달랐고 특히 찬스 포착에 동물적인 감각을 지닌 전형적인 슬러거였다”고 회고했죠.

당시 권철과 결승에서 맞붙은 상대가 후에 동양챔피언을 지낸 사우스포 김성남(59년생, 광주, 29전 21승<13KO> 1무 7패)였죠. 치열한 타격전 끝에 권철은 첫 패배를 기록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김성남도 권철과 같은 고아 출신이었기에 동병상련의 심정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 무렵 한체대 박형춘 감독이 상원체육관으로 직접 와 스파링을 했는데 권철은 당시 국가대표 오인석(58년, 대전)을 상대로 대등한 실력을 보였다고 합니다. 박 감독은 권철에게 “복싱에 타고난 녀석”이라며 칭찬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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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6월 황철순과 맞대결을 펼치고 있는 서울체고 1학년생 권철(우측).


나이 많은 아마복서


권철은 이듬해 제28회 학생선수권 결승에서 한 체급 내려 라이트 플라이급으로 출전해 역시 결승에 진출하지만 그를 기다린 복서는 후에 85년 월드컵과 86년 아시안게임을 재패한 사우스포 김기택(64년생, 안성중)이었죠. 권철은 또 판정에 고개를 숙입니다. 그러나 두 차례의 패배를 딛고 79년 제29회 학생선수권 밴텀급 결승에서 김기택과 재격돌해 설욕에 성공하며 대회 최우수 복서에 선정됐습니다. 삼세번 만에 첫 우승을 차지한 겁니다.

당시 고등부 최우수복서는 코크급 결승에서 장관호(62년생, 원진체, 현 KBC 심판부장)를 꺾은전남체고의 김종섭(63년생, 현 광주 대광여고 교사)이었는데 중학생인 권철보다 2살이나 어렸습니다. 1980년 19살의 권철은 서울체고에 입학합니다. 당시 담임이었던 구창서 교사는 후에 필자가 서울체고에 근무할 때 이런 회고를 남겼죠. “음... 철이는 말이 없었어. 그리고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지. 아마 이해정, 안영수랑 동기였을 걸. 당시 교장 선생께서 철이에게 학교만 졸업하면 원하는 대학에 보내준다고 관심을 표명했지만 별 반응이 없더군.”

구창서 선생은 당시 철이가 철이 없었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그 무렵 당시 체고 재학 시절 황철순(55년생, 고성)의 은퇴경기 파트너로 낙점됐다고 훈련에 집중하라고 지시하자 불과 보름 훈련하며 경기를 치렀죠. 당시 권철의 체고 2년 선배인 정용범(62년생, 동국대)은 권철의 좌우연타는 환상적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경기가 황철순은 물론 권철에게도 동반은퇴 경기가 되고 맙니다. 80년 6월 4일 전국에 생방송으로 중계된 경기였죠. 후에 황철순은 필자에게 “당시 철이는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듣보잡이었는데 조그만 녀석이 겁없이 덤비는 바람에 식겁했다”고 촌평했죠. 황철순의 판정승이었지만 경기 내용은 박빙의 승부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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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지기 김명진 형사(좌측)와 권철 씨.


군대에서 좌절한 타고난 복서

권철은 그해 11월 학교를 중퇴하고 프로에 입문합니다. 그후 81년 신인왕전에 출전해 최우수복서에 뽑혔고, 이후 전파를 타며 얼굴이 알려진 권철을 눈여겨본 친형 강은태 씨에 의해 극적으로 17년 만에 가족상봉이 이뤄집니다. 5남중 막내로 태어난 권철은 64년 6월생이던 나이도 61년 2월로 정정되었고 본명도 강은길로 밝혀졌죠.

권철의 타고난 복싱실력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1982년 중순 어느날 당시 간판 프로복서 10명이 선발돼 아마추어 국가대표들과 태릉선수촌에서 평가전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황준석, 백인철, 김득구, 유환길 등과 일원이 되어 한판승부를 벌였는데 통상 아마추어 룰(3분 3회)로 경기를 진행하기에 프로복서들에겐 상당히 불리했죠. 하지만 권철은 당시 파트너인 문성길과의 스파링에서 치열한 타격전 속에서도 대등한 경기를 펼쳤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의 이계홍 기자에 의해 ‘프로복서 중 유일한 생존자(?)’라는 극찬으로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권철은 보기 드물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전형적인 파이터였습니다. 하지만 그 무렵 권철은 가족 상봉과 함께 고아 딱지가 떨어지면서 곧바로 입영 통지서가 나옴과 동시에 수경사로 입대를 합니다. 그의 입에서는 “제기랄”이란 탄식이 나왔죠. 당시 수경사에는 이승훈, 양일, 이종학, 정종관, 최상우 등이 고참으로 있었는데 그는 상명하복의 군대생활속에 적응하지 못하고 숱한 사건(?)을 일으키며 영창에 들어가는 등 멘탈이 붕괴되고 맙니다.

권철의 유일한 무승부(83년 7월, 페리그라노 전)도 이 무렵에 나왔죠. 입대 전 연전연승하며 아우토반이 펼쳐진 것 같던 쾌속행진도 제동이 걸리죠. 군 입대가 디딤돌이 아닌 걸림돌이 되어 18연승(12KO승)이 마감됩니다. 특히 군제대 후 극동의 전호연 회장이 권철을 스카우트하려고 했지만 매니저와의 의견 차이로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이에 권철은 1987년 5월 라이트급 강타자 최강(덕흥)을 2회 KO시킨 후 소리소문없이 링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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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철 관장의 개관식에 참석한 배우 신성일(좌측) 씨.


철이 든 비운의 복서?

만일 권철이 타고난 재능과 함께 정열을 불태우며 챔피언이라는 목표에 포커스를 맞추고 전력투구했다면 복싱 역사도 달라졌을 겁니다. 특히 문성길과 프로에서 맞대결했다면 ‘이기는 정주영, 지지않는 이병철’이란 책 제목처럼 용호상박 같은 빅 게임이 펼쳐졌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은퇴 후 권철은 중랑구 상봉동을 중심으로 유흥업소인 판코리아, 한국관 등에서 10년 동안 영업부장 생활을 하면서 ‘밤의 대통령’으로 군림합니다. 그는 건들면 무섭게 터진다는 시한폭탄이라는 소문만으로 일대를 평정하죠. 특히 6명의 건달을 상대로 한 맞대결에서 번갯불이 번쩍이는 것처럼 짧은 순간에 상황을 종료시킨 일화는 지금도 주먹계에서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죠. 현재 동대문구에서 30년 세월을 강력반 형사로 근무하고 있으며, TV프로그램 ‘경찰청사람들’에 수차례 출연할 정도로 베테랑인 김명진 씨가 당시 상황을 전해줬습니다. 김 형사는 권철과 함께 상원 복싱체육관에서 동문수학한 절친이죠. “철이가 당시 한 번씩 지역구를 순찰하면 인근 업주들이 긴장할 정도로 명성을 얻었지만 결코 민폐를 끼치지 않는 정의로운 친구였다.”

권철은 후에 이렇게 회고했죠. “지금 생각하면 매니저와의 불화도 다 내 잘못이지. 내가 잘 나갔던 현역시절 챔피언에 등극하면 나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당시 장미희 주연의 겨울여자라는 영화를 만든 김호선 감독이 영화로 제작하겠다고 언질도 줬는데 다 부잘없는 일이 되어버렸지. 나처럼 살면 안 돼. 후배들에게 이말을 꼭 전해주고 싶어.” 평소 말이 없는 권철은 진성성이 묻어나는 속내를 가감없이 쏟아냈습니다. 그래서 감히 한 마디 건넸습니다. “철이형 이제 철이 들었나 보네요.” 그는 엷은 미소로 화답했다. 권철은 현재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중랑구에서 복싱체육관을 운영하는 평범한 관장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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