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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산책] 돈키호테 정신으로 세계를 정복한 박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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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BA 페더급 8차 방어의 대업을 이룩한 박영균.


미국의 존 록펠러라는 대부호는 석유사업을 통해 33세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53세에 억만장자가 됐습니다. 그러나 55세에 갑자기 불치병에 걸려 1년을 넘기지 못할것이라는 진단을 받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되죠. 그러던 어느날 병원에서 휠체어를 타고 산책하다가 벽에 붙은 성경구절을 보았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 되도다.' 피도 눈물도 없이 악착같이 돈을 벌던 록펠러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몇일 뒤 병원 로비에서 수술비가 없어 딸이 수술을 받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한 어머니를 보고, 록펠러는 곧바로 비서를 불러 소녀의 수술비를 대주도록 지시했습니다. 수술을 받은 소녀가 완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록펠러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기쁨과 희열을 느꼈습니다. 그 후부터 록펠러는 본격적으로 자선사업을 시작하면서 행복감을 느꼈고 그러는 사이 불치병도 완치되었고 98세까지 천수를 누렸습니다. 그는 마지막 임종 순간에 “내 인생의 전반기 55년은 쫒기듯이 살았지만 감사하게도 후반기 43년은 행복과 기쁨 속에 살았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베푸는 자에게는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도와준다는 성경 구절이 생각납니다.

짧은 아마, 긴 프로의 시작

오늘은 한국 복서로는 최초로 페더급을 정복한 ‘개척자(pionier)’ 박영균 선수편이 되겠습니다. 박영균은 1967년 전남 담양 출생으로 고등학교 2학년 때 광주 챔피언체육관에서 복싱을 시작한 평범한 복서였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85년 아마추어 주니어선수권 준결승에서 실업팀 선수에게 판정으로 패했지만 값진 동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당시 신승현 감독이 총괄하던 호남대학교에 특기생으로 진학하려고 했죠. 하지만 한 지인의 소개로 현대프로모션으로 발길을 돌려 이듬해 1986년 제16회 MBC 전국신인왕전에서 페더급 우승과 함께 감투상을 받으면서 박영균이라는 이름을 서서히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10연승을 거두고 한국 주니어페더급 타이틀에 도전한 박영균은 거인체육관의 박정우를 상대로 무승부를 기록하며 연승에 브레이크가 걸렸고, 11개월 후 최재원과의 한국 타이틀매치에서 첫 패를 기록하면서 성장통을 치렀습니다. 하지만 이내 박영덕, 김영만을 누르면서 주니어페더급과 페더급, 두 체급 국내챔피언을 지낸 박영균은 1990년 카이손(필리핀)과 동양 페더급 타이틀매치를 벌여 8라운드 KO로 아시아를 석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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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복싱 페더급의 개척자 박영균 챔프. 사진은 한창 때의 모습이다.


1991년 3월 30일 드디어 박영균은 꿈에 그리던 첫 세계타이틀 매치를 치릅니다. 당시 WBA 페더급 챔피언은 36전 31승 27KO 4무 1패를 기록 중인 안토니오 에스파라고사였습니다. 이 선수는 세계적인 복싱잡지 <링>지가 ‘파운드 포 파운드’(pound for pound, 체급 구분 없는 랭킹)에서 세계 5위에 올려놓을 정도로 ‘역대급 복서’였습니다. 그 동안 치렀던 7차례 방어전에서 5차례를 KO로 이길 정도로 하드펀처로 유명했죠. 단지 1959년생으로 박영균보다 8살이나 많은 게 흠이라면 흠이었습니다. 당시 박영균는 19전 17승(10KO) 1무 1패로 상대적으로 일천한 전적이었습니다.

박영균에게 언더독은 없다

박영균은 이 경기에서 ‘절대 열세’라는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활화산처럼 터지는 연타와 샘처럼 쉼없이 솟아나는 강철체력을 바탕으로 막강 챔피언을 12라운드 판정으로 무너뜨렸습니다. 대망의 세계 정상에 오른 것이죠. 박영균의 쾌거는 현대프로모션에게도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설립 이후 이삼중, 박찬목 두 명이 지명도전자로 두 차례 세계타이틀에 나서 연달아 실패했지만, 1991년 2월 WBA 미니멈급 타이틀매치에서 최희용이 챔피언 김봉준(88프로모션) 을 꺾고 첫 챔피언이 됐죠. 뒤이어 박영균이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던 승리를 따냈으니 그 겹경사의 기쁨은 욱일승천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당시 박영균의 매니저와 트레이너를 겸했던 김광수 관장이 앞선 두 차례의 실패를 딛고 쾌거를 이룩했다는 점입니다. 박영균도 말했습니다. “세계챔피언이라는 것은 절대로 선수 혼자 이룩할 수 없는 금자탑”이라고요. 김광수 관장의 지론은 ‘연습을 충분히 하지 않고 이기려고 한다면 자만심이지만, 연습을 충분히 하고 이기려고 덤빈다면 자신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훌륭한 트레이너는 잘 가르치는 게 아니라 링에서 복서가 자신감을 가지고 최대한 실력을 발휘하도록 의욕을 북돋아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한국복싱에서 손에 꼽을 만한 우수한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

박영균을 만든 김광수

김광수 관장은 박영균에게 시합을 앞두고 “상대가 강해봐야 얼마나 강하겠냐? 똑같은 체중에 똑같이 두 손으로 싸우는데 너가 질 이유가 하나도 없지 않느냐?”며 자신감과 배짱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렇게 박영균은 링위에 오르기 전 기선을 제압하는 멘탈 터프니스(mental toughness)로 중무장했기에 무한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겁니다. 또 이러한 강점은 그가 한국 복서에게는 처녀림인 페더급을 정복하고, 이후 이 타이틀을 8차까지 방어하는 대역사를 만든 원동력이 됐죠.

박영균이 1991년 9월 2차 방어전에서 상대했던 싸웠던 엘로이 로하스(베네수엘라)도 22전 전승 21KO를 기록한 강타자였습니다. 이중 무려 13차례가 3라운드 이전에 KO였을 정도였습니다. 별명이 ‘인간 지뢰’였죠. 또 1992년 8월 5차 방어전의 상대였던 지오반니 니에바스도 베네수엘라 국가대표 출신의 정상급복서였습니다. 6차방어전을 치렀던 ‘콜롬비아에서 온 검은 자객’ 에버 벨레뇨도 23연승 21KO를 기록한 하드펀처였습니다. 이들을 모두 박영균이 꺾은 것입니다. 흔히 복싱계에서는 겁먹은 복서를 ‘치킨하트(chicken heart)’라고 표현합니다. 박영균의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과감한 러싱이 세계적인 강타자들을 치킨하트로 전락시키는 대반전을 거푸 만들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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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전승 21KO의 강력한 도전자 로하스(오른쪽)를 맹폭하는 있는 박영균(1991년 2월 2차 방어전).


혹자는 박영균 권투를 ‘푸드웍이 없고 테크닉이 부족하다. 체력에만 의지하는 복싱’이라고 폄하하지만 앞서 설명한 세계적인 복서를 붕괴시키는 것은 도저히 체력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복싱 선진국인 중남미 최고 복서들을 농락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선수의 장점을 사전에 봉쇄하는 치밀한 전략과 전술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때문인지 김광수 트레이너는 후에 WBA 최우수 트레이너상을 획득하기도 했습니다.

필자가 선수층이 제일 두꺼운 페더급에서 롱런의 기틀을 닦은 업적을 칭찬하자 박영균은 “맹탕(?)들과 싸워서 이긴 방어전도 많다”면서 자신을 낮췄습니다. 아마 1차 방어전의 다케다 마스야키, 3차의 아사가와 세이지, 5차의 마스모도 고지 등을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약체 도전자라고 해도, 세계타이틀매치에 나설 정도면 다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도 칭찬을 겸손으로 응수하니 참 보기가 좋았습니다.

겸손한 챔프

박영균의 인품은 제가 만나본 선수 중 그야말로 ‘역대급’이었습니다. 참 영혼이 맑은 사람이죠. 겸손하고, 지도자 말에 순응하는 대표적인 복서였습니다. 마치 IBF 슈퍼플라이급 세계챔피언을 지낸 전주도의 재래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합니다.

박영균은 1993년 12월 엘로이 로하스와의 9차방어전 리턴매치에서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1-2로 판정패, 벨트를 풀었습니다. 2년 9개월 만에 무관으로 전락했는데 홈링이었기에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필자의 추측인데 아무래도 WBA 회장국인 베네수엘라 회장단의 입김이 판정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리고 박영균은 1995년 5월 숙명의 라이벌 엘로이 로하스와 3번째 경기를 치렀지만 멈춰선 기관차가 다시 달리기에는 힘겨웠는지, 예전과 같은 갓 잡은 생선과도 같은 생동감을 보이지 못하고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어 8년 5개월 동안 32전 28승 16KO 1무 3패의 전적을 남기고 링과 안녕을 고했습니다.

은퇴 후 박영균은 목동 14단지 28평 아파트에 살면서 여의도에 ‘세라도’라는 레스토랑을 지인과 동업으로 운영하는 등 안정된 생활을 했습니다. 장사도 한때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로 호황이었죠. 하지만 간담상조(肝膽相照)하는 동업자가 마각(馬脚)을 드러내면서, 세계 타이틀매치를 11차례나 치르면서 단 한 차례도 쓰러지지 않았던 ‘철권’ 박영균은 휘청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캘리포니아의 아름드리 거목이 벼락과 강한 폭우에도 굳건히 버텼지만, 기생하는 좀벌레에 의해 결국은 쓰러지는 것처럼 박영균은 내부의 지인에 의해 다운된 것입니다.

박영균의 새로운 도전과 신정훈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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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경연 관장, 박영균 챔프, 신정훈 관장.


그러나 박영균은 역시 박영균이었습니다. 2004년 모든 것을 정리하고 건설현장에 일꾼으로 뛰어들면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안정된 직장에 취직하면서 간호사로 근무하는 아내와 힘을 합쳐 다시 일어섰습니다. 얼마 전에는 신월동에 아파트를 새로이 장만했다고 합니다. 박영균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변함없이 함께해준 아내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중2, 중3 두 딸의 아버지인 박영균은 향후 체육관을 운영하여 후진 양성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다니던 직장을 휴직하고, 친형제처럼 지내는 신정훈(73년생 고흥) 관장의 당산동 삼성체육관에서 틈 나는 대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신정훈 관장은 삼성체육관의 원조인 허병훈 관장의 제자로 법대를 나와 고시원에서 행정고시를 준비하던 중 트레이너로 전업한 중견 복싱인입니다. 경북신인대회 우승과 전국신인대회 준우승의 경력이 있죠(여담이지만 신정훈 관장은 1995년 9월 프로데뷔전을 치렀는데 마침 상대선수 이름이 공교롭게도 동명이인인 신정훈이었습니다. 이 기록은 최초입니다). 아무튼 요즘처럼 힘든 복싱계에서 굳건히 버티고 있는 몇 안 되는 관장 중에 한 명이기도 합니다.

신 관장은 같은 서부권투모임의 선배인 IBF 미니 플라이급 챔피언 이경연(65년생 봉화) 관장이 얼마 전 15년의 사범생활을 청산하고 논현동에 본인의 이름을 딴 체육관을 오픈하자 기념으로 보약을 선물할 정도로 가슴이 따뜻합니다. 또 얼마전 김학구라는 복서가 오토바이 사고로 병상에 쓰러지자 50만 원을 쾌척하기도 했죠. 자신을 복싱으로 이끈 허병훈 관장에게는 해마다 명절 때는 꼭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린답니다. 이런 복싱인이 철권 박영균이 체육관을 설립할 때까지 자신의 체육관에서 트레이너로 틈틈히 지도할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줬다고 하니 기분이 좋습니다.

PS. 이번 KBF 신인왕전 슈퍼라이트급에 출전하는 신림동 윤석현복싱체육관의 김준영은 올해 25세로 특전사 출신입니다. 비록 프로데뷔전에서 1패를 기록했지만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합니다. 윤석현 관장은 현역시절 트레이닝할 때 무조건 쉐도우복싱 12라운드, 샌드백 12라운드, 그리고 곧바로 관악산으로 12km 로드웍을 뛴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런 저력으로 투타임 동양 웰터급 챔피언을 지냈죠. 이런 윤석현 관장은 김준영에게 농담으로 이렇게 말한답니다. “12.12 철칙을 잘 지키면 너 자신 내부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그대로 밀고 나가라.” 본인의 12.12 전법을 전수하는 겁니다. 자신도 38전을 싸우면서 12차례나 패했던 경력이 있다며 “패배라는 것은 자신을 단련시키는데 일조한 영양제”라고 덧붙이는데 저도 모르게 공감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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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사 출신의 제자 김준영을 지도하는 윤석현 관장(오른쪽).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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