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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와키 칼럼] 조상우 교수의 한 세기 전 서울의 골프장
옛 사진은 해당 시대의 생생한 생활상과 사실을 담은 기록물이다. 한반도 골프 초창기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조상우 호서대 골프학과 교수의 자료를 바탕으로 세월의 타임머신을 타고 백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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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원골프장은 1924년 12월 2일 폐장하여 그 후 왕실에 묘원에 산책로, 공중변소 등을 갖춘 공원으로 탈바꿈하게 되는데 당시 유교적 사상이 강했던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조선의 입장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효창원골프장은 1921년 6월 1일 지금의 서울 용산의 효창공원에 개장하였다. 이 골프장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산하 철도국에서 직영으로 운영하고 있던 조선호텔의 부속시설로 호텔 투숙객을 위한 서비스와 외국 관광객 유치를 목적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효창원은 조선 22대 왕 정조의 맏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 정조의 후궁이자 문효세자의 어머니인 의빈 성씨, 순조의 후궁 박숙의(朴淑儀)의 무덤이 있던 왕실 묘역이었다. 그래서인지 효창원골프장의 설계자였던 H.E 던트(Daunt, 일본 고베골프클럽 회원으로 1915년 일본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 선수권 보유자)가 골프장을 건설하면서 그의 수필집 <은자(隱者) 왕국에서의 골프(golf the hermit kingdom>에서 ‘9홀을 넣기에도 그리 넓지 못한 용지의 여기저기에 묘들까지 산재해 있지 않은가. 묘를 파 없애면 되는 문제이지만 조선인들이 결코 달갑게 여기지 않는 등 코스 조성에 여러 애로가 겹쳤다. 2번 홀의 경우도 오르막이 심하고 그린 옆에 고분이 있고’라는 묘사를 통해 골프 코스 가까이에 고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 사진은 일제강점기 효창원골프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으로 골프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인터넷이나 책자에서 한번쯤은 볼 수 있음직한 사진이다.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러한 과거 사진들은 당시 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준다. 이 사진은 중절모를 쓰고 그린에서 경기하는 골퍼와 캐디를 하는 어린 아이의 평범한 골프경기 모습의 사진이지만 이 사진 속에는 당시의 중요한 모습이 숨겨져 있다.

우선 이 사진은 흑백사진이기 때문에 사진 속의 모든 것들이 흰색과 검은색으로 표현되었다. 잔디가 깔려 있는 페어웨이는 검은색이지만 그린은 흰색으로 보여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당시 그린이 모래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진에서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그린이 모래였기 때문에 그린 주변에는 지금의 고무래와 같은 것이 있어서 홀 아웃을 할 때는 벙커를 정리하듯 그린을 정리하였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사진 중앙 상단에 사람보다도 더 커 보이는 20여개의 흰색 말뚝이 대형 원형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다. 골프장에 큰 말뚝이 대형 원형으로 세워져 있는 모습은 당시나 지금이나 골프장에서 찾아보기 힘든 코스설계인데, 이것은 효창원골프장을 설계한 던트의 수필에서 언급되었던 왕실의 고분이 있었기 때문에 고분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말뚝으로 보인다. 이러한 역사 사진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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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조선철도상황, 조선총독부 1926년.


효창원의 클럽하우스
한국골프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용산 효창원골프장(1921~1924)의 클럽하우스 전경으로 서양의 목조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사진 속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서양인과 그 옆에 서서 대기하고 있는 듯한 조선인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효창원골프장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만들어져 일본인들이 주로 경기하던 골프장이었지만 최초의 조선인 골퍼가 등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 동안 조선인 최초의 골퍼는 청량리골프장(1924-1929) 시대의 한상봉, 박용철, 민대식, 윤호병 등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일본 궁내성 소속으로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을 관리하던 이왕직(李王職)의 예식과장 이항구(李恒九, 1881년8월21일~1945년3월6일)가 4월11일 효창원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있었다는 기사(동아일보 4월 13일자)로 보아 그가 조선 최초의 골퍼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항구는 이완용(李完用, 1858 ~ 1926)의 차남으로 1924년 4월 20일 창립된 사단법인 경성골프구락부 11명의 이사 중 유일한 조선인이었고, 그후 청량리골프장과 군자리골프장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왕직에서 차관과 장관까지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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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일신보 1923. 6.11.일자


한반도 최초의 골프 대회
1923년 6월 10일 효창원골프장에서의 열린 골프대회의 사진으로 그 규모나 성적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동안 한국 최초의 골프대회가 청량리골프장 시절(1924-1929)에 열렸다는 사실보다 더 앞서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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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경성 골프장 모습. 출처: 조상우 개인소장


경성 컨트리클럽의 등장
현재 서울 능동의 어린이대공원에 있던 경성골프구락부 군자리골프장(1929-1943) 7번홀(파 3)에서의 경기모습. 지금은 경기운영이 4인 1캐디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이 당시에는 1인 1캐디 방식으로 운영되어 그린에 상당히 많은 골퍼가 경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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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골프구락부 회원증
1940년(당시 일본력 소화 15년) 경성골프구락부의 회원증으로 이 당시 경성골프구락부의 회원은 조선총독부 고관은 물론, 서울의 일류명사와 지방에 있는 재벌 그리고 조선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대부분이었고, 1938년 입회비가 2백원, 연회비 60원, 월 회비 20원-30원으로 상당한 수준이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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