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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니맨 두번째 이야기, 정면돌파] ② 뜻밖의 만남, 재기의 첫 계단으로 이끌다
‘야구선수’ 최익성의 인생은 참 파란만장했다. 남들보다 늦은 중학교 2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고, 모두가 흔히 말하는 야구명문고 언저리에도 가지 못했다. 프로입문도 연습생 신분으로 간신히 턱걸이했다. 그리고 반전이 나왔다. 1997년 1군 데뷔와 동시에 삼성의 리드오프 자리를 꿰차고 20-20클럽에 가입했다. 그해 플레이오프에서 리그 최고 마무리 이상훈을 상대로 극적인 역전홈런을 때리며 히어로가 됐다. 앞날이 창창해 보였다.

하지만 곧장 가시밭길이 열렸다. 그만의 특별한 타격 폼을 뜯어고치려는 사람들, 부상, 그리고 선수협 가입에 대한 보이지 않는 손의 훼방은 그의 야구인생은 미궁 속으로 빠트렸다.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해 프로생활 13년 동안 유니폼을 10번이나 갈아입었다. 사람들은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그에게 ‘저니맨’이란 별명을 붙였다.

재기를 위한 첫 걸음 ‘브랜딩’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미래를 생각했다. 고개를 들어 높은 곳을 바라보는 여유도 생겼다. 평소처럼 선배의 사무실을 빠져나와 거리를 배회하던 어느 날. 내 눈에 역삼동 빌딩숲이 들어왔다.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빌딩 어딘가에 내 이름 내건 사무실 정돈 있어야 잘 살았다 하지 않을까?’. 목표가 생기자 현실적인 방안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시작은 최익성이란 브랜드, 즉 나의 시장 가치를 높이는 것이었다. 2005년 SK에서 방출된 후 내 브랜드가 많이 떨어졌다. 겉으로 보기에 3년간 아무것도 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방출 직후 재기를 꿈꾸며 미국과 멕시코를 전전했지만 스카우터를 잘못 만나 한 번도 제대로 된 팀을 구하지 못했다. 당연히 소득은 없었고,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집이든 차든 다 팔아치웠다. 보여준 게 없으니 팬과 지인들은 내가 뭐하고 사는지 알 수 없었다. 3년이란 시간은 그들이 나를 잊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돌파구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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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인생을 사는 최익성을 세상에 알려준 유니폼.


가장 쉬운 길은 야구였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잘 하는 종목이니까. 하지만 야구를 돈 버는 수단으로 생각하기 싫었다. 항상 내게 베풀어 주기만 한 친구 같은 존재였기에 야구만큼은 깨끗한 곳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야구만큼은 깨끗한 친구로 남겨두고 싶었다. 내가 야구를 통해 누군가에게 베풀어 줄 수 있을 때. 그때 돌아가자고 마음먹었다. 가장 쉬운 길 대신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한 셈이다.

비록 먼 길로 돌아갔지만 헤매진 않았다. 중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브랜딩에 해가 되는 건 손도 대지 않았다. 고기집이니, 양복점이니 내 브랜드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신세였기에 큰돈에 마음이 흔들릴 법도 했다. 하지만 브랜드를 지켜야 재기 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방송. 내가 생각한 재기의 첫 걸음이었다. 내 브랜드와 인지도를 높이는데 방송만큼 좋은 게 없다고 생각했다. 문제가 있었다. 난 야구판에서만 오래 살아왔다. 그래서 방송에 대해 전혀 몰랐다. 어디에 어떻게 출연해야할지. 어떤 분야가 파급력이 좋은지 하나도 몰랐다. 문제와 답은 아는데 어떤 공식으로 풀어야 할지 모르는 느낌이랄까. 그러던 어느 날, 문제는 순식간에 풀렸다.

우연한 만남, 뜻밖의 세계로 이끌다.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지금 야구드라마 ‘2009 외인구단’을 준비 중인 배우에게 야구를 가르쳐 주고 있다는 황금 같은 소식이었다. 운동시간에 맞춰 훈련장이 있는 남양주로 향했다. 손은 운전대를 잡고 있었지만, 머릿속엔 방송에 대한 생각밖에 없었다. 훈련장으로 가니 정말 친구와 탤런트 윤태영이 캐치볼을 하고 있었다. 나를 알아본 그가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짧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서로의 얼굴을 트고 방송에 진출할 수 있는 자그마한 돌파구도 텄다. 방송에 대한 질문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지만 첫 만남부터 많은 것을 묻는 건 실례인 것 같아 다음으로 미뤘다.

두 번째 만남은 예상보다 빨리 그리고 우연히 찾아왔다. 첫 만남 이후 나는 심판을 보고 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잠실야구장을 찾았다.(은퇴이후 첫 야구장 방문이었다.) 항상 그렇듯 그날도 야구장은 사람으로 붐볐다. 그런데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있나 보다. 마침 야구장을 찾은 태영이를 정문 앞에서 만난 것이다. 서로 깜짝 놀랐다. 그리고 태영이가 “형님 끝나고 시간 되시면 저녁 함께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저녁 약속이 있었지만 왠지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정된 약속을 미루고 태영이를 만나기로 했다.

함께 저녁을 먹었지만 사실 뭘 얼마나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머릿속엔 방송생각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외인구단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냐’라는 말이 턱밑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차마 먼저 말할 순 없었다. 먼저 호의를 베풀었는데 내가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한편으론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몰라’라는 조급한 생각도 들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어느덧 자리를 떠야할 시간이 왔다. 그때였다.

“형님 부탁이 있습니다. 저 연습하는 거 도와주실 수 있나요. 형님처럼 유명한 야구선수가 가르쳐주면 드라마와 배우에게도 좋고, 홍보에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태영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내가 그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그도 나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흔쾌히 수락했다. 대신 돈은 받지 않기로 했다. 돈을 앞세우는 성격도 아니고 이 경험을 통해 얻고 배울 게 많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몇 달간 남양주에서 함께 땀 흘렸다. 그리고 내게도 드라마의 한 자리가 주어졌다. 내가 방송에 관심이 많다는 걸 주변사람을 통해 들은 태영이가 제작진에게 “무상으로 우리를 도와주는데 우리도 익성이형을 도와줘야하지 않겠나”라며 나를 위해 새로운 배역을 만들자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태영이의 말을 들은 제작자 대표가 내게 연기에 관심 있냐고 물었다. 나는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예!”라고 말했다. 제작자 대표는 나를 위해 박용수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줬다. 그렇게 나는 재기를 위한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헤럴드스포츠=차원석 기자 @Notime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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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외인구단'은 내 두 번째 인생의 시발점이었다. 사진=2009 외인구단 공식 홈페이지



* 최익성
이름보다 ‘저니맨’이란 호칭으로 더 유명한 남자. 힘들고 외로웠던 저니맨 인생을 거름삼아 두 번째 인생을 ‘정면돌파’ 중이다. 현재 저니맨야구육성사관학교 대표를 지내며 후진양성에 힘 쏟고 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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