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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산책] LA 올림픽 선발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마라톤과 복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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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홍성민 관장, 이거성 회장, 전 마라토너 이홍렬 씨.



며칠전 SM체육관의 홍성민 관장이 명절 즈음해 인사 차 저를 방문했습니다. 마침 지난 달 서대문에 새로 체육관을 오픈한 풍산프로모션의 이거성 회장의 호출이 있어 함께 갔지요. 그런데 뜻밖에 예전에 알고지내던 마라토너 이홍렬 선배가 와 있어 기쁨이 배가 됐습니다. 이 회장과 이홍렬은 경희대학교 선후배 관계였습니다. 이홍렬 선배를 보니 우리 복싱과 마라톤이 비슷한 함수 관계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나라 프로복싱은 2006년 12월 17일 지인진이 로돌포 로페즈와 WBC 페더급 타이틀매치를 벌여 투타임 챔피언에 등극한 이래 10년이 되도록 세계챔피언이 탄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악의 암흑기죠. 그런데 마라톤도 그랬습니다. 1974년 동아마라톤에서 문흥주가 2시간 16분 15초 기록으로 우승한 이래 1980년대 들어와서도 기록경신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세계기록은 알베르토 살라자르의 2시간 8분 13초 기록이었고, 뉴질랜드의 엘리슨 로라는 여자선수는 2시간 26분대의 최고기록을 보유했죠. 당시 국내언론이 ‘한국 남자 마라톤은 세계 기록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여자 기록과는 거리가 좁혀지고 있다’라고 논평했던 것이 기억 납니다. 참고로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 참가한 김양곤의 기록은 2시간 22분 21초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코오롱의 고 이동찬 회장은 어느날 정봉수 감독을 만나 마라톤 10분 기록을 깨는 선수에게 1억 원, 그리고 2시간 15분의 벽을 깨는 선수에게는 5,000만 원을 지급한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고교생들이 참가하는 구간 마라톤 대회를 창설하였습니다(이 구간 마라톤에서 명륜고 학생인 황영조가 주목을 받았죠). 바로 이 당근작전이 주효해서 1984년 제55회 동아 마라톤에서 이홍렬이 2시간 14분 59초 기록으로 우승을 하면서 5,000만 원의 상금을 획득했고, 1992년 일본 벳푸마라톤에서 황영조가 2시간 8분 47초로 10분벽을 돌파하면서 1억 원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그 뒤 김완기 이봉주 김이용 지영준 등 새로운 건각들이 앞다투어 나타나 마라톤 활성화에 꽃을 피웠습니다. 우리 복싱도 마라톤의 역사를 본받아 대대적인 투자로 중흥의 계기를 마련했으면 합니다.

뜨거웠던 LA 올림픽 선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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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옥과 일전을 벌이는 신창석(오른쪽).



오늘은 1984년 LA 올림픽 복싱 선발전의 숨어있는 비화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우리나라 복싱은 1972년 뮌헨 올림픽과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치욕적인 노메달에 그쳤고,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불참했죠. 그러니 8년 만에 맞이하는 LA 올림픽 선발전은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더 힘들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그리하여 LF 김광선, F 허영모, B 문성길, FE 신창석, L 진행범, LW 김동길, W 안영수, LM 안달호, M 신준섭 등이 각 체급에서 우승, LA행 티켓을 확보했습니다. 대표선수들은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가서 휴식을 취했고, 하나둘 복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복귀한 선수들 중 페더급에 신창석과 라이트급의 진행범은 재평가전을 치러야 한다는 집행부의 결정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침통한 심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인천 출신의 심판장인 김영배씨가 같은 동향의 박형옥을 선발시키기 위해 ‘못된’ 애향심을 발휘하였고, 한경기만 시키면 지탄을 받을 경우가 생기기에 끼워넣기 식으로 라이트급까지 재평가전을 시키는 편법을 썼던 것이었습니다. 신창석은 목포대의 권현규를, 진행범은 수원대의 김기택을 무난하게 판정으로 제압했기에 더욱 더 충격이 컸습니다.

냉정하게 따지면 문제가 있었던 것은 라이트미들급의 안달호(일우공영)-이해정(한국체대), 미들급의 신준섭(원광대)-장성호(목포대) 두 체급이었죠. 그런데 이 두 경기는 치러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막강한 파워를 지닌 심판장 김영배(1934년생 개성, 경희대 졸) 씨는 월남하여 인천에 정착해 뿌리를 내렸던 분이었죠. 1980년부터 10년 동안 심판장을 하면서 LA 올림픽과 1986년 리노 세계선수권의 주심으로 초청받을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했습니다. 이 분의 속내는 인천 광성공고 출신이자 경희대 동문인 박형옥을 다시 재평가전 대상자로 올려 신창석와 재평가전을 치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김영배 심판장의 시나리오대로 박형옥은 올림픽에 출전하게 됐죠.

사실 페더급의 일인자는 세계 주니어선수권자인 박기철(한국체대)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박기철은 광주체육관에서 훈련하다가 훈계를 받는 과정에서 손찌검을 당했던 모양입니다. 그만 욱하는 성격에 복싱 글러브를 벗고 말았죠. 여기에 최고 유망주인 박용운(부산 금성고)도 프로행을 선언하며 궤도권에서 이탈했고, 다크호스인 강성덕(경남대)도 부상으로 출전하지 않게 됐습니다. 그러자 무주공산이 된 페더급에 입성하기 위해 LW의 권현규도 무려 두체급을 내려 출전할 정도로 페더급은 난형난제의 선수들 간의 최대 각축장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진행범도 전칠성에게 재평가전에서 역시 1-4로 고배를 마시고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어찌보면 집행부에서 의도된대로 진행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1,2,3차 평가전이라는 진검 승부를 통해 당당하게 선발되었지만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인 권력자의 야심에 애꿎은 선수들만 희생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영배 씨는 오래전 필자가 아픈 곳(?)을 찌르며 이야기를 하자 “부질없는 일이었다”고 회고했한 바 있습니다. 우회적으로 당시의 잘못을 인정했던 것이었죠.

현재 신창석은 서대문 풍산체육관 본점에서 틈틈히 선수들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서대문은 이거성 회장이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에 입문할 때 다녔던 체육관이 있던 곳으로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심정으로 체육관을 차린 곳입니다. 신창석은 무려 5체급에 걸쳐서 태극마크를 달았고, 1981년도 뮌헨 세계선수권에 출전하기도 했습니다. 2007년에는 키르기스스탄에서 국가대표 감독을 역임할 정도로 지도력도 갖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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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시작한 풍산 프로모션의 트로이타 신창석-이거성-마방열(왼쪽부터).



승승장구했던 진행범의 복싱인생

오늘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진행범은 1961년 3월 9일 전남 무안 태생으로 1979년 사설 체육관으로 가장 많은 선수들을 배출했던 명문 광주체육관에 입관하여 꽃을 피웠던 복서였습니다. 광주체육관은 1970~80년대 한국복싱의 한 획을 그었던 굵직굵직한 복서들을 대량으로 배출했습니다. 최초의 세계대회 금메달리스트인 박기철을 비롯하여 김동길 김광섭 김종섭 이남의 유옥균 김광수 김광민 오영호 이현주 등 수많은 스타들이 거쳐갔죠.

진행범은 이듬해 영산포 상고에 진학하여 1981년도 제11회 대통령배대회 라이트급 결승에서 제주대표인 고희룡과 치열한 접전 끝에 판정승을 거두고 우승, 이름 석 자를 알렸고 1982년 초에는 당시 국가대표였던 목포대학의 권현규를 제압해 일대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1982년과 1983년 전국체전 2연패를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1983, 1985년에는 아시아 선수권대회 국가대표로 출전했죠. 1985년 대회에서는 금메달을 획득하며 아시아 정상에 올랐고, 그해 열린 제4회 월드컵 대회에도 국가대표로 출전했습니다. 앞서 1983년에는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최우수상을 비롯하여 아시아선수권, 한미 국가대표 대항전 등 국제 대회에서도 금메달을 따는 등 그야말로 일취월장 성장했습니다.

LA 올림픽 선발전에서 전칠성에게 패한 후 진행범은 당시 MBC의 윤재근 기자와 인터뷰를 했죠. 그리고 “집행부의 뜻이기 때문에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친구인 전칠성이 올림픽에 나가 좋은 성적을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진행범은 은퇴 후 석관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조련하여 김수영(원광대) 신수영(한국체대) 등 좋은 선수들을 많이 배출하였지만 1990년 복싱계와 완전히 인연을 끊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사업가로 탄탄한 반열에 올라선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은퇴 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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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리어 사업에 한창이던 진행범 사장의 모습.



진행범은 은퇴 후 동냥빚을 얻어 상계동 모 아파트 상가에 인테리어 사무실을 차리고, 거주할 집이 없자 천막으로 간이 숙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오토바이에 풀통과 벽지를 싣고 도배를 주업으로 삼아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이 발생했습니다. 둘째딸 은진이는 엄마 아빠가 오토바이 타고 일터로 떠날때 혼자 집에 있었죠. 그런데 천막주변에 쥐들이 많이 출몰하여 찐득이를 주변에 깔아놓았는데 은진이가 그만 그 찐득이를 가지고 장난치다가 얼굴에 붙어서 집에 돌아온 두 부부가 딸아이에 얼굴에 붙은 찐득이를 띄어 내면서 펑펑 울었다고 합니다.

부부는 앞만 보고 글자 그대로 부창부수(夫唱婦隨)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루는 구청에서 직원들이 와서 무허가 천막을 철거하라며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자 진행범은 하소연했다고 합니다. “내가 국가대표 복싱 선수로 그래도 한때 국위를 선양하고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던 사람인데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먹고 살려고 이렇게 버티고 있는데 나보고 나가서 죽으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내가 폭력세계로 들어가 험하게 살아가는 꼴을 보고싶습니까?”라고요. 이에 구청 직원은 감명을 받았는지 많이 봐줬다고 합니다. 진행범은 지금도 그 분의 따뜻한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진행범은 의정부의 4층짜리 반듯한 건물을 가지고 있고, 제주도에도 10억 원 상당의 상가 건물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분은 항상 초심을 잃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면서 1년에 건물 임대료 수익만 해도 억대가 넘는 안정된 사업가로 변신했습니다. 따뜻한 성품으로 선후배들이 찾아오면 지극정성으로 대접하고 있죠. 밑바닥에서 처절하게 시작하여 안정된 반석위에 올라설때까지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렸을까요.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선배 중 한 분입니다.

필자가 물었습니다. "형님 대신 출전하여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전칠성 선수가 당시 포상금만 5,000만 원에 달하는 거액을 획득했는데 귀국해서 소주라도 대접하지 않았어요?"라고요. “그런건 없었어. 하지만 그래도 칠성이는 내 친구야." 참 듣기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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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 강재희 씨와 진행범-조재민 부부.



현재 진행범은 풍광 좋은 제주도 모처에서 커피를 마시며 편안하게 앉아 바닷가를 바라보며 지난 날을 돌아볼 정도로 여유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날 부부와 두 딸은 엄동설한 속에 찬 서리를 맞으며 얼마나 슬픔의 눈물을 흘렸을까요. 하지만 추운 겨울에도 꼿꼿한 생명력을 지닌 설중매처럼 이들 가족은 아름답게 거듭 태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행범 선배의 삶이 많은 복싱인들에게 회자되어 귀감이 됐으면 합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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