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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준석의 킥 더 무비 시즌2] (3) 스코틀랜드 하부 리그의 저력 - 글로리
<헤럴드스포츠>가 '이준석의 킥 더 무비' 시즌2를 연재합니다. 앞서 연재된 시즌1이 기존에 출판된 단행본 '킥 더 무비'를 재구성한 것이라면 시즌2는 새로운 작품을 대상으로 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영국의 이름 아래 우리를 가두지 말라.

축구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축구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실수하는 것 중 하나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간의 관계에 대한 부분입니다.

축구의 세계에서 스코틀랜드는 엄연히 독립국입니다. 축구 종주국의 특권으로, 영국(United Kingdom, 이하 UK)은 FIFA 주관 대회에서 4개의 축구 협회가 따로 출전권을 가집니다. 따라서 월드컵에 영국팀(UK national football team)은 없습니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그리고 북아일랜드 축구협회의 대표팀만이 존재하죠. 하지만 이런 기본적인 사실조차 모른 채, 잉글랜드 대표팀을 “영국팀”으로 부르는 방송인들이 가끔씩 있어 아쉽습니다.

그래도 2012 런던 올림픽에는 오랜만에 “영국팀”이 출전했습니다. FIFA가 주최하는 월드컵과 달리, IOC 주관의 올림픽에는 영국 4개 축구 협회의 독립성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 올림픽 축구에 출전하려면 4개 축구 협회가 힘을 합쳐 영국 단일팀으로 나와야 하죠.

하지만 우리와 일본의 관계만큼이나, 영연방을 구성하는 4 개 나라의 사이는 안 좋습니다. <브레이브 하트>에서 봤듯이, 역사적으로 치열한 전쟁을 펼쳐 온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그렇습니다. 또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의 투쟁으로 대표되듯 독립 문제로 시끄러운 잉글랜드와 북아일랜드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수 같은 잉글랜드와 단일화를 하느니, 차라리 올림픽에 안 나가고 말겠다는 게 스코틀랜드 및 북아일랜드의 강경한 기조죠.

하지만 올림픽의 초창기에는 영국 단일팀도 출전을 했고, 꽤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1904년 세인트루이스 대회부터 1972년 뮌헨 올림픽까지 영국 단일팀은 출전을 했고, 1900, 1908, 1912 올림픽에선 금메달도 땄죠. 그러나 뮌헨 올림픽 이후로는 앞서 말했던 이유로 올림픽에서 영국팀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2012 런던 올림픽에선 주최국이자 축구 종주국의 체면상 아예 출전을 포기할 수는 없었는지 다시 영국 단일팀이 구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 축구협회는 단일화를 추진하는 잉글랜드 협회에 강한 반발을 보이게 됩니다.
자존심 문제도 있지만 사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요즘 FIFA에서도 영국의 4개 협회 특권을 없애려는 움직임이 슬슬 불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올림픽 단일팀에 참여할 경우, 따로 인정을 받던 월드컵 출전권이 잉글랜드 협회의 주도 하에 하나로 줄 것을 우려했던 것이지요.

잉글랜드 협회에서는 타 축구 협회를 배려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의 태도는 강경했습니다. 단일팀 출전을 고려하는 선수들에게는, 만일 올림픽 단일팀에 출전할 경우, 향후 월드컵과 유럽컵 등에서 스코틀랜드나 북아일랜드 대표로 소집되지 못할 것이라는 압력이 가해졌죠.

결국 런던 올림픽 단일팀은 잉글랜드와 웨일즈 출신의 선수들로만 이루어졌습니다. 그마저도 웨일즈 선수들은 국가 연주 때 아예 입을 다물어 논란을 불러 일으켰죠. 잉글랜드의 국가이자 영국의 국가이기도 한, “신이여 여왕을 보호하소서(God Save the Queen)”의 4절 가사에는 스코틀랜드를 적군으로 규정한 소절까지 있을 정도니, 이들 4개 나라의 실타래는 좀처럼 풀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축구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도 스코틀랜드 내부에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알듯이 2014년에는 스코틀랜드 독립 투표까지 이루어졌지만, 결국 현실적 이유로 인해 간발의 차로 독립은 부결되었습니다.

그런데 궁금합니다. 이렇게 한 나라 아래서도 서로 물과 기름처럼 융합하지 못하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그렇다면 스코틀랜드 축구의 모습은 어떨까요? 마침 이를 잘 그린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글로리(A shot at glory)>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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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글로리'의 포스터.


어촌 마을 축구팀, 스코티쉬 컵에 도전하다!

21세기를 앞둔 1999년 경의 이야기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어느 어촌 마을인 킬노키(Kilnokie). 여느 스코틀랜드의 시골처럼, 추운 날씨와 우중충한 비가 끊이지 않고, 언덕과 들판에는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곳에는 마을 사람들의 자랑인 킬노키 축구팀이 있죠. 현재 2부 리그에서 활동 중인 이 팀의 감독은 고든(Gordon McCloed)입니다.

한 때는 스코틀랜드의 명문팀인 던디(Dundee Utd.)에서 뛰기도 했던 고든. 하지만 그는 지금 성적 부진으로 인해 미국인 구단주 피터(Peter Cameron)에게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구단주 피터는 올해에 특별한 성적을 내지 못하면, 팀을 아일랜드의 더블린(Dublin)으로 연고 이전 하겠다며 엄포를 놓습니다. 대신 비싼 돈을 주고 한 때 셀틱에서 뛰었던 공격수 재키(Jackie McQuillan)를 영입하죠.

하지만 고든은 재키가 못마땅합니다. 사실 재키는 고든의 사위입니다. 스코틀랜드 축구의 양대 산맥인 셀틱에서 뛰며 두 번이나 최우수 선수상(Golden Boot)을 받았지만, 다혈질 성격으로 인해 많은 문제도 일으켰죠.

가난한 2부 리그 구단에 스포츠카를 몰고 나타난 재키. 하지만 실력은 녹슬지 않았는지, 중요한 경기마다 결승골을 터뜨립니다. 재키의 활약에 힘입어 킬노키는 스코틀랜드의 FA컵에 해당하는 스코티쉬 컵 8강에 진출하죠.

하지만 중요한 8강전에서 재키는 사고를 칩니다. 역전골을 넣으며 승리를 견인하던 재키. 하지만 자신의 전담 마크맨이 아내, 그러니까 고든의 딸 욕을 하자 순간적으로 울화통이 치밀어 주먹을 휘두르고 퇴장을 당합니다. 고든은 재키에게 깊이 실망합니다.

그러나 재키는 이 사건을 계기로 성숙하게 됩니다. 그리고 셀틱 팬에게 쫓기던 레인저스 팬 꼬마를 구해주는 등 어른다운 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마음이 움직인 고든은 재키와의 마음의 거리를 좁힙니다. 그리고 킬노키는 마침내 스코티쉬 컵 결승전에 진출합니다.

드디어 스코티쉬 컵 결승전이 열립니다. 상대는 셀틱을 꺾은 강팀, 레인저스. 유서 깊은 햄든 파크(Hampden Park)에서의 경기 전날, 재키는 함정에 빠집니다. 킬노키 선수단이 묵는 호텔을 포위한 레인저스 팬들은 재키에게 시비를 걸고 결국 싸움이 붙습니다. 당장 결승이 내일인데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된 재키. 과연 재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킬노키는 사상 최초로 스코티쉬 컵 트로피를 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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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엠블럼.


스코틀랜드엔 올드 펌만 있는 게 아니다.


올드 펌(Old Firm). 스코틀랜드 최대 도시 글래스고를 연고로 하는 두 팀 레인저스와 셀틱의 더비 경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1980년대, 에버딘(Aberdeen FC)과 던디로 대표되는, 뉴 펌(New Firm)이 스코틀랜드 축구를 호령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스코틀랜드 리그와 컵 타이틀의 대부분은 레인저스와 셀틱이 쓸어가고 있죠.

하지만 이 영화, <글로리>를 통해 우리는 올드 펌만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스코틀랜드 축구를 구성하고 있는 탄탄한 하부리그의 모습을 통해, 억척스럽지만 전통이 흐르는 그들의 모습을 느끼게 되죠.

사실 영화 속의 킬노키는 실존하는 팀은 아닙니다. 하지만 킬노키를 제외한 모든 것은 다 진짜죠. 관중석에서 백파이프 연주에 맞춰 응원가를 부르는 마을 사람들, 타탄(tartan)이라 불리는 체크무늬가 수놓인 킬트(kilt)를 입은 서포터들의 모습이 독특합니다.

감독인 고든은 고집스럽지만 인간미가 넘치는 스코틀랜드 사람의 전형입니다. 칙칙하고 낡은 양복을 입고, 자전거를 타며 통근하는 고든. 그는 경기장을 신축하고 마케팅에 힘쓰려는 미국인 구단주 피터가 못마땅하죠. 보수적인 영국인들은 “도대체 옛날 것이 뭐가 나쁘다는 거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합니다.

그러나 미국인 피터 뿐만 아니라, 같은 스코틀랜드 사람인 재키의 눈에도 고든은 고집불통입니다. 고든은 곡식 창고에 선수들을 데리고 가 밀 포대를 짊어지고 체력훈련을 시킵니다. 게다가 원정팀 선수단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가, 어색해하는 상대팀 선수들과 굳이 악수를 나누죠. 셀틱 및 아스널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재키의 눈에, 고든의 행동은 양떼가 가로막고 있는 스코틀랜드 시골길만큼이나 답답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고든의 삶과 스코틀랜드 어촌의 풍경은 그 옛날 초창기 축구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사실 스코틀랜드 축구는 잉글랜드에 가려서 화려함은 덜합니다. 하지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죠.

스코틀랜드 축구 연맹은 잉글랜드 축구 협회에 이어 1873년에 창립되었으며,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되었습니다. 협회뿐만 아니라 문헌 상에서도 오랜 축구 역사를 자랑하죠. 이미 1424년에 축구로 인한 폭력과 혼란을 우려해 왕이 축구를 금지시켰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니까요(Football Act 1424).

영화의 주무대가 되는 스코티쉬 컵(Scottish Cup) 역시 오랜 역사를 자랑합니다. 비록 1873년에 창단되어, 잉글랜드 FA컵과 1년 차이로 전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 대회가 되지는 못했지만, 전국 단위로 이루어진 축구 대회로는 가장 오래되었다고 인정받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스코티쉬 컵은 스코틀랜드 최상위 리그인 스코티쉬 프리미어 리그(SPL) 12팀과, 하부 리그 30개 팀, 그리고 아마추어 리그 및 주니어 리그의 팀들까지 참가하는 대회입니다. 말 그대로 스코틀랜드의 최강팀을 가리는 대회이죠. 전경기 토너먼트로 진행되고, 준결승부터는 단판 승부입니다.

비록 킬노키 팀은 실제로 존재하진 않지만, 이 영화는 스코틀랜드의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 스코티쉬 컵을 통해 인생을 즐기고 정체성을 지키는 모습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미국인 구단주와의 대비를 통해,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하고 인간미 넘치는 그들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죠.

하프타임 때 상대방 감독의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는 낡은 스타디움, 비스킷을 구워 양 팀 라커룸에 넣어주는 고집불통 아줌마, 펍과 낚시터에서 킬노키의 경기를 듣는 노인들, 그리고 마치 우리 나라의 유치원 통학차량 같은 낡은 봉고차를 타고 원정을 다니는 킬노키의 선수들까지.

영화는 하부 리그를 즐기는 사람들을 통해, 오늘날 스코틀랜드의 축구 문화가 올드 펌 같은 유명 팀의 더비로만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서민들의 삶에 밀착되고, 전통 문화가 결합된 시골 축구팀들에 축구 문화의 진수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죠.

이처럼 그 나라 축구 문화의 뿌리는 풀뿌리 지역 축구에 있음을 알려준 영화, <글로리>였습니다.

덧붙여: 이 영화에서 전직 셀틱 선수인 재키 역을 맡은 배우, 알리 맥코이스트(Ally McCoist)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열렬한 레인저스의 팬이라고 합니다. 원수와도 같은 팀의 선수를 연기하는 게 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보니 올드 펌이 아닌 다른 축구팀의 이야기를 그렸다지만, 이 영화 곳곳에 “올드 펌”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건 어쩔 수 없군요.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니스트이며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헤럴드스포츠>에서 이준석의 킥 더 무비 시즌1(2014년 08월 ~ 2015년 08월)을 연재했고 이어서 시즌2를 연재 중이다. 시즌1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를 재구성했고, 시즌2는 책에 수록되지 않은 새로운 작품들을 담았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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