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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산책] 황철순을 다섯 차례나 꺾은 '원조 꽃미남 복서' - 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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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꽃미남 복서 박인규.



오래전 읽었던 고대 국가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 나라엔 좋은 밭이 없었다고 합니다. 밭을 갈아봐야 수확이 충분치 못해 그 나라 백성들은 늘 배고프고 굶주렸습니다. 가구수는 3만호에 달했지만 먹을 것이 부족하니 소식하는 것이 풍습이 되어버렸죠. 또한 큰 산과 계곡은 많지만 벌판과 호수가 없으며 산과 골짜기를 따라 계곡물을 마시면서 허기를 달랬던 민족이었습니다. 결국 이 나라가 그 무서운 헝그리 정신을 무기로 대륙의 곡창지대(요동)를 장악합니다. 바로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나오는 고구려에 대한 설명입니다. 뭔가 우리의 복싱 현실과 상통하는 내용인 듯해 몇 자 적었습니다.

오늘 소개할 복서는 ‘밴텀급 황금세대’에 속했고, 국가대표로 황철순의 최고 라이벌로 불렸던 박인규입니다. 그는 1956년 전남 화순 태생으로 부친 박중섭 씨의 7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과거 많은 복서들이 그러했듯이, 귀공자 같은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넉넉치 못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어렸을 때부터 운동신경만큼은 천부적이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해 그 유명한 복싱 사관학교인 남산공전(현 리라공고)에 1972년 입학했고, 그 해 서울신인대회에 플라이급으로 우승하면서 싹수를 인정 받았습니다.

복싱명가 남산공전-동신체육관 출신

남산공전은 그 유명한 김현치 동아체육관 회장을 필두로 이창길 김창석 최재호(하리케인 최) 황철순 차상준 김지원 이창환 등을 배출한 복싱 명문이었습니다. 박인규가 속한 체육관은 동신체육관으로 홍수환 염동균 고생근 등 당대 최고의 복서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이들의 매니저는 김주식이었으며, 대표사범은 건국 후 최초의 복싱 메달리스트인 한수안 씨였습니다. 박인규와 동문수학한 복서로는 박찬희 김정철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라성 같은 선배들과 잦은 스파링을 하면서 박인규의 기량은 일취월장했습니다.

잠깐 앞서 나가자면 후에 프로복싱 활성화를 위해 숱한 라이벌전이 열렸던 것을 팬들은 기억할 것입니다. 라이트급 4강전이 열렸는데 그 4인방은 김태호 오영호 이이다노 김광민이었습니다. 또 주니어페더급에서도 4강전이 기획되었다고 합니다. 염동균 홍수환 정순현 박인규, 이렇게 4명이 주인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경기는 기획만 되었고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세 선수 모두 박인규와 수많은 스파링을 경험했기에 그의 높은 기량으로 인해 알게 모르게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박인규는 이듬해인 1973년 대통령배 본선 플라이급 경기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했고, 만장일치로 최우수복서로 선정됐습니다. 이때부터 박인규의 아버지는 모든 것을 팽개치고 아들의 복싱에 희망을 걸고 전폭적인 지원에 나섭니다. 그 무렵 유명했던 ‘바지바람 4인방’ 중에 한 분이 바로 박인규의 부친이었습니다. 나머지 세 분은 최충일 김창석 황철순의 부친이었죠.

홍수환이 꼽은 최고의 복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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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텀급의 양웅인 문성길과 박인규, 그리고 필자(왼쪽부터).



홍수환은 현역 생활하면서 가장 뛰어난 복서로, 첫 손가락에 박인규를 꼽기도 했습니다. 홍수환의 설명에 따르면 박인규는 스피드와 파괴력을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동물적인 감각에, 동체시력까지 갖춘 보기드문 천재복서였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유창이라는 복싱평론가도 오래전 필자에게 다양한 테크닉을 갖춘, 못 때리는 펀치가 없는 완벽한 복서라고 박인규를 평가했습니다.

1973년 박인규는 대뜸 아시아선수권 대표선발전 플라이급에 출전했는데 여기서 그는 아마복싱 사상 최대의 이변을 목도했다고 합니다. 다름아닌 플라이급 8강전에서 1968년 멕시코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이자,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인 지용주(원주, 48년생)가 약관의 무명 하경주(54년생)에게 2라운드에 KO로 무너지는 광경이었습니다. 여담이지만 하경주는 프로 입문 후 24전 5승 5무 14패(10연패 포함)를 기록했는데 세계챔피언 김철호를 상대로 사실상 이긴 경기를 하고도 무승부를 기록했고, 당시 국내 간판이던 문명안 김영환을 꺽을 정도로 유독 강자에게 강한 복서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으로 원정을 가여 5승 1패를 기록 중인 다카스키 겐조를 꺾기도 했죠. 대한민국에서 가장 종잡을 수 없는 복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하경주를 박인규는 준결승에서 원사이드한 경기 끝에 제압했고, 결승에서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인 김충배에게 판정패했습니다. 이에 대해 박인규는 “정말 많은 것을 배운 한판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이어 1974년 아시아주니어선수권 선발전(플라이급)에서 당당하게 금메달을 획득했고, 1975년 킹스컵 대회에서도 당당히 박찬희 이거성 등과 함께 국가대표로 출전했습니다. 결승에서 소련 선수에게 아쉽게 2-3으로 판정패했지만 세계적인 수준의 기량을 마음껏 과시한 것입니다.

어이 없는 사고

박인규는 1974년 방콕아시안게임 밴텀급 국가대표였던 김창석을 두 차례에 걸쳐 제압했고, 그 중 한 차례는 K0로 장식할 정도로 막강한 원투 펀치를 뽐냈습니다(원로복싱인 민기훈 선생은 필자에게 “현역 시절 김창석은 쿠바의 아성에 맞설수 있는 실려을 갖춘 유일한 한국인”이라고 극찬을 했죠). 또한 1975년 아시아선수권 선발전 준결승에서 당대 최고의 복서인 황철순을 꺾는 기염을 토했고, 결승에서는 임병진마저 제압하며 부동의 국가대표로 올라섰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평생 따라다니는 불운의 서곡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1975년 5월 당시 <일간스포츠> 한 면을 장식했던 기사내용을 이 대목에서 소개해야만 합니다. 당시 대구 출신의 강희용이라는 플라이급 국가대표가 있었습니다. 이 선수는 박찬희를 제압할 정도로 실력이 출중하였는데 박찬희와의 관계가 매우 껄끄러웠던 모양입니다. 나이는 동갑이었는데 태릉선수촌에 먼저 입촌한 박찬희가 선배 대우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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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친한 후배 조성호 씨와 박인규(오른쪽).



이에 대구 바닥에서는 주먹으로 명성이 자자한 강희용도 굽히지 않았죠. 방송인 김흥국 씨의 유행어처럼 박찬희에게 자주 ‘들이댔던’ 것입니다. 어느날 박인규와 박찬희는 태릉에서 훈련을 마친 후 몰래 빠져나와 인근의 동네가게에서 놀고 있었죠. 두 사람은 강희용을 불러냈고 박인규는 몇 차례 손찌검을 하면서 혼을 냈습니다. 이에 강희용은 욱하는 마음에 병을 깨서 박인규에게 휘둘렀고, 그는 왼손으로 막는 과정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맙니다. 이때 박찬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람처럼 사라졌다고 합니다.

박인규는 부상으로 아시아선수권에 출전하지 못했고, 박찬희는 퇴촌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박인규는 이 부상으로 그 이후의 경기에서 스커드미사일처럼 터지는 KO펀치가 잘 나오지 않게 됩니다. 복서에게 왼손은 군대로 말하면 첨병 역할을 합니다. 곤충으로 말하면 더듬이 노릇을 하는 일종의 센서라고 할 수 있죠. 이 기능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으면서 공격 매듭이 끊어지곤 한 것입니다.

빨라도 너무 빠른 박인규

박인규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선발전에서 ‘영원한 맞수’ 황철순과 10여 차례 이상 공식 평가전을 벌였습니다. 승패를 주고 받았지만 최후의 승자는 황철순이었습니다. 황철순은 후에 박인규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나도 빠르지만 박인규는 더 빨랐다. 박인규에게 연타를 성공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로 주고받는 주먹이 너무 빨라 관중은 눈만 휘둥그레질 뿐이었다”라고.

두 사람은 남산공전 동기동창이었습니다.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듯이 둘은 링에 오르기 전 사소한 시비로 많은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맨주먹으로 치고받는 스트리트 파이팅을 할 정도로 뼛속까지 라이벌이었습니다.

올림픽 선발전이 끝나고 박인규는 1976년 10월 이안사노 씨를 매니저로 프로에 데뷔합니다. 그리고 10전째인 1978년도 4월 현 중앙체육관 관장인 박춘하를 꺽고 한국 밴텀급챔피언에 등극했습니다. 이어 그 해 6월 ‘일본 복싱의 미래’로 불리던, 그 유명한 무라다 에이지로(56년생)와 한일 밴텀급 최고의 복서끼리 명승부를 펼칩니다. 당시 무라다는 10전 전승 7KO였으며, 아마추어 시절 일본선수권을 세 체급에 걸쳐 무려 5차례나 석권할 정도로 부동의 국가대표였습니다. 무라다는 전설적인 복서 하라다 이후 맥이 끊겼던 일본의 밴텀급 세계챔피언이 될 기대주였습니다. 도쿄 고라쿠엔 체육관에서 열렸던 양 선수의 경기는 생중계로 전파를 탔는데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한 차례씩 다운을 주고받는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죠. 후반에는 박인규의 유효타가 더 많이 꽂혔습니다. 하지만 원정인 까닭에 결과는 무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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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다와 명승부를 펼치는 박인규(오른쪽).



경기 후 무라다는 자신이 패한 경기였다고 솔직하게 시인했으며, 일본 언론도 돈이 아깝지 않은, 세계타이틀 매치에 버금가는 명승부였다고 찬사를 늘어놓았습니다(무라다는 후에 1986년 루페 핀토르와 WBC 밴텀급 세계타이틀 매치를 치러 무승부를 기록했고, 그후 WBA 밴텀급 타이틀매치에서도 제프 챈들러와 다시 무승부를 기록하며 정상 등극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무관의 제왕’으로 불리곤 했습니다. 종신전적 29전 24승 18KO 3무 2패였고, 동시대 한국 밴텀급에서 내노라하는 김영식 문명안 이종수 오용환 박종철 오동열 등이 무라다와 맞붙어 전패를 당했고, 김영식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KO를 당할 정도로 막강했습니다). 일본의 세계적인 프로모터 아라시다는 박인규의 성장 가능성을 확신하고, 일본으로 스카우트를 하기로 결정합니다. 홍수환을 꺽고 세계챔피언이 된 리카르도 카르도나와 타이틀매치 가계약을 설정했고, 고지마라는 후원 회장은 박인규에게 귀화까지 권유했습니다.

무패로 링을 떠나다

그러나 잘 알려진 것처럼 세계타이틀 도전권은 MBC방송사 소속이던 정순현으로 넘어가고 맙니다. 박인규의 매니저 이안사노 씨는 차선책으로 멕시코로 가서 당시 WBC 밴텀급챔피언인 사라테와 타이틀전을 강행하자고 설득했지만 복싱에 대한 박인규의 애정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박인규는 몇 차례 경기를 더 치르고 15전 14승 1무의 전적을 남기고 링을 떠났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만 24살이었죠. 명목상으로 가수가 되기 위해 링을 떠난다고 했지만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만일 박인규가 아라시다라는 능력있는 프로모터 밑에서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며 선수생활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하겠지요. 문득 ‘코이’라는 열대어가 생각납니다. 이 열대어는 환경에 적응을 잘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작은 어항에 두면 15cm밖에 자라지 못하지만 큰 수족관이나 연못에서는 30cm까지, 강물에서는 120cm까지 큰다고 합니다. 이 열대어처럼 박인규도 좀 더 능력 있는 프로모터 밑에서 체계적으로 훈련했다면 복싱사에 훨씬 더 강렬한 이정표를 남겼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점이 무척 안타깝습니다.

얼마전 박인규에게 카르도나가 사망했다는 얘기를 전하자 그는 잠시 숙연한 표정을 짓더군요. 그리고 친구였던 이이다노와의 관계도 솔직 담백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그의 순탄치않은 가정사와 미국에서 타계한 이야기까지 조목조목 설명했을 뿐 아니라, 과거 이이다노가 훈련을 마치면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톱여가수 L씨가 꽃을 들고 체육관 앞에서 기다릴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고 말입니다. 이이다노와 박인규가 스파링을 하면 이이다노가 많이 얻어 맞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면 그의 부친이자 박인규의 매니저인 이안사노 씨가 바퀴벌레를 씹은 표정으로 애절하게 바라보던 모습도 떠오른다고 술회했습니다.

복싱 및 연예계의 마당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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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천세상조회의 이사로 재직중인 박인규 씨.



한때 박인규는 광진구 한강호텔의 인근에 고풍이 감도는 라이브 레스토랑을 오픈하면서 사업가로 재능을 보였지만, IMF 경제위기의 직격타를 맞고 많은 손실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사리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는 등 연예계와는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면서 폭넓은 인간관계를 이어오고 있죠. 유명한 산악인 허영호 씨를 비롯, 탤런트 김영철 씨, 가수 고 박상규 씨, 남성듀오 해바라기 등과 깊은 인연을 맺었죠. 물론 홍수환 박찬희 김태식 장정구 등과도 좋은 관계를 이루는 등 복싱계의 최대 마당발이기도 합니다. 원만한 성격의 박인규는 어느 누구와도 마찰을 빚지 않을 정도로 무난하게 사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박인규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TBC복싱 탄생 비화’도 알려주었습니다. 과거 국군체육부대 숙소가 구상모 씨와 친분이 있는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의 지원으로 설립되었듯이, 복싱을 좋아하던 이건희 삼성회장이 당시 오영호의 폭발력 있는 강타를 무척 선호했던 모양입니다. 이 회장이 오영호의 경기를 보기 위해 탄생한 것이 TBC복싱이랍니다. TBC복싱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지금은 ‘종편’이라는 이름 하에 JTBC가 있는데 복싱에는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박인규는 현재 장례업체인 천세상조회의 이사로 재직 중으로, 안정된 삶을 살고 있는 몇 안 되는 복싱인 중에 한 명이랍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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