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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프의 50가지 비밀]최초의 골프 캐디는 육군 사관생도
최초의 캐디는 언제 등장했을까?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 프랑스에 머물던 1559년 즈음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물론 메리 여왕 이전의 선대 왕이었던 할아버지 제임스 4세와 아버지 제임스 5세 역시 골프를 치면서 클럽을 들게 하는 하수인을 옆에 두었지만 그 때까지 ‘캐디’라는 말은 사용되지 않았다. 캐디의 어원을 메리 여왕의 시점으로 잡고 있는 것은 캐디와 유사한 단어가 그때 처음 사용됐기 때문이다.

메리가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있을 무렵 잉글랜드는 헨리 8세가 집권하고 있었다. 헨리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면서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스코틀랜드 왕실은 5살의 어린 나이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메리 여왕을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로 극비리에 탈출시켰다. 당시 스코틀랜드와 프랑스는 잉글랜드에 대적하기 위해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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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성 골퍼 메리 여왕과 오른쪽으로 볼과 클럽을 든 최초의 캐디들.


여왕의 경호도 했던 사관생도
그렇게 프랑스로 보내진 메리는 훌륭한 여왕의 자질을 갖추면서 성장했다. 17세의 한창 나이에는 프랑스의 왕세자인 프란시스 2세와 골프를 치면서 사랑을 키워나갔다. 그들 옆에는 경호 겸 골프 클럽을 들어주던 현역 프랑스 육군 사관생도들이 늘 함께 있었다. 프랑스어로 당시 이들을 ‘카데트(Cadet)’라 불렀다. 생도, 혹은 집안의 막내아들을 의미하는 프랑스 단어다.

이 어원이 백여 년 뒤인 17세기에는 스코틀랜드에서 부두 하역을 하는 일꾼이라는 의미에서 ‘캐디’로 불렸다. ‘에딘버러 골프 클럽의 프로였던 앤드루 딕슨은 어린 시절이었던 1681년 왕실과 귀족들의 전용 골프장인 5홀 짜리 리스코스에서 요크 백작의 클럽을 들고 다니는 캐디 생활을 했다’고 언급된 내용이 영국에서 공식적인 캐디라는 단어에 관한 최초의 문헌으로 알려져 있다. 옥스포드 사전은 1857년에 와서야 캐디를 ‘골프 클럽을 들고 다니는 사람’으로 정의했다.

19세기의 캐디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티 박스에서 골프채를 들고 볼의 방향을 봐주면서 골퍼들과 동행하는 워킹 캐디이고, 다른 하나는 페어웨이에 있으면서 볼이 떨어진 지점을 알려주거나 잃어버리는 볼을 찾아줘 원활한 진행을 돕는 포어 캐디였다. 당시의 볼은 값이 비싸고 귀한 페더리볼이어서 페어웨이에서 볼을 찾는 캐디의 역할이 훨씬 중요했다. 포어란 영어로 비포(Before), 즉 ‘앞에 있다(be + fore)’는 뜻이다. 골프 용어 중에 뒤에 있는 조에서 친 볼이 앞 조에게 맞을 것 같으면 ‘포-어’라고 외친다. 현대 한국 골퍼들은 ‘볼’이라고 소리치지만 바른 용어는 ‘포어’다.

영국에서는 앨런 로버트슨과 올드 톰 모리스, 그리고 디 오픈 최초의 우승자인 윌리 파크 등도 모두 캐디 출신이었다. 포어 캐디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밥 퍼거슨이다. 머슬버러 골프장 소속인 그는 홈구장에서 열린 디 오픈에서 1880년부터 3년 연속 우승을 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극히 일부지만 오늘날에도 미국의 일부 프라이빗 골프장엔 포어 캐디를 두는 곳도 있다.

그렇다면 최초로 미국에서 캐디 생활을 했던 사람의 이름은 존재할까? 애석하게도 기록이 없다. 골프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오던 19세기 말에 동시 다발적으로 미국 전역에서 골퍼들이 증가했음을 감안하면 수백, 수천의 캐디 중 누가 먼저인지를 규정짓는다는 사실 자체가 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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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미국 골퍼 위멧과 캐디 에디 로워리.


억만장자가 된 캐디 소년 로워리
다만 공식적으로 미국에서는 캐디라고 하면 1913년 US오픈에서의 에디 로워리라는 10살 소년을 떠올린다. 이 해에 열렸던 대회는 아마추어 골퍼의 최고봉이자 미국인의 우상으로 여겨지는 프란시스 위멧이 영국 골프의 우상인 해리 바든과 연장 맞대결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약관 20세의 아마추어 골퍼가 노장 영국 프로를 처음으로 이긴 흥미진진한 대결이었다. 그의 우승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소년이 바로 에디 로워리(Eddie Lowery)였다.

위멧의 백을 메고 낑낑거리며 따라다닌 로워리는 작은 체구에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볼품없던 꼬마였다. 게다가 그 캐디는 원래 캐디도 아니고 급하게 구한 대역이었다. 하지만 냉정하고 정확한 그린 읽기의 천재였던 로워리는 위멧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그린의 브레이크와 라이를 읽어주면 위멧은 그대로 퍼팅을 했고, 그 볼은 백발백중 홀에 빨려 들어갔다.

훗날 에디는 억만장자 사업가가 되었고 은퇴한 위멧은 로워리의 신세를 지면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위멧의 골프백을 들고 뒤따르던 10살짜리 꼬마 에디가 함께 걷는 사진은 두고두고 미국 골프사의 명작으로 남아있다.

흑인 캐디들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도 궁금하다. 19세기 말부터 미국으로 전해진 골프는 즐기는 이는 모두 백인이었고 캐디는 흑인 아동들이었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미국 골프의 초창기에 대부분 골프장은 여성과 흑인의 출입을 막았던 관계로 흑인들은 캐디로 채용될 수밖에 없었다. 10살 전후의 어린 백인 아이들도 캐디를 많이 했지만, 흑인 소년들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흑인 소년들은 목화밭이나 땅콩밭에서 노예처럼 농장 일을 하는 것보다는 캐디를 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알았다. 캐디는 농장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선망의 직업으로 인식됐다.

인종차별이 심했던 남부 조지아주에 만들어진 오거스타내셔널 골프장의 클리포드 로버츠 회장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모든 골퍼는 백인이고 모든 캐디는 흑인일 것’이라는 극단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훗날에는 흑인 캐디들이 양성되면서 흑인 골퍼들도 생겨났다. 미국에서 최초의 흑인 프로 캐디는 레이몬드 플로이드의 캐디를 했던 아돌포스 훌(Adolphos Hull)이다. 최초의 흑인 프로 골퍼는 1967년에 등장한 찰리 시포드(Charlie Sifford)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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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룬스필드 골프장에서 포즈를 취한 당대의 유명 캐디 윌리 건. 1839년 작품.


남자가 전쟁에 나가자 여성 캐디 선발
최초의 여성 캐디에 대한 기록은 있을까? 1918년 프란츠 리카비라는 캐디 출신의 작가가 쓴 골프서적 <여자 캐디>를 보면 자세한 묘사가 나온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남자들이 군대로 나가자 캐디들의 수급이 모자랐다. 전쟁 직후 먹고살기 힘들던 시절에 학교는 고사하고 단지 굶주림을 이기기 위해 캐디가 되려고 했다.

1913년 미시간의 샬러보어(Charlevoix)골프장에서 캐디 마스터를 하던 프란츠는 150명에서 80여명으로 줄어든 당시 골프장의 남자 캐디 부족을 충족키 위해 10대 여자들을 대상으로 캐디를 모집했다. 모두 14명이 응모를 했고 여러 주 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페어웨이 디봇을 정리하고 해저드에 들어간 볼을 찾았다. 샌드 샷이 끝나면 모래를 정리했고 그린도 보수했다. 그러면서도 복장은 타이트한 원피스에 높은 구두를 신었으며 벨트를 졸라맨 채 남성 골퍼들을 따라다니게 했다.

캐디 본연의 일에 충실은 했지만 골퍼들의 눈요기 감이라는 불평도 만만치 않았다. 훈련이 모두 끝나고 결국 3명 만 캐디가 되었으나 어쨌건 이들이 미국 최초의 여성 캐디로 기록되었다. 글 이인세(남양주 골프박물관장, 골프 엔티크 전문가)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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