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조영섭의 링사이드산책] 대한민국 대표 ‘패밀리 복서’ 열전 ①
심판으로 유명한 이용선-이용장 형제

이미지중앙

현재 대한권투협회의 유일한 형제 심판인 이용선-이용장 씨.


현재 중앙심판인 이용장(1960년생 전주) 선배가 제 체육관을 찾을 때마다 그의 친형(이용선)이 생각납니다. 그 분은 1950년생으로 막내 동생보다 꼭 10년 연배시죠. 둘은 아마추어 경기가 있을 때마다 대한복싱협회 심판으로 나란히 경기장을 찾는 형제 복싱인입니다. 형 이용선 씨는 과거 아마추어 시절 김현치 이창길 등 당대 최고의 복서들과 일합을 겨뤘습니다. 그가 공수부대를 제대하고 1975년에 부친이 타계할 때 막내동생인 이용장은 중학생이었다고 합니다. 막둥이를 비뚤어지지 않게 키우기 위해, 아주 엄하게 지도 편달하면서 선친 노릇을 했다고 합니다. 그 일환으로 동생도 복싱에 입문시켰고, 1977년 전북 신인대회에서 이용장이 이리상고의 송미가열(제58회 전국체전 금메달)에게 석연찮게 패하자 동생을 위해 곧바로 두 팔을 걷어부치고 심판시험에 응시, 복싱계 전면에 등장하게 됐습니다. 동생도 이에 화답하듯 1979년 세계주니어선수권 선발전(밴텀급)에 출전해 동메달을 획득했고, 이듬해인 1980년 제61회 전국체육대회 플라이급 결승에서 진주 복싱체육관 김평국(61년생 사천)을 꺽고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형 못지않은 복서로 활약했습니다. 이용선은 1980년 대한아마추어복싱연맹 심판이 됐고, 1981년 전주 전광체육관을 개관해 국가대표 상비군이자 프로에서 동양타이틀 2체급을 석권했던 고인식(원광대-풍산체육관)을 발굴하는 등 입지를 구축했습니다. 특히 1986년 꿈나무복싱선수단의 코치로 선임돼 그의 지도를 받은 선수들이 후에 86 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 90년 북경올림픽까지 맹활약하는 데 초석을 놓았습니다.

1991년 FABA 국제복싱 심판위원으로 등재된 이용선은 1993년 복싱 볼모지인 방글라데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되어 황무지 같은 그곳에서 명지도자로 꽃을 피우기도 했습니다. 그해 벌어진 제6회 SAF 대회에서 알토란 같은 금메달 하나를 비롯해, 은메달 3개, 동메달 5개를 획득해 세상을 놀라게 했죠. 당시 플라이급 금메달리스트인 모자멜 하키는 방글라데시에서 국민적인 영웅이 됐다고 합니다. 대한복싱협회 요직에 있는 정재규 씨가 방글라데시를 다녀온 후 “한국의 히딩크처럼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이용선 씨를 잊지 못한다”고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용선 씨가 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죠.

유제두와 그의 동생, 유제형

이미지중앙

체육관에서 관원을 지도하는 있는 유제두 관장.


또 다른 형제 복서로는 WBA J.미들급 세계챔피언을 지낸 유제두(1946년생 고흥농고-인천체대)와 유제형(1958년생 남산공전) 형제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국민적 영웅이었던 유제두는 맨주먹으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세계 정상에 등극한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학창시절부터 육상과 태권도, 축구 등에서 두각을 나타낸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그는 1966년 2월 혈혈단신 상경해 마포 제일체육관(관장 이영환)에서 복싱을 시작했죠. 이듬해 서울신인대회에 웰터급으로 출전했지만 2회전에서 탈락했고, 곧이어 벌어진 전국신인대회에서는 첫 판에 탈락하는 등 성장통을 많이 겪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경기에 나가 그 유명한 성의경배 대회에서 준우승을 함으로써 이름 석 자를 세인들에게 각인시켰고, 그해 벌어진 전국체육대회에서도 결승까지 진출하는 등 발군의 실력을 서서히 발휘했습니다. 그리고 1968년 멕시코올림픽 최종선발전까지 진출, 해군 소속의 이민호(전 서울체고 체육교사)에게 판정으로 패했지만 국가대표급 실력을 인정받습니다. 그해 마지막 대회인 전국체전에서도 다시 은메달에 머물자 그는 곧바로 프로행을 택했습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프로에서 유제두는 6전 전승을 올리고 7전째에 당시 동양 웰터급 타이틀을 목전에 둔 베테랑이자, 최초의 세계 챔피언 김기수씨의 중학교 동창인 임병모(1938년생)의 전초전 파트너로 낙점됐습니다. 1969년 8월에 대결했는데 7라운드에 경기를 포기함으로써 프로데뷔 첫 패배를 기록했습니다. 유제두는 이 쓰라린 아픔을 딛고 더욱 더 성숙해진 복서로 거듭 태어났다는 점에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도 3번 정도는 실패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좌절이 없는 큰 성공은 없는 법이죠. 그후 유제두는 무려 6년 6개월 동안 36차례 경기를 치르지만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습니다. 34승 2무 24KO. 36전 무패 기록은 나중에 유명우가 36연승을 올리면서 타이기록을 세웠습니다. 유명우의 기록도 대단하지만 승패를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중량급에서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단 한차례도 패하지 않고 승승장구를 거듭할수 있었던 것은 수도승 같은 절제된 생활과 철저한 자기 관리가 밑바탕됐기에 가능했습니다. 참고로 1971년 9월 유제두가 1966년 방콕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인 이금택과 동양타이틀 1차 방어전을 벌일 때 받은 파이트 머니가 100만 원이었는데 당시 그 돈이면 마포에 18평짜리 강변 아파트를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요즘 복싱 현실과 비교 생각하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유제두가 위대한 복서인 이유

이미지중앙

건국 이래 3번째 세계 챔피언에 등극한 유제두.


1976년 2월 17일 유제두는 와지마 고이찌에게 WBA J.미들급 벨트를 2차방어에 실패하면서 긴 연승가도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하지만 1977년 8월 24전 21승(20KO) 2패 1무를 기록 중이던 뮌헨 올림픽대표 출신의 강타자 임재근(1950년생 충북 청원)과 라이벌전을 펼쳐 회심의 어퍼컷으로 7라운드 KO승을 거두며 화려하게 부활했죠. 이어 1978년 12월 박종팔을 1라운드 KO로 꺾으며 일취월장 솟아오르는 강흥원이라는 복서를 상대로 군말 없는 판정승을 거둘 때까지 또 한 번 신화를 썼습니다. 즉, 동양 미들급 타이틀 21차 방어의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남기고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없어 링과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종신전적 55전 50승 29KO 2무 3패.

한 가지 꼭 집고 넘어갈 이야기도 있습니다. 세계챔피언을 향해 진격하던 1970년 4월, 한국 타이틀매치를 앞둔 유제두는 군입대를 하게 돼 선수생활에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죠. 그런데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복싱광이었던 윤필용 장군이 때마침 한국복싱의 최고 히트상품이었던 페더급의 강타자 허버트 강을 중심으로 수도경비사령부 복싱부을 창설합니다. 유제두는 우여곡절 끝에 중구 필동에 있는 수경사 복싱부 일원으로 스카우트됐고 그후로 운동에만 전념하면서 감춰진 잠재력이 폭발합니다. 군생활이 연전연승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입니다. 유제두는 수경사 복싱부가 창설되지 않았다면 국내 챔피언도 힘들었을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 작금의 암울한 복싱 현실과 맞물려 수도경비사령부 복싱부와 같은 팀이 부활했으면 어떨지 복싱인의 한 사람으로 기대해봅니다.

유제두 씨는 현역에서 은퇴한 후 오직 한길만 걸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1983년 구로구 독산동에 태양체육관을 열어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할 정도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습니다. IBF 주니어밴텀급 챔피언 장태일(1963년생 담양)를 비롯해, 동양 웰터급 타이틀을 12차례 방어했던 ‘동양의 쿠에바스’ 박정오(1967년생 화순), OPBF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장영순(1971년생 천안), OPBF 플라이급 챔피언 차남훈(1971년생 강진), OPBF 주니어라이트급 챔피언 김성윤(1961년생 영광), OPBF 플라이급 챔피언 정선용(1965년생 파주) 등 굵직한 챔피언들을 배출했습니다. 또 주니어웰터급과 밴텀급에서 각각 한국챔피언에 오른 송성운과 나치오, 그리고 페더급 강타자인 최응산, 김오남,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의 송유남, 정경배(이상 수원대) 등 많은 명복서들을 길러냈습니다. 현재 KBF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정선용은 ‘자신의 스승은 언제나 정도를 걷는 분’이라고 회고했습니다.

부럽기만 한 '용감한 형제'

이미지중앙

경기 중 동생 유제형의 세컨을 보는 유제두.


유제두 관장은 4형제 중 장남이고, 막내인 유제형도 형님의 명성에 가려서 그렇지 높은 수준의 기량을 가진 복서였습니다. 그는 1958년 고흥 출신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 형님이 운영하던 마포의 유덕체육관에서 복싱을 수련했고, 1975년 전국신인대회 웰터급 준결승에서 영산포상고의 황충재를 꺾는 대이변을 연출했죠. 이듬해 복싱 사관학교인 남산공전에 입학하여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당시 한국체대의 천갑수를 제압하는 등 정상급 선수로 성장했습니다. 유제형의 남산공전 동기는 후에 IBF 주니어페더급 챔피언에 등극하는 김지원(수경사-경희대)과 국가대표 출신의 장윤호(한국체대-영등포 체육관)가 있는데, 이 트리오카는 전국을 제패한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유제형은 졸업 말년에 억울하게 판정으로 패하는 일이 잦아지자 1978년 12월 신인왕전으로 프로에 데뷔(웰터급), 신인왕에 등극했고 이후 8연승(5KO)을 거두면서 한국 웰터급 챔피언에 등극했습니다. 9전째 복병 황준석(동아 체육관)에게 좌초당해 벨트를 풀었지만 이후 기록적인 13연속 KO퍼레이드를 연출합니다. 그때 싸웠던 복서들이 서영섭, 장종배, 장병인, 정상도, 김재훈 등 국내 정상급 복서들이었으니 유제형이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복싱을 구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제형은 1985년 4월 너무나 높은 벽에 부딪혔습니다. 당시 동양 주니어미들급 챔피언은 같은 고흥 출신의 2년 후배로 기록적인 26연속 KO승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백인철이었죠. 이 타이틀에 도전한 유제형은 실력의 편차를 느끼며 안타깝게 중도에 경기를 포기하고 맙니다. 이 경기를 기점으로 그는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34전 29승(24KO) 5패의 전적을 남기고 말입니다.

유제형 씨는 현재 부천시 소사동에서 태양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는 관장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형제 관장인 것이죠. 유제두 관장은 2남 1녀를, 유제형 관장은 1남 1녀를 모두 보기 드물게 명문대학을 졸업시킬 정도로 자식 농사도 참 잘 지었습니다. 복싱후배로 상당히 자랑스럽습니다. 유제형의 아내 분은 현재 일산에 모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으로 재직 중이랍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
          연재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