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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준석의 킥 더 무비 시즌2] (2) 축구 라이벌 간의 슬픈 사랑 - 로미오와 줄리엣
<헤럴드스포츠>가 '이준석의 킥 더 무비' 시즌2를 연재합니다. 앞서 연재된 시즌1이 기존에 출판된 단행본 '킥 더 무비'를 재구성한 것이라면 시즌2는 새로운 작품을 대상으로 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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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판 셰익스피어의 비극


예전에 우리는 브라질 축구 영화,<로미오와 줄리엣 결혼하다(O Casamento De Romeu E Julieta)>를 살펴보았습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이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인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입니다. 브라질 상파울루를 연고로 하는 코린티아스(SC Corinthians Paulista)의 남자팬과, 라이벌 팀 팔메이라스(SE Palmeiras)의 여성팬 사이의 사랑을 그렸죠. 두 팀 팬 사이에서는 사돈도 안 맺을 정도로 사이가 안 좋은데 사랑이라니, 정말 로미오와 줄리엣이 따로 없네요. 하지만 이 영화는 비참한 분위기의 원작과 달리, 브라질 특유의 낙천성이 개입된 유쾌한 코미디였습니다.

원수 집안간의 사랑이라는 소재는 너무나 극적이어서 여러 분야에서 리메이크되었고, 축구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브라질 영화 말고, 인도네시아에서도 로미오와 줄리엣을 소재로 한 축구 영화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분위기는 브라질 작품과 정반대입니다. 유쾌한 분위기의 브라질 영화와 달리, 인도네시아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은 인도네시아 축구계의 폭력성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비참한 분위기에서 자성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증오하는 팀,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

인도네시아 프로축구의 폭력 문제는 심각한 수준입니다. 라이벌 팀을 향한 공격과 집단 폭행, 심지어 살인까지 드물지 않게 일어납니다. 이런 인도네시아 리그에는 서로를 원수로 여기는 두 팀이 있습니다. 수도인 자카르타를 연고로 하는 페르시야 자카르타(Persija Jakarta,이하 페르시야)와, 반둥 지역의 페르십 반둥(PersibBandung, 이하 페르십)입니다. 두 팀은 서로에게 온갖 욕을 하며 증오합니다. 페르시야의 팬은 자카르타의 이름을 따서 잭(Jak, Jakmania)이라 불립니다. 페르십 팀의 팬들은 바이킹(Viking)이라 불리죠.

어느날 바이킹들이 수도 자카르타로 원정을 떠납니다. 하지만 매복하고 있던 잭들에게 기습을 당합니다. 양 팀의 훌리건들은 쇠못이 박힌 각목과 칼을 휘두르며 도로 한복판에서 난투극을 벌입니다. 그런데 이 난리통의 와중에 페르십의 여성 서포터 데시(Desi)와, 페르시야의 서포터 랑가(Rangga)의 눈이 마주칩니다. 첫 눈에 상대에게 반한 두 사람. 하지만 경찰이 들이닥치고 둘은 헤어집니다.

그러나 인연이 닿았는지 데시의 대학교 내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납니다. 전화 번호를 교환하고, 같이 데이트를 하면서 두 사람은 급속도로 친해집니다. 하지만 랑가의 친구들은 걱정스런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봅니다.

데시에게는 두 명의 오빠가 있습니다. 큰 오빠는 바이킹의 리더입니다. 그런데 둘째 오빠는 예전에 잭들에게 공격을 당해 한 쪽 청력을 잃은 상태입니다. 데시의 큰 오빠는 여느 페르십의 팬들처럼 페르시야의 잭들에게 증오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슬아슬한 연애를 이어가던 랑가와 데시. 하지만 원수지간인 두 팀의 서포터가 연애 중이라는 사실이 팬들 사이에 널리 퍼집니다. 이 때부터 두 사람의 고난은 시작됩니다.

페르시야 팀의 응원용품을 만들어 팔던 랑가. 하지만 페르시야 서포터들은 랑가를 배신자라고 부르며 불매운동에 들어갑니다. 랑가의 가게에는 돌이 날아오고, ‘배신자’라는 스프레이 낙서가 새겨집니다.

데시 역시 난처한 상황에 처합니다. 페르십 서포터 리더의 여동생이 불구대천의 원수 잭과 사귄다는 소문이 반둥 지역에 널리 퍼집니다. 난처해진 데시의 큰오빠는 헤어질 것을 강요합니다. 이와중에 데시를 만나러 온 랑가가 페르십 훌리건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합니다. 랑가와 데시는 자기편과 상대편 팬들 모두에게 미움 받는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사랑을 포기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은 랑가 친구들의 축복을 받으며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립니다. 하지만 결혼식날, 페르십의 훌리건들이 결혼식장을 급습하고, 랑가의 친구들은 큰 부상을 당합니다. 데시는 다시 오빠의 집에 갇히게 되죠.

결혼한 사이임에도 서로를 만나지 못하는 랑가와 데시. 바이킹과 잭 모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랑가는 아내인 데시를 만나기 위해 결단을 내립니다. 페르시야가 페르십으로 원정 경기를 떠다는 날, 랑가는 친구 몇 명과 함께 데시를 만나러 반둥 시내에 들어갑니다. 푸른 옷을 입은 수많은 바이킹 훌리건들이 각목과 칼을 들고 랑가를 쫓아옵니다. 피투성이가 된 랑가는 그의 아내 데시를 만날 수 있을까요? 대체 축구가 뭐길래 두 사람은 이렇게 슬픈 사랑을 해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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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혼돈. 그러나 만만치 않은 인도네시아 리그


사실 인도네시아 축구는 아시아의 강호는 아닙니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전통을 가지고 있죠.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이던 1930년대에 인도네시아 축구는 시작되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페르시야 팀은 1928년에, 페르십 반둥 팀은 1933년에 창단되었을 정도니 웬만한 유럽팀 저리 가라네요.

인도네시아는 오늘날 5부리그로 구성된 승강제 리그를 갖추고 있습니다. 리그 형태만보면 축구 선진국 못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많은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1부 리그는 사실상 두 개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IPL이라 불리는 인도네시아 프리미어 리그(Indonesia Premier League)입니다. 다른 하나는 ISL이라 불리는 인도네시아 슈퍼 리그(IndonesiaSuper League)죠. 2011년까지만 해도 ISL이 공인리그였고, IPL은 축구 협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비공인 리그였습니다. 하지만 2012년이 되면서 상황은 역전되었습니다. 축구협회장에 누가 앉느냐, 신임 회장이 어떤 리그와 더 이해 관계가 깊느냐에 따라 1부 리그가 IPL 혹은 ISL로 바뀐다고 합니다. FIFA나 아시아 축구 연맹도 두 리그 중에 어디를 진짜 1부 리그로 인정해야 할지 몰라서 두 리그가 합치기를 꾸준히 요구하고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이 영화의 두 팀, 페르시야와 페르십은 ISL에 소속되어있습니다.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인도네시아 축구 리그의 폭력은 심각할 정도입니다. 얼마 전인 2012년 5월에는, 영화 속의 두 팀 페르시야와 페르십의 경기도중에 난투극이 벌어져 3 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페르시야의 홈구장인 붕까르노(GELORA BUNG KARNO) 스타디움에서 8만관중이 가득찬 채 경기가 열리던 도중이었습니다. 희생자 중 한 명은 반둥에서 택시 운전을 하던 페르십의 팬이었는데 벽돌로 얼굴을 맞아 죽었다고 하더군요.

이 뿐만이 아닙니다. 같은 경기장에서 한 달 전에 열린 페르시야와 페르세바야(PersebayaSurabaya) 간의 경기에서도 난투극이 벌어졌고, 경찰이 쏜 최루가스를 피하다가 한 명의 팬이 압사당하는 일이 벌어졌죠.

이 영화의 마지막에는 1995년 이후 축구장에서 목숨을 잃은 9 명의 팬 이름이 나옵니다. 어떤 이들은 칼과 벽돌과 각목이 난무하는 이 영화의 잔인한 난투극이 극적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허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축구의 폭력을 접한 기사들을 보면, 이 영화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 랑가를 죽인 페르십 팬들을 향해, “이제 행복해? 행복하냐고?”라고 절규하는 데시의 모습은 인도네시아 축구의 어두운 단면이죠.

그래도 이 영화에는 비극적인 장면만 있는 건 아닙니다. 뚜렷한 정류장 없이 운행되는 봉고차 택시, 오토바이가 가득한 거리, 언어의 차이로 대표되는 자카르타와 반둥의 지역 감정, 북과 전통 악기를 동원해 흥겹게 펼쳐지는 응원, 그럼에도 유럽의 강성 서포터인 울트라스가 입는 것과 동일한 검은 색의 해골 문양 티셔츠 등, 인도네시아와 동남아 특유의 분위기가 축구 서포터 문화와 묘하게 결합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래서 축구는 참으로 세계적이고 지역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스포츠인가 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으로 이탈리아 베로나(Verona)의 두 가문이 화해했듯이, 인도네시아 축구팬들이 이 영화<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고 폭력을 몰아내기를 기대해 봅니다.

덧붙여 : 영화 속의 두 팀은 한국과도 인연을 갖고 있습니다. 페르시야에서는 2012년에 한국인 미드필더 정광식 선수가 뛰었습니다. 페르십 팀은 1995/96 아시아 클럽컵(현재 아시아챔피언스 리그의 전신)에 출전했고, 한국의 성남 일화와 맞대결을 펼쳤습니다. 물론 성남이 5:2로 대승을 거두긴 했지만요.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니스트이며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헤럴드스포츠>에서 이준석의 킥 더 무비 시즌1(2014년 08월 ~ 2015년 08월)을 연재했고 이어서 시즌2를 연재 중이다. 시즌1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를 재구성했고, 시즌2는 책에 수록되지 않은 새로운 작품들을 담았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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