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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전드 오브 풋볼] 아약스의 마지막 챔스 우승을 이끈 네덜란드 흑인 3인방
[헤럴드경제 스포츠팀=김유미 기자] 세리에A와 함께 에레디비지에가 유럽의 빅리그로 군림하던 시절, 아약스는 네덜란드의 최강이자 세리에A 팀들의 유일한 대항마로 떠오르며 유럽축구를 주름잡았다. AC밀란이 ‘밀란 제너레이션’으로 황금기를 보내는 동안 아약스 또한 장래가 유망한 영건들과 함께 튤립 황금기를 구가한 것이다.

그렇다. 1990년대 초중반 유럽 무대를 호령하던 아약스에는 뛰어난 흑인 선수들이 있었다. 프랑스의 통치를 받던 알제리의 선수들이 프랑스 국적으로 국제대회에 출전해 이름을 떨친 것처럼, 수리남계 네덜란드 선수들도 그랬다. 아약스의 흑인 선수들은 과거 네덜란드와 영국의 식민지였던 남아메리카의 수리남 출신으로, 앞서 ‘검은 튤립’으로 불리던 루드 굴리트 등과 같은 뿌리를 두고 있다.

에레디비지에 최다 우승팀(33회)이며 지금까지도 네덜란드의 명문 클럽으로 손꼽히는 아약스. 그중에서도 네덜란드를 넘어 유럽의 강호로 이름을 떨치던 90년대의 아약스. 레전드 오브 풋볼이 아약스의 94-95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 당시의 네덜란드 흑인 신성 3인방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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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글로 대표되는 에드가 다비즈는 그라운드 위의 싸움닭이었다. [사진=피파 홈페이지]


에드가 다비즈 - 고글을 낀 싸움닭

고글과 장발로 기억되는 에드가 다비즈가 첫 번째 주인공이다. 다비즈하면 ‘고글’을 떠올리는 팬들이 많을 것이다. 그는 축구 역사상 최초로 액세서리가 공식적으로 허용된 선수였다. 경기 도중 공에 오른쪽 눈을 맞아 녹내장을 앓게 되면서 FIFA는 다비즈의 고글 착용을 허락했다. 불편한 시야에도 다비즈는 금세 고글에 적응하면서 활약했다.

다비즈는 터프한 수비 스타일로 ‘싸움닭’, ‘황소’ 등으로 불렸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동했는데, 엄청난 활동량으로 오렌지 군단의 심장 역할을 도맡았다. 아약스 유스 팀에서 성장한 다비즈는 1991년 18살의 나이로 1군 무대에 데뷔했다. 당시 아약스 감독이 루이 반할이었다. 1군에 데뷔한 다비즈는 곧바로 자신의 능력을 드러냈다. 170cm의 작은 신장에도 다비즈는 볼을 탈취한 뒤 전방으로 치고 들어가는 드리블과 패스 능력까지 갖춘 완성형 미드필더였다. 특히 드리블 돌파와 동시에 180도 턴으로 이어지는 개인기는 그의 상징과도 같았다.

프로 2년차였던 1992년 UEFA컵을 제패했고, 3년 뒤인 94-95시즌에는 당시 세계 최고의 클럽이었던 AC밀란을 1-0으로 꺾고 빅이어(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의 별칭)를 들어올렸다. 95-96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도 결승에 올랐는데, 마르첼로 리피 감독이 이끄는 유벤투스와 승부차기까지 간 끝에 2-4로 아쉽게 패했다. 이 때 승부차기 첫 주자로 나선 선수가 바로 다비즈였고, 그는 실축을 하고 말았다.

96-97시즌 여러 빅클럽들의 러브콜을 받은 다비즈는 AC밀란 행을 택했다. 이때부터 다비즈의 저니맨 인생이 시작됐다. AC밀란 구단과의 불화로 한 시즌이 채 지나기도 전에 유벤투스에 새 둥지를 틀었고, 여기서 다시 부활했다. 지네딘 지단과 중원에서 호흡을 맞추며 세리에A 3회 우승, 수페르 코파 이탈리아 2회 우승을 달성했다. 당시 유벤투스 감독이었던 마르첼로 리피 감독은 다비즈에게 ‘내 하나뿐인 엔진룸(My one-man engine room)’이라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2004년에는 바르셀로나로 임대 이적해 팀을 위기에서 끌어냈다. 시즌을 2위로 마감했고, 레이카르트 감독의 초창기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지금까지도 다비즈는 바르셀로나 사상 가장 성공적인 임대 영입으로 꼽힌다.

이후 다비즈는 인터밀란을 거쳐 잉글랜드 토트넘으로 이적하면서 이영표와 한솥밥을 먹게 된다. 풍부한 경험과 좋은 인성으로 토트넘 팬들과 동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세월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부상이 잦아지면서 2007년 여름 친정팀 아약스로 복귀했고, 출전 기회를 얻지 못하면서 크리스탈팰리스와 잉글랜드 4부리그 바넷을 전전하다 2014년 은퇴했다.

다비즈는 네덜란드 국가대표 선수로서도 활약을 펼쳤다. 1994년 A매치에 데뷔하며 대표팀 커리어를 시작했다. 유로 1996 당시 대표 팀 감독이었던 거스 히딩크 감독과의 마찰을 일으키며 독설을 퍼부었고, 히딩크는 다비즈를 고국으로 돌려보낸 뒤 기용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98 프랑스 월드컵 최종명단에 깜짝 발탁되면서 다비즈는 다시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게 됐다. 히딩크 감독의 결정에 감동한 다비즈는 월드컵 무대에서 맹활약했고, 월드컵 4강에 올랐다. 대회 직후 다비즈는 FIFA 선정 ‘팀 오브 더 토너먼트’에도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그 뒤로 유로 2000 준결승을 이끌었고, 2005년까지 네덜란드의 주전 미드필더로 A매치 74경기에 출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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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플레이어 클라렌스 세도르프는 20여년 간 무려 4개의 빅이어를 들어올렸다. [사진=AP뉴시스]


클라렌스 세도르프 - 천재 플레이어가 모은 4개의 빅이어

클라렌스 세도르프는 네덜란드 최고의 재능들이 모이는 아약스 유소년 팀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당시 프랑크 데부어, 로날드 데부어, 에드가 다비즈, 패트릭 클루이베르트 등 훗날 네덜란드 대표 팀을 이끈 선수들과 함께 아약스 유소년 팀에서 성장했다.

세도르프는 미드필드의 전 포지션을 소화 가능한 멀티 플레이어이자 천재였다. 1992년 16살에 아약스 1군으로 프로무대를 밟으면서 팀의 핵심 선수로 발돋움했다. 측면과 중앙을 가리지 않으며 좋은 플레이를 펼쳤고, 데뷔 시즌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강력한 중거리 슈팅을 선보이면서 네덜란드 FA컵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인 92-93시즌에는 아약스를 리그 챔피언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94-95시즌 아약스의 리그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세도르프는 더 큰 무대를 원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세리에A의 삼프도리아였다. 삼프도리아에서 한 시즌을 보낸 뒤 1996년 레알마드리드에 입단했다. 레알마드리드에서 세도르프는 아르헨티나의 전설 페르난도 레돈도와 중원을 장악하면서 주전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96-97시즌 라리가 우승을 경험했고, 97-98시즌에는 코파 델 레이와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본인 커리어 사상 두 번째 빅이어를 들어올렸다. 클럽월드컵 우승까지 맛본 세도르였지만, 레알마드리드는 지네딘 지단의 영입을 위해 그를 트레이드 카드로 내세웠다. 이에 좌절한 세도르프는 2000년 인터밀란으로 팀을 옮겼다.

인터밀란에서의 활약도 대단했다. 02-03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라이벌 팀인 유벤투스를 꺾고 선수 인생의 세 번째 빅이어를 거머쥐었다. 이후 AC밀란으로 이적했는데 카카, 에르난 크레스포 등의 스타플레이어들과 함께 세도르프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적인 플레이를 펼치며 AC밀란을 최강팀으로 만들었다.

04-05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도 진출했지만, 리버풀이 이스탄불의 기적을 만든 그 경기였기에 AC밀란은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06-07시즌 다시 한 번 리버풀과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맞붙었고, 이때 마침내 승리하면서 세도르프는 자신의 네 번째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맛봤다. 이 우승으로 AC밀란은 챔피언스리그 통산 7회 우승을 기록한다.

AC밀란에서 전성기를 보낸 세도르프도 어느덧 노장이 됐다. 2012년 팀에서 방출되면서 브라질의 보타포구로 이적했다. 브라질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이던 중 13-14시즌 AC밀란의 임시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 때문에 세도르프는 AC밀란 최초의 흑인 감독 타이틀을 갖고 있다. 잠시 AC밀란에서 지휘봉을 잡은 뒤 무적 상태로 지내던 그는 올해 7월 중국 슈퍼리그의 선전FC의 감독으로 부임해 지도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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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 스트라이커 패트릭 클루이베르트는 네덜란드 국가대표 사상 세 손가락에 꼽히는 공격수다. [사진=UEFA 홈페이지]


패트릭 클루이베르트 - 루이 반할의 동반자


마지막은 3인방의 막내 패트릭 클루이베르트다. 빠른 스피드와 높은 타점으로 헤딩에 특화된 선수였다. 188cm의 장신임에도 유연한 움직임을 선보이면서 타깃형 스트라이커로 활약했다.

1983년 아약스 유소년 팀에 입단한 클루이베르트는 1994년 18살에 성인무대 데뷔전을 치렀다. 데뷔전에서 데뷔골을 작성하며 순식간에 주전으로 떠오른 그는 데뷔 시즌 25경기에 출장해 18골을 기록하며 성공적인 출발을 알렸다. 이듬해 94-95시즌에는 리그와 챔피언스리그 동시 우승으로 더블을 달성했다.

클루이베르트 역시 앞선 두 선수들처럼 자주 팀을 옮겨 다녔다. 97-98시즌에 AC밀란으로 이적했지만 6골에 그치며 98-99시즌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당시 바르셀로나 감독이었던 루이 반할이 호나우두의 공백을 메울 대체자를 찾던 중 선택한 선수가 바로 클루이베르트였다. 바르셀로나에서의 첫 시즌 리그 35경기에 나서 15골을 터트리며 부활의 날개를 폈고, 다음 시즌인 99-00시즌에도 26경기에 출장해 15골을 기록했다. 이후 03-04시즌까지 총 182경기 90골을 기록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2004년 여름 이적 시장에서 잉글랜드 뉴캐슬로 이적해 25경기 6골을 기록한 클루이베르트는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발렌시아 유니폼을 입었는데 이미 기량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고 기록은 10경기 1골에 그쳤다. 이후 PSV아인트호벤과 프랑스의 릴을 거친 뒤 은퇴를 선언했다.

국가대표 팀에서도 화려한 커리어를 쌓았다. 79번의 A매치에 출전해 40골을 기록했는데, 이는 로빈 반페르시, 클라스 얀 훈텔라르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득점 기록이다. 유로 1996, 1998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했지만 큰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성적을 낸 대회는 유로 2000이었다. 이 때 한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대회에서 5골을 기록해 득점왕을 차지하면서 유로 2000 베스트 11에도 선정됐다. 유로 2004를 끝으로 대표 팀에서 물러났다.

선수 은퇴 후 클루이베르트는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다. 08-09시즌 네덜란드의 AZ알크마르에서 수석코치로 지도자 인생을 시작했고, 2010년에는 호주 A리그 브리즈번에서 단기간 수석코치를 지내기도 했다. 2010년 여름 네덜란드로 돌아와 네이메헨의 수석코치를 지냈고, 2011년에는 트벤테 유소년 팀의 감독으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2012년부터는 반할 감독 아래에서 네덜란드 국가대표 수석코치를 맡아 2014년 브라질 월드컵 3위의 성적을 낸 뒤 반할과 함께 대표 팀에서 물러났다. 그 뒤로 2015년에는 1년가량 퀴라소 대표 팀 감독으로 활동했고, 올해 3월에는 아약스 유소년 팀 감독을 맡기도 했다. 지난 7월부터는 감독직을 내려놓고 PSG의 단장으로 활동 중이다.


04-05시즌 아약스의 마지막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끈 네덜란드 흑인 신성 3인방에 대해서는 ‘축덕들이 만드는 팟캐스트 해축야화 36화’를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다. 해축야화는 매주 금요일에 1부가, 토요일에 2부가 업로드되며, 팟캐스트 어플 ‘팟빵’을 통해 들을 수 있다.

* 레전드 오브 풋볼은 축구 팟캐스트 ‘해축야화’의 한 코너입니다. 아래 URL을 클릭하면 바로 방송을 청취할 수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0698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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