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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산책] (10) 27년 만의 인터뷰, 허영모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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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리한 눈으로 한국의 복싱전설들을 평가하고 있는 허영모.


오늘 글은 평소보다 뜻깊은 내용인 까닭에 개인적으로 가슴 벅찬 감회 속에 한자한자 적어내려갑니다. 다름 아닌 1980년대 한국 아마복싱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허영모가 은퇴 이후 무려 27년 만에 가슴에 묻어두었던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헤럴드스포츠>를 통해 전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10월 1일 이 칼럼(다시 보는 문성길-허영모 라이벌전과 그리고...)을 통해 허영모를 소개했고, 이 글을 본 그가 만나자고 연락해왔습니다. 이에 지난 토요일(10월 31일) 필자는 여수로 내려가 허영모와 함께 인근의 조용한 선술집에서 2시간여 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그 동안 복싱계의 나타나지 않고 은둔생활을 했던 침묵의 변을 들었습니다. 그는 지면으로는 밝히기 어려운 애틋한 가족사를 비롯해 파란만장했던 선수생활의 소회 등을 처음으로 공개했습니다.

허영모는 1964년 7월 26일 순천시 왕지동에서 태어났는데, 이곳은 인근에 저수지가 있고 달동네처럼 몇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전형적인 빈민촌이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낸 허영모는 귀공자 같은 용모와 반듯한 성품과는 어울리지 않게 말못할 가족사의 애환과 암울한 사연 속에 성장했습니다. 이야기가 워낙 기구해 그가 학창시절을 하나하나 회고할 때 필자는 정말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지난 편에 소개한 황철순 못지 않게 유복한 환경 속에 자라난 듯한 외모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만화 같은 복싱입문

허영모가 복싱에 입문한 동기에는 한 편의 코미디 같은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후배들의 말에 의하면 허영모가 다니는 순천 이수중학교는 배구팀이 있었고, ‘배구선수 허영모’는 몸집은 크지 않았지만 몸동작이 빨랐고 리시브만큼은 최고라는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그런데 곧 역사적인 장면이 일어납니다. 허영모를 창문 너머로 유심히 바라보던 사람이 한 명 나타난 것이죠. 이발소를 운영하면서 인근 공터에 새끼줄로 링을 만들어놓고 복싱을 가르치는 분이었습니다. 이 분은 복싱을 전혀 배운 경험은 없는 분이었지만 나름대로 복싱 교본을 탐독하고 연구하면서 자기 스타일대로 체계화하고 완성시켰답니다. 지금도 복싱계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는 그 유명한 ‘순천 복싱의 선구자’ 김상모 관장입니다.

김 관장은 글자 그대로 책만 보고 복싱을 연구하면서, 복싱 삼매경에 빠진 분이었기 때문에 원리 원칙대로 복싱을 가르쳤습니다. 그러기에 순천 금당고 선수들은 기본기만큼은 타학교에 비해 ‘교과서’처럼 깔끔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김상모라는 분이 허영모 선수 하나만 키웠다면 운이 좋은 지도자라는 소리를 들을수 있겠지만 이분은 문성길을 세 차례나 제압했던 김창열(62년생, 광주복싱연맹 전무)을 비롯, 한국체대 출신인 성광배 박성춘, 그리고 경희대 출신의 김대준 등 좋은 선수들을 연달아 배출했습니다. 또 프로 신인왕 출신의 지말오 정을철 등 중견복서들도 다수 배출하며 신기원을 이룩했던 독특한 이력을 지닌 지도자였습니다. 처음에 새끼줄로 링을 만들어 맨땅에서 선수를 가르쳤지만 그후 창고에 미니링을 만들어 후학들을 쉼없이 배출했고, 급기야 허영모가 세계적인 복서로 발돋움할 때 대한체육회와 시체육회 등에서 각종 지원금이 쏟아지자 결국은 순천 도심으로 체육관을 이전해 그 유명한 ‘순천 맹호체육관’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집념의 지도자에게 이쁘장한 허영모가 배구하는 모습이 눈에 띄였으니 과정의 험난함은 차지하고 결과는 정해진 것이었습니다. 김 관장은 허영모에게 복싱을 권유하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가 삼고초려를 무려 7차례 이상 반복하는 열성 끝에 승낙을 받아냈습니다(허영모는 김 관장이 부친을 무려 20차례 이상을 만났다고 회고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김상모 관장(70세)의 혜안에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로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허영모에게 물었습니다. “복싱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주변 상황 때문에 운동한 것은 아니었냐?”고 말입니다. 그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사실 복싱을 하고 싶은 마음은 평소부터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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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금당고 재학시절의 허영모.


“아버지, 한 번만 등록금을 내주세요”


허영모가 처음 복싱에 입문했을 때 비슷한 또래의 이성칠(순천 금당고-호남대)이라는 선수가 있었는데 이 친구에게 근 1년 동안 스파링할 때마다 두들겨 맞았다고 합니다. 이때가 1978년 겨울 끝무렵이었고, 허영모는 당시 이수 중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후 각종 대회의 결승에서 이성칠과 네 차례 맞붙었어 모두 스트레이트 완봉승을 거둘 정도로 꼬마선수 허영모는 기량이 일취월장했습니다.

이듬해인 1980년 허영모는 당시 복싱 전문학교인 순천금당고에 입학했지만 첫달 등록금을 낼 수 없을 정도로 가정형편이 어려웠다고 합니다. 어린 허영모는 아버지에게 간절하게 읍소했습니다. "아버지 저에게 등록금 단 한 번만 내주십시요. 그 다음부터는 아버지에게 절대로 부탁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이 간청이 부친의 마음을 움직여 간신히 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절박한 심정으로 학교에 입학한 허영모는 당시 체중이 42kg도 채 나가지 않았지만 전국회장배대회 출전해 45kg급(코크급)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획득하며 전국무대에 이름 석 자를 알렸습니다. 그 덤으로 등록금까지 면제되는, 가장 현실적인 혜택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전국체전 45kg급에 전남대표로 출전해 승승장구했지만 결승에서 후에 WBC 스트로급 세계챔피언과 IBF 라이트플라이급 두 체급을 석권한 경북대표 최점환(63년생, 경주상고)에게 판정으로 무릎을 꿇으며 첫 패배를 기록했습니다. 참고로 허영모의 회고에 따르면 최점환의 아마추어 커리어도 좀 아쉽습니다. 최점환이 그 페이스를 그대로 유지했다면, 자신의 월장으로 무주공산이 된 라이트플라이급에서 김광선을 능가하는 복서로 자리매김했을 것이기 때문이죠. 최점환은 허영모에게 두 차례 연속으로 패하며 라이벌 구도가 사라졌고 더 이상 아마추어에서 빛을 발하지 못했습니다. 김광선은 허영모에게 세 차례나 연속으로 완패를 당했지만 결국은 88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정도로 진화했으니 참 대조적입니다.

천재복서의 질주와 좌절

다시 허영모 얘기로 돌아가면 천재복서에서 1패는 오히려 약이 되는 법입니다. 허영모는 그해 12월에 열린 국가대표선발전에서 한국체대의 박권순을 꺽고 약관 17세 나이에 국가대표로 발탁됩니다. 이후 복서 허영모의 활약은 지난 번에 자세히 소개했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단 하나, LA올림픽 때 허영모 의 숨은 비화만 덧붙이겠습니다.

올림픽을 앞두고 당시 대한아마추어복싱연맹이 기대한 메달리스트는 김광선(LF) 허영모(F) 문성길(B) 김동길(LW) 이렇게 4명이었습니다(하지만 결과는 신준섭[M]이 금메달, 안영수[W]가 은메달, 전칠성[L]이 동메달을 각각 획득). 이때 허영모의 컨디션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고 올림픽 금메달의 꿈도 무르익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LA로 출발하기 일주일 전 허영모는 박대호(동아대)와의 마지막 스파링을 하던 중 오른손목에 골절상을 입는 큰 부상을 당하고 맙니다. 업친데 덥친격으로 출발하기 3일 전 마지막 외박 때 당시 페더급 국가대표이자 절친이던 박형옥(경희대)과 가볍게 맥주 한 잔을 들이켰는데 그만 독감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미국으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담요를 뒤집어 쓰고 컨디션을 조절하는 해프닝을 벌였고, 도핑테스트때문에 약도 먹지 못하는 이중고를 겪었답니다. 그래도 8강까지 올라갔지만 터키 선수에게 판정패, 올림픽 메달의 꿈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허영모는 이 때부터 복싱에 대한 의욕이 많이 감퇴되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승부의 세계에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한 순간의 방심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일깨워주는 비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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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길과의 1차전에서 회심의 라이트 어퍼컷을 명중시키는 허영모.


복싱인보다는 교육자

허영모는 학창시절 말이 없고 조용한 성품이었으며 후배들에게도 따뜻하게 대해주는 선배였습니다. 그리고 아침 로드웍을 할 때는 다른 선수보다 훨씬 더 앞질러 갈 만큼 스피드와 지구력도 뛰어났습니다. 여기에 한 번 관장에게 잘못된 점을 지적 받으면 시골 논두렁을 뛰면서 ‘왜 안 됐을까’를 항상 고민하면서 한단계 한단계 자신의 기량을 향상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습니다. 이런 허영모에게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복싱계에 얼굴을 나타내지 않았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복싱에 대한 애환이 많아 복싱계 전면에 나타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허영모는 이렇게 말하며 세상의 추측은 천만의 말씀이라고 손을 가로저었습니다. 본인은 본래 꿈이 복싱으로 대학에 진학해 교사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현재 꿈을 이뤘고(허영모는 공채로 당당히 시험봐서 합격했습니다) 지금 현실에 만족하고 더 이상 욕심도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높은 명성과 화려한 플레이에 비해 원래 꿈이 소박한 사람이었던 것이죠. 굳이 한 가지 이유를 더하자면 그 유명한 문성길 선수와의 3연전이 끝나고, 문성길이라는 라이벌이 프로로 전향하자 목표를 상실해 더 이상 복싱을 하고 싶은 의욕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누가 뭐라든 그의 고백이 그렇습니다.

88년의 비화

여담이지만 88서울올림픽에서 허영모가 발탁되지 못한 숨겨진 이야기를 한 꺼풀씩 벗겨볼까 합니다. 사실 그때 문성길이 프로행을 선언하고 그 빈 공간을 차지하기 위한 난전이 벌어졌을때 최종선발전 밴텀급에 진입한 선수는 허영모(해태) 변정일(동국대) 서정수(홍익대) 김성길(한국체대), 이렇게 4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김성길이 턱부상으로 인해 중도하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3명이 삼각편대를 이루어 승패를 주고 받는 팽팽한 접전을 벌였죠. 여기서 집고 넘어갈 것은 김성길이 1986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배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1987년도 킹스컵과 세계 군인선수권에서도 우승했고, 특히 변정일과 두 차례 싸워 모두 무난한 판정승을 거둔 강타자라는 점입니다. 이 분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하는 이유는 문성길이라는 대선수가 빠져나간 상황에서도 그 후계자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질 정도로 당시 우리나라 아마복싱은 선수층이 두터웠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세 선수가 리그전을 벌인 결과 다같이 1승1패로 균형이 맞춰졌습니다. 허영모는 변정일을 제압했지만, 변정일은 서정수를 꺾었고, 서정수는 허영모를 누르는 기염을 토한 것이죠. 올림픽이 3개월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고, 마침내 88올림픽 평가위원회라는 조직이 ‘허영모가 최근 스피드가 떨어지고 쇠퇴기에 접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무대에 너무 알려져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석연찮은 이유를 들어 허영모를 탈락시키고 말았습니다.

이때 변정일의 트레이너이자 한국화약 코치였던 ‘복싱계의 손자병법’ 황철순이 일종의 대세론을 주장합니다. 명색이 김승연 회장이 총괄하는 한국 권투가 적어도 회장단 소속의 선수 하나쯤은 참가하는 것이 형평성(?)에 맞지않느냐는 명분론이었죠. 여기에 64년 도쿄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정신조 전무를 비롯한 이사회가 암묵적으로 동조하면서 허영모의 탈락이 결정됐습니다. 결국 서정수과 변정일이 최종 밴텀급 선발전을 치렀고, 변정일이 극적으로 승리하면서 올림픽출전권을 획득합니다.

경기가 끝나고 침울한 표정의 서정수는 모교인 홍익대의 총장 앞에 가 “죄송합니다”라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고, 총장은 “(서)정수야 오늘 이 시간 이후로 홍익대 복싱부는 완전 해체다”라는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이후 정말 홍익대 복싱부는 역사속에서 사라졌고 얼마 전 서정수 씨도 이러저러한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허영모 또한 결과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이형기 시인의 <낙화>라는 시구럼 그렇게 우리곁을 떠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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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 박현대(왼쪽) 씨와 허영모, 그리고 필자.


허영모가 본 한국의 복싱전설들


허영모에게 “만약 프로로 전향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라고 물었습니다. 허영모는 우선 아마추어 룰대로 싸운다면 장정구 유명우 박찬희 홍수환 등을 거론하며 이들을 모두 이길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이 부분은 필자도 대체로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면서 허영모는 프로룰로 맞붙는다면 결론적으로 장정구에게 최고점을 주었습니다. 허영모는 창조적이고 임기응변적인 복싱을 구사하는 장정구에게 ‘천부적’이라는 표현을 썼고, 복싱 지능지수가 가장 높다고 최고의 찬사를 보냈습니다. 자신을 예로 들어 3라운드까지는 그런 대로 버틸 수 있지만 그 이후로는 변화무쌍한 장정구 복싱에 고전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높은 평점을 받은 복서가 바로 박찬희였습니다. 자신이 반박자 빠른 연타 공격과 유연한 몸놀림 등을 지닌 박찬희와 가상대결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박빙의 호각세를 점쳤습니다. 그리고 유명우는 스타일상 상대하기 무난하다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솔직히 필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유명우가 상대했던 이오카와 조이 올리버, 두 선수의 경기 영상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이 두 선수는 허영모 선수처럼 비교적 큰 키에 스피드를 주무기로 원투 스트레이트를 뻗는 공통점이 있었고 이들과 3연전은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아슬아슬한 박빙의 승부였습니다. 허영모의 수읽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짐짓 놀란 것이죠.

홍수환이라는 복서와 그 예상평에 대해서는 허영모는 자신의 테크닉에 비해 홍수환의 복싱 기량이 좀 떨어진다며 그다지 후한 점수를 주진 않았습니다. 같이 맞붙어 싸우더라도 스피드나 체력 펀치 면에서 하나도 뒤질 게 없다고 자평했습니다(이 대목에서 황철순 같은 스타일의 복서가 가장 까다롭게 생각했던 복서가 허영모임을 상기됐습니다). 끝으로 문성길이라는 복서에 대해서는 체력과 펀치력만큼은 후한 점수를 줬지만 경기운영 능력이 단조롭기 때문에 장정구 박찬희에 비해 높은 평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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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는 박경철 관장(오른쪽)과 함께 포즈를 취한 허영모.


가슴이 따뜻한 ‘예술복싱’


허영모와의 만남에는 순천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는 박경철이라는 후배가 동행했습니다. 허영모의 직계후배인데 허영모의 조카가 박 관장의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관계로 따뜻하게 맞아줬습니다. 박 관장이 하늘 같은 허영모에게 “제가 체육관 할 때 선배님 이름을 달고 체육관을 운영하고 싶었는데 어려워서 말씀드리지 못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에 허영모는 “나는 내 이름이 그렇게 유명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볍게 내 이름을 걸고 체육관을 운영하는 것은 스스로 용납하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다만 “생활이 어려운 후배가 고육지책으로 체육관을 개관하여 생활고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내가 기꺼이 내 이름을 빌려주고 적극적으로 도와줄 용의가 있다”고 마음을 열었습니다.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박경철(75년생, 화랑체육관) 관장은 한국 밴텀급챔피언이자 OPBF밴텀급 1위까지 올라갔던 순천 출신의 유일한 프로복싱 밴텀급챔피언입니다. 괄괄하고, 대쪽 같은 성격으로 평소에 필자가 유심히 지켜보는 후배죠(언젠가 필자가 박 관장에게 자네와 같은 순천 사람이자 같은 순천 박씨인 사육신인 박팽년을 아느냐고 묻자 ‘사극에서 봐서 알고 있다’며 싱겁게 답하더군요).

세계 최대의 복서 전적사이트인 <복스렉>을 보면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기수 씨를 제외하면 올타임 한국 랭킹 1위는 장정구, 2위는 박찬희, 3위는 문성길, 4위는 홍수환, 5위는 유명우입니다. 이를 알 리가 없는 허영모가 자신을 빗대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정확하게 그 평가순위를 나열할 때 필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허영모는 세계적인 복싱 평론가 조 고이즈미 씨(일본)가 당대 최고의 아마복서라고 극찬을 했으며, 단지 실력에 비해서 운이 너무나 따르지 않는다고 한탄했을 정도로 예술 복싱을 구사했습니다. 특히 고이즈미 씨는 허영모의 연타 능력을 일본의 WBA 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이었던 도카시키 가스오보다 더 높게 평가했습니다.

소중한 시간을 함께 하면서 허영모의 참모습과 진솔한 내면을 읽을 수가 있어 이날 만남은 더없이 좋았습니다. 허영모는 언제 시간을 내서 서울에 한 번 올라오겠다는 약속도 했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 소중한 내용을 쏟아내준 허영모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세월이 많이 지난 만큼 자신의 젊음을 불태운 복싱에 좀 더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합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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