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남화영의 골프장 人문학]이왈종과 제주 핀크스
이미지중앙

이왈종 화백은 2013년 서귀포에 왈종미술관을 만들었다. (사진=왈종미술관 제공)


이왈종(71) 화백이 1990년 서울의 추계예술대학 교수 직을 버리고 제주도로 홀연히 떠난 건 그의 나이 45세 때였다. 당시 미술계는 불황의 터널을 지나고 있어 주변에선 그의 행동에 대해 ‘안정된 좋은 직장을 버렸다’면서 ‘미쳤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정작 본인은 ‘5년간 그림만 마음껏 그리다 죽자’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제주도 남쪽 바다가 조망되는 서귀포시 정방폭포 옆에 지어진 하얀색 대문을 열고 내가 화백을 찾아간 건 2003년의 늦가을이었다. 온갖 꽃들이 하얀 색 단층집을 감싸고 있었다. 손수 심고 가꾼 꽃만 100종이 넘는다고 했다. 정원에 꽃나무가 많아서 찾아오는 새들도 많았다.

화가는 작업실 창문에 검은 새 두 마리를 그려놓았다. 투명한 창문에 멍청한 새가 날아와 부딪칠까 염려해서란다(황룡사 벽에 그린 소나무 그림에 새가 날아들다 머리를 깨고 떨어져 죽었다는 신라시대의 화가가 솔거였던가? 예나 지금이나 새의 아이큐는 그대로다). 작업실 위에 걸린 시계 안에도 그림이 들어앉아 있었다. 생활 자체가 예술이고, 그리는 것이 곧 일상이며 둘이 아니다. 그런 구분 자체를 두지 않는 것을 이 화백은 ‘중도(中道)’라 불렀다.

이미지중앙

2003년에 그의 집 창가에 그린 새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 화백.


화가의 아틀리에도 중도가 넘쳤다. 그림 그리는 책상 옆에 TV가 켜져 있고, 거기서 골프 방송이 백남준의 작품처럼 소리없이 화면만 흘러가고 있었다. 안방에는 혜원(蕙園) 신윤복의 미인도가 있는가 하면 한 켠에는 스윙을 위한 골프 동작이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혜원의 그림은 그가 본받고 싶은 치밀한 묘사 때문이고, 자신이 그린 골프 지침은 익숙해지고 싶은 정확한 스윙 동작 때문이란다.

화가가 골프와 인연을 맺은 건 골프장에 그림을 그려 주었는데, 답례로 골프세트를 선물받고나서부터다. 그러니 어떡할꼬? 들고 나가서 붓처럼 휘둘러야지. 그게 핀크스와 이왈종의 만남이었다.

이 화백의 집에서 20분이면 족히 닿는 핀크스 골프장에는 이 화백의 그림들이 갤러리를 이룬다. 벽을 채우고 있는 그림에서는 서울 생활을 떨치고 제주도에서 사는 자유분방이 느껴진다. 물고기 모양의 골프장 로고에서부터 오방색이 넘실대는 골프의 즐거움이 가득하다. 그림에서의 동심(童心)을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다. 하지만 필드에 가면 숨어 있던 동심이 삐죽빼죽 고개를 내민다.

이 화백이 그린 골프 그림에는 항상 골프 라운드 중에서 생기는 에피소드와 즐거운 스토리가 담겨 있다. 어느 골프장에는 물에 빠진 공을 골퍼가 클럽으로 건져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고, 어느 그림에선 캐디가 클럽 두세 자루를 들고 목빠져라 기다리는 골퍼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린에서는 선수마냥 라인을 쪼느라 정신없는 품새들을 보노라면 김홍도식 풍속화의 해학 마저 느껴진다.

울긋불긋한 캔버스 위로 볼이 데굴데굴 굴러간다. 한쪽에서는 알록달록 과일 나무가 있고, 한 귀퉁이에 배가 떠다니는가 하면, 부리와 눈이 큰 새가 웃으면서 날아간다. 노루는 팔짝 뛰어오른다. 이왈종 화백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한적한 오후, 그리고 따사로운 어린 날의 물장구치고 놀던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 마저 든다. 부리나케 클럽을 챙겨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진다. 핀크스가 개장하면서 이 화백의 그림 세계를 골프장으로 끌어들였고, 이 화백은 자신의 그림을 핀크스에서 풀어놓았다. 예술과 골프의 행복한 어울림이었다.

이미지중앙

클럽하우스 자동문 입구에 이 화백이 그린 골프장 로고.


핀크스와 이왈종의 어울림
1999년 개장한 제주도 핀크스 골프장은 기존의 골프장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토속적인 한국정감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서 주목받았다.

고베출신의 재일교포 도시락 사업가 김홍주 씨가 1990년대 초 60여만 평의 땅을 사들여 이중 38만 평에 핀크스를 만들었다. 일본에서 자라고 대학시절에 골프 선수이기도 했던 그는 ‘성공하면 고향 제주도에 뭔가 보람된 일을 하겠다’던 생각을 가졌고 그것이 골프장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와 만드는 코스라면 어떤 형상일까? 정지용의 시 ‘향수(鄕愁)’ 속에 나오는 이미지 아닐까? 유토피아 보다는 노스탤지어를 지향할 것 같다. 그래서 핀크스는 흔히 제주도 골프장에서 하던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코스에 이국적인 야자수 대신 억새와 보리를 심었고, 원래부터 있던 팽나무, 때죽나무를 그대로 보존했으며 목장에 놓여 있던 돌담을 손상시키지 않았다. 스타트 하우스는 초가집이 됐고, 코스 중간에 원두막을 세웠다.

이미지중앙

클럽하우스 프론트에 걸려 있던 이 화백의 벽화.


지금이야 골프 코스 안에 돌담이나 억새가 거슬리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그건 모험에 가까웠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외국 수종을 심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코스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한 코스들에 비해 핀크스가 돋보이는 이유였다. 그리고 예술을 넣었다.

세계적인 건축가 이타미 준의 포도호텔과 클럽하우스는 공간이 자연에 잘 융합된 성과물이다. 돌과 흙, 나무 소재를 질박하게 쓰는 그의 공간 연출은 예술적 경지로 승화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도예가 김미영은 클럽하우스 입구의 석조로 된 핀크스 메인 사인을 조각하고 제주도의 물 항아리 모양을 형상화한 티 마크를 창조해냈다. 대목장(大木匠) 박용훈은 클럽하우스 앞 조선마루와 코스 곳곳에 세운 원두막으로 바쁜 일상 속의 한가로운 일상을 만들어냈다.

화가 문봉선은 산방산이 보이는 곳에서 수묵화(88*520cm) ‘영주풍아(瀛州風雅)’를 그렸다. 핀크스를 보고 ‘무릉도원’을 연상했단다. 클럽하우스 앞을 흐르는 18번 홀 그린 옆 계곡을 보라. 폭포에서 떨어진 물이 돌 도랑을 지나 그린을 감싸고 흐른다. 일본의 정원 노하우와 한국의 조경 기술이 힘을 합친 결과다.

이미지중앙

핀크스 골프장에서 이왈종 화백은 욕망의 볼마크를 그려 치곤 했다.


핀크스는 값비싼 조각품과 그림들로 요란스레 치장하지 않고, 숨 쉬고 사용하는 일상의 예술을 골프장에 자연스럽게 치환시켜 놓았다. 코스 중에 초가집, 원두막, 보리밭, 돌담 등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제주도 억새와 때죽나무, 팽나무, 산딸나무를 비롯해 100여종의 제주 자생식물이 식재돼 있다.

핀크스는 이왈종 화백의 물고기 그림이 아이콘이다. 클럽하우스는 물론 메모지에서 성냥갑, 심지어 직원 넥타이에까지 이를 활용했다. 오거스타내셔널이 마스터즈를 통해 일상용품은 물론 골프 스타일까지 차별화 하듯, 핀크스 역시 핀크스만의 것을 독자적으로 추구했다.

핀크스 창업가는 이왈종 화백에게 이곳에서 마음껏 골프 치면서 예술작품을 만들라고 했고, 이 화백은 이 골프장 여기저기에 자신의 예술적 분신들을 뿌려놓았다. 선수가 라운드 나가기 전에 자신만의 볼마크를 그리듯 이 화백도 항상 그랬다. 그런데 골프공에는 남녀가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는 것만 그렸다. ‘골프공 자체가 욕망 덩어리이기 때문’이란다. 골프장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종종 코스 작업하다가 러프에서 이 화백의 로스트볼을 발견하곤 했다.

이미지중앙

이 화백은 드물게 골프장 직원에게 즉석에서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다.


핀크스는 이왈종이라는 예술가와 이타미 준이라는 걸출한 건축가와 다양한 예술가들이 고향이라는 테마로 만든 골프장이었다. 1999년 개장 이후 한국 골프장의 품격을 핀크스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2년 뒤에는 CJ그룹이 클럽나인브릿지를 인근에 개장하면서 글로벌 정책을 펼치지만, 2005년까지 국내에서 가장 좋은 골프장은 핀크스였다.

2000년대 후반까지는 현재 한솥도시락 체인 이영덕 대표가 골프장을 운영하면서 2005년에는 골프전문지 <골프다이제스트>가 선정하는 ‘미국 제외 세계 100대 코스’에 한국 최초로 72위까지 올려놨었다. 당시 이 대표는 ‘골프장 업계 출신이 아니라 아마추어들이 아이디어를 맞대서 최고의 골프장을 만들어 성공시킨 아마추어리즘의 승리’라고 평가했었다.

그 뒤로 국내 수많은 골프장들이 핀크스가 마련한 골프장의 모델을 차용하면서 이왈종, 이타미 준을 모셨다. 제주도 더클래식, 강릉의 샌드파인, 가평베네스트 등 그의 골프화 그림은 전국 방방곡곡 골프장으로 전파되었다. 이 화백이 ‘제주 생활의 중도’전을 2008년 가을 서울 강남의 갤러리현대에서 가졌다. 내가 찾아간 날 마침 국내 굴지의 대기업 사모님이 욕망의 덩어리를 그려낸 골프공 18개 세트를 1800만원에 구매했다(골프장에 취재갔을 때 ‘이 화백의 로스트볼을 너덧 개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던 코스 관리팀 김계장은 아마 뿌듯할 만하다).

이미지중앙

세계 100대 코스에 처음 올랐을 때 이 화백은 축화를 그리기도 했다.


예술가는 떠나고 대기업이 들어오다
2000년대 후반부터 골프장 사업 전반이 경영이 어려워지면서인지 어떤 연유가 있었는지 모르게 이 화백은 골프장을 찾지 않았다. 골프장 회원권 시장이 얼어붙은 2008년 전후로 골프장 옆 부지에 조성된 비오토피아 분양이 실패하면서 골프장 경영이 어려워졌고, 결국 2010년 9월에 SK그룹이 핀크스 골프장을 인수해 지금은 SK핀크스가 되었다.

물론 지금도 골프장 홈페이지에는 이왈종 화백의 그림이 테마로 뜨고 로고도 그대로 두고 있으나 대기업이 들어오고부터는 예전에 이 골프장이 가졌던 소박한 예술성과 질박하면서도 은은한 매력은 옅어진 듯하다. 몇 년 전 경영이 힘들었을 때 코스 곳곳에 세포아풀이 자라 페어웨이까지 뒤덮었던 코스는 올해면 양잔디로 교체작업이 완료되겠지만, 하드웨어 말고 소프트웨어가 사라진 듯한 허전함이 드는 건 사실이다.

푸른 바다를 누비는 물고기 바로 위에 나비(SK텔레콤 로고)가 앉은 어색함이랄까. 핀크스(Pinx)라는 이름은 ‘신의 서명’이라는 뜻의 라틴어다. 풀이하자면 ‘자연의 신이 만들어놓고 사인을 했다’는 의미인데 그 앞에 SK가 붙어있다.

이미지중앙

대기업 SK가 인수한 뒤에 나비 모양의 로고가 추가되었다. 밑으로는 이왈종 화백의 그림이다.


소박하던 클럽하우스는 그룹의 단체행사를 위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소연회장이 만들어지면서 이왈종룸, 로빈슨룸(코스 설계가인 데오도르 로빈슨), 이타미룸(클럽하우스 설계한 이타미 준)으로 이름만 쓰이고 있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예술가는 떠나 이름만 남아 있다.

지난 2013년 5월 31일 화백이 살던 정방폭포 근처에 왈종미술관이 세워졌다. 홈페이지(walartmuseum.or.kr)에 들어가 보면 설립 글이 구수하다.

‘서귀포에 그동안 내가 살던 집을 헐고 큰 작업실이 갖고 싶다는 생각에 도자기를 빚어 건물모형을 만들었다. 그게 어느덧 3년 전 일이다. 우연히 스위스 건축가 다비드 머큘로(David Maccuio)와 한만원 건축 설계사와 공동 작업을 하여 도면을 수정하기를 2년, 그리고 터를 파면서부터 나는 매일 건축 현장에서 함께 했다.처음엔 새들이 날아와 놀 곳 없어진 것이 아쉬웠지만 예전 뜰에 있던 나무들을 그대로 옮겨 심었으니 봄이 오면 새들도 기억하고서 찾아오지 않을까? 작업실 뿐 아니라 전시공간과 어린이 미술 교육실까지 마련하였으니 이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20여년 나에게 행복을 주었던 제주 서귀포에 작은 선물이 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내가 구수하다고 느낀 건 13년 전 그의 집으로 취재 갔을 때 새 날아가는 유리창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꽃과 나무를 심고 새들이 날아오길 기다렸고 그들을 소재로 그리고 조각하고 빚어냈다. 화가는 제주도로 내려가 살면서 주변의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그림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했는데 미술관에서도 이어가는 것도 고마운 일이다. 홈페이지에는 본인의 예술 세계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미지중앙

비오토피아에 걸려 있던 이 화백의 그림 시계. 공(9)만 남기고 나머지 숫자는 없다.


‘제주에 정착하여 20여년이 넘게 그동안 나는 <제주생활의 중도(中道)와 연기(緣起)>란 주제를 가지고 한결같이 그림을 그리면서 도대체 인간에게 행복과 불행한 삶은 어디서 오는가 만을 깊게 생각해왔다.
인간이란 세상에 태어나서 잠시 머물다 덧없이 지나가는 나그네란 생각도 해보았고 세상은 참으로 험난하고 고달픈 것이 인생이라는 것도 생각해 봤다. 살다보니 새로운 조건이 갖춰지면 새로운 것이 생겨나고 또 없어지는 자연과 인간의 모습들에서 연기라는 삶의 이치를 발견하고 중도와 더불어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하려고 하루도 쉬지 않고 그림 그리는 일에 내 인생을 걸었다. 사랑과 증오, 탐욕과 미움, 번뇌와 자유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 슬픔과 기쁨, 행복과 불행 모두가 다 마음에서 비롯됨을 그 누구나 알지만 말처럼 그렇게 마음을 비우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이러한 마음이 내재하는 한 행복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하면서 서서히 흰머리로 덮여가는 내 모습을 바라본다.
행복과 불행, 자유와 구속, 사랑과 고통, 외로움 등을 꽃과 새, 물고기, TV, 자동차, 동백꽃, 노루, 골프 등으로 표현하며 나는 오늘도 그림 속으로 빠지고 싶다.’

이미지중앙

제주 생활의 중도를 테마로 골프의 그림세계를 펼친 이 화백. (사진=왈종미술관 제공)


제주도 핀크스 골프장에 가면 클럽하우스 입구 카운터 벽에 코스 설계가인 데오도르 로빈슨의 사진이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덩그러니 걸려있었다. 그가 미국 코스설계협회장을 지낸 사람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게 늘 아쉬웠다. ‘왜 코스 설계가만?’하고 말이다. 그것이 클럽하우스를 설계한 이타미 준이나 이 골프장을 소재로 골프의 즐거움을 따뜻하고 해학적이고 밝게 펼쳐 보인 이왈종의 그림 세계가 묻히는 것이라면 좀 슬플 것 같기 때문이었다. 핀크스가 한국 골프장 업계에 기여한, 예술과 어울린 고품격 골프장으로서의 다양한 시도는 후자 쪽에 더 많다. [헤럴드스포츠=남화영 기자]
sports@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
          연재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