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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 산책] 카라스키야와 황복수, 그리고 홍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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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출한 기량으로 한때 한국프로복싱을 주름잡았던 황복수 씨.


며칠전 반가운 손님이 체육관을 방문했습니다. 주인공은 전 WBC 페더급 세계 1위이자, 동양 페더급 챔피언 황복수(54년생, 인천체대) 선배였죠. 황 선배는 예전에 비해 혈색이 좋아졌는데 이유를 묻자 2년 전 결혼한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막내 아들 황상두(31) 군이 얼마전 아들을 낳았던 모양입니다. 할아버지가 된 것이죠. 손주 재롱에 푹 빠져 50년 가까이 뿜어댔던 담배를 수개월 전에 독한 마음먹고 끊었다고 합니다.

황복수(존칭은 생략하겠습니다)는 17세 때인 1971년 천호상전 1학년 때 프로에 데뷔해 1980년 26세에 은퇴할 때까지 53전 42승(15KO승) 2무 9패를 기록했는데 싸웠던 상대 대부분이 역대급 실력파 였습니다. 국내 선수로는 프로데뷔전 상대였던 나대성을 필두로 자신의 11연승에 브레이크를 걸었던 김학영(동신체), 김막동, 김영식, 최일성, 현수만, 박춘하, 신운철, 김효성 고생근, 정순현, 유종만, 이대환 등이었습니다. 참고로 배형환에겐 6연승을 기록했는데 이는 프로복싱 특정선수 최다연승 기록입니다. 아마추어에서는 현 상무팀 감독인 이훈(68년생, 동국대-부산시체육회)이 올림픽대표 출신의 이완균(74년생, 서울시청)에게 기록한 12연승이 최고 기록입니다.

황복수는 외국선수로는 전 WBC 플라이급 세계챔피언인 베니세 보코솔과 전 WBC 슈퍼밴텀급 챔피언을 지낸 로얄 고바야시와의 2연전을 비롯 헥토르 카라스키야, 펠 클레멘테, 에디 살로마, 요시다 슈조, 스파이더 네모도, 호르헤 알바르도 등 역대급 복서들과 자웅을 겨뤘습니다. 복싱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퀄리티가 높은 불멸의 파이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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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카라스키야와 일전을 치르는 황복수(오른쪽).


78년 카라스키야와 일전을 치른 황복수


가장 강한 상대를 묻자 황복수는 국내선수로는 “(10연승 후에 맞붙은)김학영이 제일 까다로운 복서였다”고 말하더군요. 왼손 카운터에 다운까지 당했는데, 황복수는 그 패배를 딛고 무려 20연승을 질주했지요. 그중 9차례는 KO승이었습니다. 황복수는 밴텀급 국내타이틀 5차 방어에 성공하고, 75년 2월 동양타이틀전을 치르기 위해 태국 방콕으로 첫 원정을 떠났습니다. 챔피언은 그 유명한 사우스포 복서인 베니세 보코솔이었습니다. 당시 황복수의 전적은 31전 30승(12KO) 1패였고, 챔피언 보코솔은 이미 72년 9월 베틀리오 곤잘레스(베네수엘라)를 꺽고 WBC플라이급 정상에 올랐던 복서였습니다. 보코솔은 1차방어 성공 후 타이틀을 반납하고 73년 10월 라파엘 에레라가 보유한 WBC 밴텀급 타이틀에 도전했습니다. 2체급 석권을 노렸지만 판정패하고, 다시 동양챔피언에 올라 후일을 도모하던 중이었습니다(종신전적 57전 49승<36KO> 8패).

이 동양타이틀매치에서 실력차를 절감하고 9회 눈부상으로 TKO패를 당한 황복수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패”였다고 술회했습니다. 보코솔은 자신이 53전을 치르면서 가장 강력한 펀치를 보유한 복서였다고 치켜세우기도 했습니다. 주먹의 파워는 두 차례 격돌한 전 WBC 슈퍼밴텀급챔피언인 로얄 고바야시(43전 35승<27KO> 8패)보다 묵직했다는 겁니다. 반면 그 유명한 카라스키야의 펀치는 소문만큼 하드 펀처는 아니였다고 촌평했습니다. 언론 탓에 거품이 낀 실력이었다는 것이죠. 직접 글러브를 맞대고 맞싸운 황복수의 직언이기에 가슴에 와 닿았죠.

카라스키야 집중분석

여기서 카라스키야의 전적을 복스렉을 토대로 살펴보겠습니다. 복싱은 기록경기가 아니기에 상대가 전승에, 모두 KO승을 거뒀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와 어떤 내용으로 싸웠느냐가 그 선수의 자질을 판단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80년대 초중반 활약한 프란시스코 퀴로즈(도미니카)라는 복서가 있습니다. 대타로 나서 WBA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루페 마데라(멕시코 50전36승26KO2무12패)를 상대로 9회 KO승을 거둔 신출귀몰한 복서였죠. 마데라는 앞서 도카시키(일본, 25전 19승<4KO> 4패 2무)를 꺾고 세계 정상에 오른 선수였습니다. 퀴로즈는 1차 방어전을 빅토르 세라(파나마)와 맞붙었는데 당시 그 선수는 13전승에 10KO를 기록하던 강타자였습니다. 챔피언 퀴로즈는 22전 10승 10패 1무 1노디시전으로 전적이 초라했죠. 다소 만만한 챔피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의외였습니다. 퀴로즈의 맹폭에 세라는 2회 길게 눕고 말았죠. 정상에 등극했다면 월프레드 베니테스의 종전 최연소 세계챔피언 기록(17세 176일)을 깰 수 있었지만 싱겁게 무산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다시 ‘지옥에서 온 악마’라는 살벌한(?) 별명을 지닌 카라스키야로 돌아가죠. 그는 당시 언론에서 요란스럽게 떠들었던 것처럼 고메즈나 사모라, 사라테처럼 정말 전율적인 강타자였을까요? 복스렉 검색자료에 의하면 카라스키야는 1960년 4월 30일 파나마 태생으로 1976년 4월 16세의 나이로 프로에 데뷔하여 1981년 5월 은퇴할 때까지 총 25전 18승(16KO) 5패(3KO패) 2노디시전을 기록했습니다. 대단한 펀치의 소유자였고, 홍수환과 77년 11월 신설 WBA 주니어페더급 타이틀을 걸고 싸울 때까지 1년 7개월 동안 아시다시피 11전 전KO승으로 탑독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11전을 싸우는 동안 상대를 분석해 보면 데뷔전 상대와의 2차례 경기를 포함(1. 4차전)해 대체로 허접한 선수들이었습니다. 2차전 상대 빅토르 로페즈는 3전 3패, 3차전은 11전 10패 1무의 리카르도 베가, 5차전은 1전 1패의 에르난데스, 6차전은 16전 4승 9패 3무의 아늘포 로페즈 등이었죠. 카라스키야는 이들을 상대로 1976년에 6연속 KO퍼레이드를 질주한 겁니다. 이어 77년 2월 7차전에서 1전 1패의 로드리게스, 8차전은 13전 4승 9패의 부이트라고, 10차전은 24전 8승 15패 1무의 안드레스 로페즈 등이 카라스키야의 연속 KO 퍼레이드에 제물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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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스키야 전에서 입장하고 있는 황복수.


홍수환과의 대결 이후에도 카라스키야는 78년 2월 17승 4패 1무를 기록한 레이날도 히달고에게 전원일치 판정패를 당했고, 그해 8월 벌어진 황복수 전에서 아시다시피 간신히 판정승을 거둡니다. 이후에도 1979년 4월 WBA 페더급 타이틀에 4차 방어전 상대로 도전해 챔피언 에우제비오 페드로사(53년생, 종신전적 49전 41승<25KO> 6패 1무 1노디시전)에게 실력차를 느끼며 11회 KO패를 당했으며, 그해 7월 알렉스 아르게요와 일전을 치뤘던 당시 41전 전승의 루벤 카스티오라는 톱클래스 선수에게도 역시 KO패를 당하며 성장동력을 잃었습니다. 결국 1981년 5월엔 결국 글러브를 벗고 말았죠. 다시 강조하지만 헥토르 카라스키야는 언론이 부풀린, 실력에 비해 인기가 높았던 그런 유형의 복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직접 글러브를 끼고 싸웠던 황복수는 카라스키야에 대해 어떤 인상을 받았을까요. 귀를 쫑긋 세우고 귀담아 들어봤죠. 한마디로 ‘영 아니올시다’입니다. 황복수는 3라운드까지 가드를 바짝 올리고 서서히 접근전을 시도하며 펀치를 맞아보니 생각보다는 위력이 없는 펀치였다고 회상했습니다. 4라운드부터 타이트하게 근접전을 시도해 양 보디를 쑤시자 카라스키야는 “욱! 욱!” 괴성을 질렀다고 합니다. 황복수는 고질적인 오른손 부상 때문에 안면 쪽으로 제대로 공격하지 못한 것을 상당히 아쉬워했습니다. 황복수는 신장이 163cm였는데 자기보다 10cm나 큰 카라스키야 선수가 신문방송에 보도된 것처럼 지옥에서 온 악마 운운하는 닉네임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습다.

황복수는 그때 파이트머니로 350만 원을 받았는데 그 돈이면 서울 외곽에 집 한 채를 살 수있는 큰돈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황복수는 1-2 판정으로 지면서 ‘역편파판정’ 시비가 일었습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 경기가 있기 전 또 다른 국제게임이 벌어졌었는데 그때 K모 선수가 경기내용상 크게 밀리고도 판정으로 이기면서 여론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황복수는 그 역풍을 고스란히 맞았던 겁니다. 카라스키야는 홍수환과 대전 때 5,000달러를 받았지만 황복수와의 경기에서는 파격적인 2만 달러를 챙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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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복수(왼쪽)와 홍수환.


원정에서 강한 홍수환


물론 1977년 11월 벌어진 홍수환 대 카라스키야의 경기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정에서 타이틀을 획득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하의 문성길도 1989년 7월 WBA 밴텀급 원정방어전에서 한 번 이겼던 카오코 갤럭시에게 일방적으로 난타당하며 벨트를 풀은 바 있습니다. 홍수환은 2차례 세계타이틀을 모두 원정애서 획득했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항간에는 ‘럭키한 챔피언’이란 평을 듣기도 하지만 운(運)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실력과 기회가 타이밍이 맞아 하모니를 이룰 때 작용하는 겁니다.

1975년 2월 황복수가 태국원정 때 눈부상으로 무릎을 꿇었던, 그 유명한 보코솔을 홍수환은 국내로 불러들여 76년 5월 동양타이틀을 걸고 맞붙어 초접전 끝에 판정승을 거뒀습니다. 보코솔은 한국선수와 8전 7승(4KO) 1패를 기록했는데 유일한 1패가 홍수환이었습니다.

홍수환은 1973년 2월 태국원정에서 세계 톱랭커인 타놈지트 수코타아를 상대로 극적인 8회 KO승도 거뒀습니다. 후에 수코타이는 WBA 밴텀급 타이틀전에서 챔피언 알폰스 자모라(멕시코)에게 도전했습니다.

참고로 복서로서 크게 입지를 구축하지 못하고 평범하게 은퇴한 헥토르 카라스키야는 공공 외교전문기관인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초청으로 얼마전 방한했는데 글러브를 벗고 정치에 투신해 시장을 거쳐 국회의원에 오르는 등 그 분야에서는 정상에 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복서로서 대성하지 못한 아쉬움을 정치인으로 변신해 안정된 삶의 울타리를 구축했기에 방향전환에 성공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공이란 단어는 어떤 분야에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게 아니라, 커다란 실패와 쓰라린 좌절을 딛고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 도전하는 데 어울리는 단어인 듯싶습니다.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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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부터 황복수, 카라스키야, 홍수환.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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