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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프의 50가지 비밀 10> 역사: 브리티시 르네상스(1860~1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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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의 아버지로 불리는 톰 모리스.


톰 모리스에서 위대한 3인방까지

톰 모리스(골프의 아버지라 불린다)는 새벽녘에 잠이 깼다. 3시간 뒤에 시작할 골프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채비를 서둘렀다. 그는 남들보다 먼저 대회장에 도착해 퍼팅 연습을 하는 노력파였다. 오늘 대회에서는 우승이 지상 과제였다.

1860년 10월17일. 세계 최초의 골프대회인 ‘제 1회 브리티시오픈(세상에 유일한 오픈이란 뜻에서 디(The)오픈으로도 불렀다)’이 열리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스코틀랜드에서 뿌리내린 지 400년도 더 지난 19세기 중엽에야 비로소 공식적으로 개최되는 골프 대회였다.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딘버러에서 남서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에이셔(Ayshire)의 12홀 링크스 프레스트윅(Prestwick) 골프장이 대회장이었다.

톰 모리스는 이 코스를 설계하고 관리하며 클럽 프로로도 일하고 있어 홈 경기의 이점을 가진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한 해 전에 세상을 떠난 스승 알렌 로버트슨의 계승자로 여겼다. 페더리 볼 제조업자였던 알렌은 공식적인 세계 최초의 프로 골퍼이자 세인트앤드루스 골프장 관리 책임자로서 골프 실력에 관한 한 그를 대적할 자가 없어 ‘골프의 신’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모리스는 10세에 골프를 접했으나 14세에 알렌의 볼 공장에 조수로 취직하면서 골프와 본격 인연을 맺었다. 나이가 들어서 프레스트윅 골프장에서 프로로 지내며 잔디 관리, 골프장 설계 등 골프 전반을 익힌 뒤에 알렌 사후 세인트앤드루스 골프장 책임자로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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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부자와 경쟁했던 윌리 팍.


1860년 브리티시오픈에서 톰 모리스의 최대 라이벌은 윌리 팍(Willie Park)이었다. 윌리는 알렌 로버트슨이 살아있을 때 스승과 여러 차례 격돌했던 고수였다. 따라서 모리스는 스승의 명예를 걸고 윌리와 대적했다. 당시 스코틀랜드 골프계는 프로들의 등장으로 마치 춘추전국시대의 군웅할거(群雄割據) 양상이었다.

수많은 매치 플레이가 펼쳐졌는데 대표적인 경기 방식이 4명이 겨루는 매치 플레이로, 도전자가 결투를 신청하면 승부를 보는 것이 관례였다. 모리스 부자 2인조와 팍 부자가 포섬으로 경기를 하는 등 2인 1조의 경기가 주로 치러졌다. 첫 회 브리티시오픈 참가 선수는 8명에 불과했지만 당대 최고의 골퍼들이 출전하는 대회였다.

첫날은 오전 9시에 시작됐다. 매 12홀씩 3일에 걸쳐 치르는 스트로크 플레이였는데 당시로는 놀랄만한 인파인 1만여 명이 넘는 갤러리가 모였다. 첫날 윌리 팍은 55타, 톰 모리스는 58타를 쳤고 둘째날은 둘 다 59타, 마지막 날 윌리가 60타, 모리스는 59타를 쳐, 합계 174타로 윌리가 2타차로 우승했다.

우승자인 윌리 팍에게 붉은색 가죽 띠에 은색 버클이 장식된 챔피언 벨트가 수여됐다. 홈 그라운드에서의 첫 대회에서 참패를 당한 톰 모리스는 절치부심했다. 41세 때인 이듬해(61년) 우승한 데 이어 2연패했다. 62년 우승 때의 2위와 차수 차이는 13타차로 이후 2000년 타이거 우즈가 US오픈에서 15타차 승리를 할 때까지 138년이나 유지되었다.

이후 모리스는 ‘당대 최고의 골퍼’라는 명성에 걸맞게 1864년과 1867년에 우승을 추가해 총 4회 우승이라는 업적을 남겼다. 물론 윌리 팍도 4차례 우승하면서 모리스에 뒤지지 않는 신화를 만들었다. 팍과 모리스 가문의 골프 전쟁은 아들 대에도 계속됐고, 모리스의 아들인 영 모리스는 1868, 69, 70년을 3연패를 해 붉은 챔피언 벨트를 영구 소유하게 됐다. 윌리의 아들인 윌리 주니어도 역시 두 번의 우승을 했고, 동생인 멍고 팍도 우승하는 등 초창기 브리티시오픈은 이들 양 가문이 우승을 분할했다.

톰 모리스를 평가하자면 그는 코스 현대화에 생애를 바친 근대 골프의 아버지다. 오늘날처럼 9홀과 18홀을 클럽하우스로 연결하는 코스를 디자인했다. 인근에 숱한 코스를 설계하고 심지어 잉글랜드까지 진출했다. 19세기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에서 한 라운드 80타를 깬 선수는 스승 알렌과 톰 모리스뿐이었고, 87세인 어느 날 세인트앤드루스 클럽하우스에서 쓰러지는 것으로 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뒤 오늘날까지 그곳에 묻혀 후대의 골퍼를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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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삼인방’인 존 헨리 테일러(왼쪽), 제임스 브레이드(가운데), 스윙을 하는 골퍼가 해리 바든.


영국의 위대한 3인방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골프는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스포츠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프로 골퍼들이 배출되었다. 프로는 대개 클럽과 볼 제조업자들, 그리고 캐디 출신이었다. 프로가 나오면서 팬이라는 개념도 생기게 됐다.

초창기 팍과 모리스 가문이 다져놓은 발판을 딛고서 영국의 ‘위대한 3인방(The Great Triumvirate)’이 부상했다. 3인방이란 존 헨리 테일러(John Henry Taylor), 해리 바든(Harry Varden), 제임스 블레어드(James Braid)이다. 이들은 1894년부터 1차 세계대전 전인 1914년까지 21년 동안 무려 16차례의 우승을 번갈아 거뒀다. 17세의 나이로 프로에 데뷔한 존 테일러가 가장 먼저 주목받았다. 존은 당시의 내로라하는 선수들에게 대결장을 보내 한 명씩 정복하더니 1894, 95년 브리티시오픈에서 2연패했다.

약관 20세의 해리 바든이 1893년 디오픈에 처음 출전했을 때 선두와 22타차라는 엄청난 졸전을 벌였고, 몇 년 동안 그는 팬들에게 잊혀진 존재였다. 3년 뒤인 1896년 오픈에서 3연패를 노리던 최고 선수 존 테일러를 물리치면서 유명세를 탔다. 테일러는 “나를 망신 준 유일한 골퍼가 해리 바든”이라고 회고했다. 이후 바든은 1898, 99년, 1903, 11, 14년 등 5차례나 우승을 거둬 생애 총 6번의 우승으로 세계 최고의 선수로 명성을 떨쳤다.

그의 스윙은 특이했다. 테일러는 바든의 스윙을 다음처럼 회고했다. ‘볼을 칠 때 사려깊은 포즈로 너무도 쉬운 스윙을 한다. 고요하게, 아무런 힘의 느낌도 없이, 눈에 거슬리는 동작이 한 순간도 없이, 마치 세상을 이해하고 관대한 아량을 베푸는 것처럼, 자신이 위대한 골퍼라는 자만심은 전혀 없으면서, 무의식의 세계로 가는 듯한 스윙이다.’

바든이 사용한 그립 법은 100년이 넘은 21세기 현재까지도 쓰인다. 왼손 검지와 오른손 새끼 손가락을 끼우는 인터로킹 그립이 아닌, 왼손 검지위에 오른손 새끼 손가락을 올려 놓는 오버래핑(Overlaping) 그립이 바로 ‘해리 바든 그립’이다. 바든은 미국으로 건너가 살며 골프의 미국 전파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제임스 브레이드는 185cm 장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장타가 일품이었다. 해리 바든과 같은 해 태어났으나 프로 데뷔는 30살이 되어서 했다. 목공소에 조수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틈틈히 배운 골프 실력이었지만, 그 역시 타고난 천부적 재능을 살려 1901년부터 5차례 디오픈 타이틀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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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 시기의 골프 클럽 제조공장.


산업혁명이 가져온 골프의 세계화
‘산업혁명’이라는 기계화로 인한 골프 장비의 대량 생산은 골프의 세계화에도 한 몫 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린 영국이 만들어 놓은 세계 각국의 식민지는 골프장 건설의 무대였다. 빅토리아 왕조였던 당시 전 세계 4분의 1이 영국령이었으니 세계 도처에 골프장이 건설될 수밖에 없었다.

철도도 골프의 세계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1842년에 인도에 로얄 봄베이(Royal Bombay)GC가 영국 이외 지역에서 생겨난 첫 번째 코스다. 이후 아르헨티나, 브라질(1850년대) 등 남미에서부터 캐나다 몬트리올(1870년대) 등 아메리카 대륙까지 코스가 들어섰다. 호주의 로얄 멜버른GC와 뉴질랜드는 물론, 남아프리카공화국(1885년 로얄 케이프 클럽)에도 골프장이 만들어졌다. 아프리카 짐바브웨에는 1895년에 이미 10여 곳의 골프장이 들어섰다.

아시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1888년부터 3년여 동안 태국, 홍콩, 일본, 말레이시아 등지에 골프장이 지어졌다. 한국은 기록에 남은 최초의 코스는 1920년 효창원에 세워진 9홀 코스다.

19세기 후반 들어 골프는 영국에서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전파되었다. 근대 골프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해리 바든이 양 국을 드나들면서 골프 외교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으며 제임스 브레이드와 존 테일러는 1916년의 미국프로골프협회(USPGA)의 탄생에 일조했다. 골프는 이제 역사적인 대륙 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 영국의 골프는 1894년 미국골프협회(USGA)가 생기기 전까지 디딤돌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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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세인트 앤드루스의 10월 월례회 골프.


사라질 뻔한 세인트 앤드루스
1840년대 스코틀랜드에서 골프장이 모두 사라질 뻔 했던 위기도 있었다. 원인은 1789년 프랑스에서 발발한 ‘프랑스혁명’ 때문이었다. 1790년대를 지나 1830년 정도까지 50여년 동안 치솟는 인플레로 농민의 불만은 커졌고, 세인트앤드루스까지 불안의 징조가 전해졌다.

에딘버러에 나폴레옹을 숭배하는 계층이 생겨났는데, 그들은 귀족들이 골프하는 것을 곱게 바라보지 않았다. 상류층들은 클럽을 숨기면서 집안으로 숨어들었고, 수백년 동안 이어져 온 코스들은 ‘개발’이라는 명분에 밀려 밀가루 농장 등으로 개간되었다. 한때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리스, 글래스고우, 킹스반스 등 유서깊은 골프장 등이 파산했다.

세인트앤드루스 코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변 땅을 사들인 개발업자는 골프를 싫어했고, 급기야 땅을 갈아엎을 요량이었다. 그러자 골프 회원들이 뜻을 모아 에딘버러 법원에 제소했다. “골프의 역사인 올드 코스를 밀밭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세인트앤드루스만큼은 영국의 자존심입니다.” 지리한 법정 공방으로 이어지던 논쟁은 1848년 구타페르카 고무볼 발명이 변수가 되었다. 대량 생산되는 볼이 시중에 나오면서 골프 비용이 대폭 내려가자 법원도 결국 세인트앤드루스를 유지하도록 판결을 내렸다. 자칫 농지로 개간될 뻔 했던 올드 코스는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이인세(골프 앤티크 전문가, 남양주골프박물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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