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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 타타라타] 책임지지 않는 여자농구의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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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지지 않는 사회 보이지 않는 리더>의 표지.


# 제목이 아주 선명한 위 책의 원제는 ‘Nobody in Charge: Essays on the Future of Leadership’이다. 언론인, 외교관, 국무부차관보, 학자 등 20세기 미국에서 참 많은 일을 한 할란 클리블랜드(1918-2008)가 썼다. 2002년에 미국에서 나와 주목을 받았고, 한국에서는 2010년 번역판이 나왔다. 대부분의 책이 그렇듯 내용은 간단히 요약이 가능하다.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책임을 지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책임을 지고자 하는 소수가 바로 리더’라는 것이다. 정권 막판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잘못’이 넘쳐나는데 책임지는 리더가 없으니 요즘의 우리네가 ‘책임지지 않는 사회, 보이지 않는 리더’인 듯싶다.

# 2016년 여자농구에서 벌어진 ‘첼시 리 사기극(요렇게 쓰는 게 적확하다)’은 그 자체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스포츠의 근간을 흔들고, 가장 기본적인 사회정의를 훼손하는 범죄로 결코 재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외국선수를 서류조작으로 한국에 데려왔다(조부모 중 한 명이 한국인이면 해외동포 선수라는 규정을 악용). 그리고 첼시 리는 KEB하나은행을 챔피언결정전까지 올려놓으며 맹활약했다. 그리고 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 추악한 거짓이 까발려졌다. 가장 공정해야 할 스포츠가 팬을 속인 것이다. 시즌 전체를, 그리고 모두를 속였다는 점에서 제한된 경기를 대상으로 벌어지는 경기(승부) 조작보다 더 나쁘다. 징계가 내려졌다. 첼리 리는 한국에서 영구 퇴출되고, 2015~2016시즌 KEB하나은행과 첼시 리의 모든 성적과 기록이 삭제됐다(2016년 7월).

# 문제는 ‘잘못’의 크기에 비해 ‘징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허공에 떠 있는 실효성 없는 징계만 있을 뿐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추악한 범죄가 있고, ‘엄청난’ 징계가 내려졌는데,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다. 첼시 리는 미국에서 선수 생활을 잘 하고 있다. 희대의 사기극을 감독해야 할 WKBL의 실력자들도 멀쩡하다. ‘그들은 이 사건의 공모자’라는 의심을 받고 있는 데도 말이다. 공모자를 넘어 ‘주체’라는 의혹을 사고 있는 KEB하나은행의 박종천 감독이 사임한 것이 유일하게 책임지는 모습이었다.

# 그런데 최근 여자농구인들 사이에서 ‘살짝 책임졌던’ 박종천 전 감독과 관련해 분노가 확산되고 있다. 팩트는 두 가지다. 먼저 “사퇴는 했지만 여전히 KEB하나은행에서 급여를 받고 있다”는 제보다. 확인해 보니 박 전 감독은 KEB하나은행팀의 고문 자격으로 오는 연말까지 고문급여를 받고 있다. 은행 측은 “고위임원이 퇴직하면 일정기간 고문으로 예우하는 것이 관례다. 박종천 감독도 같은 케이스”라고 설명했다. 긴 말이 필요 없다. 군색하다. 오랜 기간 회사를 위해 헌신한 급여노동자에게 이렇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희대의 사고를 책임진 사람에게도 그런 예우를 하는가? ‘민중의 개 돼지’ 발언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공직자도 파면이 되면 큰 경제적 손실을 입는다. 책임지고 감독직에서 사퇴했는데 고문으로 급여를 받는다? 만약 개 돼지 발언을 한 고위공직자가 그렇다면 여론이 어떻겠는가? 소가 웃을 일을 참 자연스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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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사기극으로 한국여자농구 역사에 오명을 남긴 첼시 리. [사진=뉴시스]


# 더 놀라운 일은 지난 10월 10일 한 방송사가 낸 보도자료였다. ‘지략과 전력분석에 뛰어난 박종천 전 감독을 여자프로농구 해설위원으로 위촉했다“는 것이다. 이 방송사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이다. 인기가 떨어지는 여자농구를 중계하는 것은 참 감사한데, 여자농구 사상 가장 추악한 사기극에 연루돼 책임을 진 사람을 해설위원으로 모신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WKBL의 고위실력자들, 박종천 감독, 그리고 이 방송사의 주요인맥이 A대학 인맥으로 끈끈하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싶은 모양인데 손가락 사이로 하늘이 너무 잘 보인다.

# 박종천 전 감독은 언론을 통해 “나도 피해자”라고 항변한다. 이건 진실게임의 영역이다. 여자농구에서 잔뼈가 굵은 B씨는 “그 사람(박 전 감독)이 ‘없는 서류를 만들어서라도 데려오겠다’고 말한 것을 직접 들었다”고 말했다. C씨는 “박종천 감독이 피해자? 여자농구 쪽 사람들은 다 안다. 다른 팀이 영입 협상을 하고 있는 도중에 선수를 가로챈 사람”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 그 진실을 밝히자는 것이 아니다. 정말 최소한의 책임은 좀 지자는 것이다. 설령 박종천 감독이 피해자이고, WKBL이 몰랐다고 하자. 그렇다 해도 그들은 ‘리더’이고, 리더에게는 권한만큼이나 책임이 있다. 범죄에 관련된 사람 중 유일하게 책임지고 사퇴했는데, 그 사람은 고문 급여를 받고, 공영방송의 마이크 앞에서 여자농구를 해설하는 것은 정말 불편하지 않은가? 도대체 첼시 리 사기극에서 책임진 리더는 누구인가? 오히려 ‘이 정도 사태수습이라면 한국에서는 사익(私益)을 위해 사기를 칠 만하다’는 못된 생각을 심어주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할란 클리블랜드는 어렸을 때 사고로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 때 징집에서 제외됐는데, 그 미안함에 공공근무를 하려고 무척 노력했다. 이런 게 리더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유병철 기자]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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