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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 타타라타] 스포츠와 응팔유감 ‘서민과 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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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동화를 새롭게 쓴 '흑설공주 이야기'


# 저명한 여성학자 바버라 워커의 <흑설공주 이야기>(1권)는 남성중심문화와 외모지상주의 등 왜곡된 이데올로기를 웅변하는 동화를 비틀어버린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그림형제의 ‘개구리 왕자’는 ‘개구리 공주’로 재탄생했다. 주인공이 남자에서 여자로 바뀐 것은 목표가 페미니즘 확산인 까닭에 예측이 가능하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연못가에서 낚시하는 왕자를 사모하게 된 개구리가 어여쁜 공주로 변신해 꿈에 그리던 왕자와 결혼하지만, (인간의) 왕궁 생활이 맞지 않아 결국 다시 개구리로 변신하기 때문이다. 미에 기준이 없듯이, 행복의 기준도 다 다르다. 왕궁 생활보다 연못 개구리의 삶이 나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 ‘막장’으로 유명한 한국의 드라마는 모든 것을 ‘연애’로 승화한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 다음은 한때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한미일 드라마 차이’다. ‘미국의 의학드라마는 환자를 치료한다. 일본의 의학드라마는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그런데 한국의 의학드라마는 병원에서 치료도 하고, 연애를 한다.’ 범인을 잡는 수사드라마나, 법정드라마, SF물 모두 마찬가지란다. 여기에 출생의 비밀까지 더해지기도 한단다. 하기야 외계인과도 그토록 낭만적인 연애를 하니(<별에서 온 그대>) 한국드라마의 연애미학은 말 다했다.

# ‘응사앓이’도 안 했고, 먹고 살기에 바쁜 나이인 까닭에 8회쯤인가부터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을 접했고, 이내 본방사수파가 됐다. 연말연초 금토 저녁식사 후 온 가족이 모여앉아 TV를 보는 것은 그 자체로 ‘가정적’이어서 좋았다. 중학생에 딸아이를 통해 ‘어남류’, ‘어남택’, ‘어남동’, ‘갓정봉’, ‘팔줍(팔에서 주운)’ 등의 신조어도 알게 됐다. 엄청난 시청률에, 출연자들이 등장할 예정인 광고만 70개에 달한다는 보도까지 나오니 이쯤이면 제법 큰 성공이다.

# 응팔의 인기비결은 다양하다. 이에 대한 글이 넘쳐 난다. 한국 드라마의 키워드인 연애를 특유의 코드인 ‘남편 찾기’로 시청자들을 클라이맥스로 몰아간다. 빼어난 연출(원호매직), 섬세한 미장센, 가족이야기, 과거에 대한 향수 등이 큰 줄거리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응팔은 서민적이어서 다가가기 편했다. 크고 작은 일에 웃고 우는 쌍문동 골목 공동체에는 한국의 막장 드라마가 선호했던 신데렐라 코드, 재벌 2세, 출생의 비밀이 없었다. 진부한 ‘연애’마저도 서민적으로, 그러니까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법한 익숙한 방법으로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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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고백'으로 화제를 모은 정환의 고백 장면(응답하라 1988 18화). 사진=TV화면 캡처


# 그런데 지난 주, 시청률이 최고치를 기록한 17, 18화를 보고는 열정이 싹 식어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불편하던 차에 중학생 딸아이가 “치, 응답하라 시리즈는 주인공들이 다 잘 돼,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전액장학생으로 명문의대에 들어가고, 가볍게 사관생도(공군사관학교)가 돼. 공부를 못했던 둘도 각각 선망의 직업인 스튜어디스와 고깃집을 하잖아. 그게 다 쉬운 일인가?”라고 말했을 때였다. 반박하기 힘들었다. 그저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좋은 얘기인데 뭘 그리 삐딱하게 반응하냐’고 한마디 하려다 참아버렸다. 결국 우리가 열광하던 서민 주인공들이 교회이름으로 익숙한 ‘선민’이 됐다는 것을 반박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많은 시간이 흐른 17화 뒷 부분부터는 ‘어남류 vs 어남택’의 로맨스는 훨씬 강해졌지만, 서민은 ‘ㄴ’가 하나 보태져 ‘선민’이 된 것이다.

# 성공이란 말은 행복처럼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를 기준으로 삼는 무리를 범하면, 우리 주변에는 사실 성공한 사람보다는 실패한 사람, 못난 사람이 더 많다. 주위를 둘러보자. 부모는 먹고 살기 바쁘고, 어르신들은 건강에 고민이 많다. 아이들은 공부에, 청년은 취직에 내몰린다. 아등바등 살기 바쁘다. 우리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는 세상에서 살 수밖에 없다. 응팔의 골목길은 이런 우리네 모습과 닮아서 좋았다(복권으로 인생이 확 바뀌고, 수십 년에 한 번 나올 법한 천재기사가 동네친구인 것 2가지만 예외). 그런데 주인공인 아이들은 너무 잘 됐다. 샘이 난다. 그리고 쉽게 동의하기가 어렵다. 금수저 흙수저 논란에, ‘노오력’은 철자까지 수모를 당하는 세상이니 더욱 그렇다.

# 스포츠, 그것도 우리가 쉽게 접하는 인기 프로스포츠야말로 성공한 사람들의 스토리가 판을 치는 무대이다. 승자의 논리가 지배적인, 가장 대표적인 영역이다. 가끔 패자가 다뤄지기도 하지만 승자에 비하면 설렁탕의 후춧가루 수준이다. 팬들이 대기록은 줄줄 외고 다녀도 최다 패전투수, 최다실점 골키퍼 등은 기억되지 않는다. 예컨대 2002년 4강신화는 알아도,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고(故) 홍덕영이 한 대회 최다실점(16골)을 기록한 것은 ‘양념’으로 치부된다. 성공한 사람들의 얘기는 차고 넘친다. 스포츠로만 부족한가? 개인들이 SNS에 올리는 인생 콘텐츠를 봐도 세상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사랑받는 서민드라마도 꼭 마무리는 ‘신분상승’으로 덧칠을 해야 할까? 좀 반(反) 스포츠적이면 안 되나?오늘은 응팔하는 날이다. 어남택의 한 사람으로, 어남류의 딸과 마지막까지 ‘응팔’을 본방사수하겠지만 이 점은유감이다. 개구리 공주 같은 선택도 있지 않은가? [헤럴드스포츠=유병철 편집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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