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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산책] (6) 고생근-정순현 전으로 보는 1977년 시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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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런던 월드컵에서 첫 승을 올리고 기뻐하고 있는 북한 축구 대표팀.


언더독의 반란

스포츠 세계에 속설 같은 격언이 하나 있습니다. 예상은 예상으로 끝내야 한다고.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준결승에서 ‘축구의 나폴레옹’으로 불리던 프랑스의 미셀 플라티니를 필두로 장 티가나, 루이스 페르난데스, 알랭 지레스 등이 버틴 최강의 프랑스가 서독의 밀집수비에 막혀 마치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날개만 퍼덕 거리다가 영패를 당했습니다. 이때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선수들을 위로하는 전문을 보내며 유명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스포츠에 존재하는 변화무쌍한 불확실성의 피해자다.’

1966년 런던 월드컵을 앞두고 북한은 30여 명의 미혼선수들로 구성된 최정예 멤버를 선발해 외출을 금지시키고 아침 6시부터 저녁 10시까지 혹독한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잘 알려진 것처럼 그 결과는 축구역사에 남을 대이변이었습니다.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동양의 진주’ 박두익이 결승골을 넣으며 월드컵을 2회나 제패한 이탈리아를 제압한 겁니다. 월드컵 사상 최초로 아시아팀이 유럽팀을 꺾는 ‘사건’이었고, 동시에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 8강’의 금자탑을 쌓았습니다.

이탈리아 전이 끝난 후 북한 선수들은 관중석이 텅 빌 때까지 ‘김일성 찬가(?)’를 부르며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숙소에 들어와서도 감흥이 사라지지 않았고, 격한 감정이 치솟아 올랐다고 합니다. 이 들뜬 분위기 속에 런던의 밤거리으로 나가 영국여자와 즐겨보자고 누군가가 제안하자 목표는 바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휘황찬란한 런던 밤거리의 꽃들을 향해 불나방처럼 달려든 것이죠.

여파는 바로 나타났습니다. 포르투갈과의 8강전. 북한 선수들은 전반에 3골을 먼저 넣고도 결국 ‘검은 표범’ 에우제비오의 신화에 희생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분탕질로 인해 후반 들어 하체가 풀리며 세계를 놀라게 한 특유의 기동력을 발휘하지 못한 겁니다. 포루투갈의 역전 드라마는 에우제비오의 현란한 기량이 아니라 영국 밤거리의 여인들이 만들어낸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북한 선수들은 귀국과 동시에 아오지탄광행이 예약되어 있었고, 박두익을 제외한 모두가 숙청되었다는 후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월드컵이 열리기 전 한국의 김기수는 이탈리아의 복싱 영웅 니노 벤베누티를 꺽고 WBA 주니어 미들급 세계 정상에 올랐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축구에서도 북한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자 이탈리아 언론은 ‘남한에 터지고 북한에 차였다’라고 대서특필했습니다.

30년 면벽을 통해 깨달음을 구했던 ‘살아있는 부처’ 지족선사가 황진이의 요염한 자태에 무너졌지요. 그만큼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초지일관으로 좋은 마음을 유지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스포츠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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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선전하고 있는 고생근(오른쪽)의 모습.


1977년 시간여행

국내 복싱에서도 1977년 7월 23일 청주에서 벌어진 한국 주니어 페더급 타이틀매치가 세상살이의 교훈을 전합니다. 챔피언 고생근(51년 서울생, 동신체육관)과 도전자 정순현(52년 천안생, 세기프로모션)의 경기였는데 정말이지 전력차가 심하게 났습니다.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언더독 평가를 받던 정순현이 탑독의 위치에 있던 고생근을 9라운드에서 3차례나 다운시키며 KO승을 거뒀습니다. 복싱계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이변이 나온 겁니다.

좀 자세히 살펴보죠. 1977년은 대한민국이 건국 이래 처음으로 수출 백억불을 달성한 해였고, 고상돈이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했습니다. 또 김응룡 감독이 이끄는 야구 대표팀은 니카라과에서 열린 월드컵 대회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복싱에서는 홍수환이 4전5기로 카라스키야(파나마)를 꺾고 한국복싱 최초의 두 체급 석권의 신기원을 이룩했습니다. 이렇게 국력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복싱도 인기절정인 가운데 고생근-정순현 타이틀매치가 열린 겁니다.

고생근은 1971년 아시아선수권 금메달리스트이자, 1972년 뮌헨 올림픽 국가대표를 지낸 강타자였습니다. 전적은 26전 24승 14KO 2패였는데 프로에 데뷔해서는 한국챔피언이 되는 데 23전이나 치러야 했을 정도로 노망주(늙은 유망주)였습니다. 2전째 라이트헤비급 동양챔피언에 등극한 민병용(풍산), 3전째 웰터급 한국챔피언이 된 김주석(원진), 6전째 세계타이틀매치에 도전한 김광선(5연승 3KO), 7전째 세계챔피언에 등극한 문성길 등의 페이스를 고려하면 고생근은 명성에 비해 진도가 너무나 더뎠습니다.

도전자 정순현은 당시 9전 7승 2패의 전적에 단 한차례의 KO승도 없는 평범한 복서였습니다. 1975년 군인 상병 시절에 뒤늦게 프로에 데뷔했고, 4전 째 최영철, 9전 째 릭 퀴하노를 상대로 각각 한국타이틀과 동양타이틀에 도전했지만 판정으로 무릎을 꿇었죠. 고생근과의 경기는 재기전이었습니다.

경기 자체도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초반엔 ‘면도날 복서’로 유명한 고생근이 특유의 날카로운 스트레이트를 앞세워 주도권을 이어갔습니다. 정순현이 5라운드께 유혈이 낭자하자 주심이 경기를 중단시킬 정도로 초반 레이스는 고생근이 비교우위를 점했습니다. 하지만 체중감량의 실패하여 3차례 시도 만에 가까스로 계체를 통과했던 고생근은 6라운드부터 체력이 고갈됐습니다. 7라운드부터는 정순현의 화려한 원맨쇼가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9라운드에서 날카로운 양훅과 스트레이트가 콤비를 이루면서 고생근을 난타, 역전 KO승을 거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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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의 정순현.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뒤바뀐 운명

이 경기는 스타탄생의 서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생근을 제압한 것을 계기로 정순현은 완전히 다른 복서가 됐습니다. 프로 첫 KO승으로 손맛을 감지한 덕인지 이후 8연승(6KO포함)으로 폭풍질주를 거듭합니다. 이중에는 WBC 페더급 1위이자 OPBF챔피언이었던, 황복수(44전 41승 14KO 3패)와의 라이벌전에서 한 차례 다운을 빼앗으며 판정승을 거둔 것도 포함돼 있습니다. 이 라이벌전도 언더독을 딛고 예상외로 승리를 거둔 극적인 승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천하의 황복수도 고생근과 마찬가지로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정순현은 1978년 11월 홍수환이 빼앗긴 타이틀을 되찾기 위해 리카르도 카르도나와 장충체육관에서 WBA 주니어페더급 타이틀매치를 갖습니다. 정순현은 특유의 순발력 넘치는 스트레이트와 과감한 대시로 중반 이후 혈관이 터져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아쉽게도 판정으로 패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판정이었음은 7080세대들은 확연히 기억할 것입니다. 그때 장충체육관 인근에 있는 수정약국로 찾아가 지혈제를 구했지만 물건이 없어 화장품을 대용으로 사용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쓴 웃음만 나오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정순현은 리벤지 경기에서도 다시 판정으로 패했으니 참으로 악몽 같은 카르도나와의 2연전이었습니다.

정순현은 한국 최초로 3차례 연속 세계타이틀에 도전했고, 한국챔피언과 동양챔피언을 각 2회나 역임한 뛰어난 복서였습니다. 홍수환 염동균 고생근이 마지막 판정까지 가면서 승패를 주고받았던 다나카 후타로를 2라운드에 어린아이 손목 비틀듯이 쉽게 제압했고, 역시 홍수환이 세계 타이틀매치에서 15라운드 판정까지 가야했던 가사하라 유를 5라운드만에 기막힌 쇼트훅 연타로 쓰러뜨렸습니다. 여기에 김학영과 1승1패를 기록한 세계랭커 다까다 지로 역시 가볍게 2라운드에 KO로 이기는 등 일본선수에 유난히 강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34전을 싸우면서 6패를 기록했는데 6패는 전부 타이틀매치에서 나왔습니다.

고생근은 정순현 전 참패 이후 6전 5승 1무를 기록했지만, 더이상 예전의 날카로웠던 면도날 펀치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1979년 4월 조지탐과의 경기에서 10라운드 판정승을 거두고 프로통산 33전 29승(15KO) 1무 3패를 기록한 날이었습니다. 경기 후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으로 아내를 초대한 고생근은 “이제 길고긴 복서생활을 청산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아내 분은 환한 미소로써 화답했다고 합니다. 이 때 두 분이 기념촬영을 했는데 고생근의 일그러진 표정과는 참으로 대조적인 아내의 기쁜 표정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고생근은 정순현에게 패한 이유 중에 하나가 잇달아 큰 경기가 무산되면서 허탈감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회고했습니다. 1976년 상반기, 그 유명한 카를로스 사라테와 WBC 밴텀급 세계 타이틀매치를 벌이자는 제의가 들어왔고, 이어 1977년에는 윌프레드 고메스와 두 차례 타이틀을 걸고 격돌했던 후앙 안토니오 로페스와 세계 랭킹전이 잡혔지만 두 경기 모두 석연치 않게 무산된 것이죠. 황충재가 레너드, 쿠에바스 선수와의 경기가 무산되면서 허탈감에 빠진 상태에서 황준석을 상대했듯이, 고생근도 이런 정신적인 공황상태에서 상대한 선수가 정순현이었습니다.

고생근은 1971년 아시아선수권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후 프로에 전향하려고 하자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민관식 씨가 프로관계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호통을 치며 막았다고 합니다. 그 호통 한 번에 프로관계자들이 알아서 슬슬 기며 프로행을 운운하는 소리가 단번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민관식이라는 분은 1964년 대한체육회장을 맡으면서 1965년에 아마추어복싱 부흥을 위해 중산체육관을 설립해 고생근 이석운 정영근 등 걸출한 복서들을 배출했습니다. 이 세 선수는 1971년 아시아선수권에서 모두 금메달을 땄습니다. 민관식 씨는 또 1966년 태릉선수촌을 건립하는 등 한국 스포츠계에 큰 족적을 남긴 한국체육계의 큰어른이었습니다.
고생근은 필자에게 흥미로운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1972년 뮌헨 올림픽 8강에서 후앙 안토니오 로드리게스에게 패한 후 상심하여 그날 저녁 숙소에 귀가하지 않고 밖에서 유흥을 즐기고 다음날 귀가할 때라고 합니다. 갑자기 독일전차가 포진되어 있는 등 분위기가 심상치않다고 생각하는 찰나 한 독일군인이 고생근을 갑자기 쓰러뜨리면서 품에 안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 총격전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고생근은 그 상황이 일촉즉발의 분위기인줄 후에 알았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 과격단체인 검은 9월단 소속 테러리스트 8명이 이스라엘 숙소를 습격하여 이스라엘인 2명을 사살하고 인질 9명을 납치했던 그 유명한 사건을 말입니다. 고생근 선수는 영문도 모르고 아무생각 없이 거리를 배회하다가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겁니다.

염동균 홍수환 고생근은 윤필용 장군이 창단한 수경사 복싱부의 경량급 삼총사였습니다. 염동균은 고생근이 스트레이트를 뻗을 때 눈앞에까지는 보이다가 갑자기 팍 하면서 레이저빔처럼 안면을 강타했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 역대 수많은 사람과 스파링을 했지만 주먹끝의 스피드가 고생근처럼 빠른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야구로 말하면 초속보다는 종속이 빨랐던, 대한민국에서 가장 스트레이트를 잘 때린 복서 중 한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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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석촌역 인근에서 마주한 고생근 선배. 멋진 노신사의 모습이었다.


둘의 은퇴 후 삶

정순현은 은퇴 후 천호동과 안산에서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면서 크게 성공했습니다. 천안 계광중학교를 다닐 때 핸드볼 선수로도 주목을 받았는데 그 시절 친구가 개그맨 김학래라고 합니다. 또 남영동 두꺼비체육관에서 훈련할 때 침식을 같이한 친구가 있었는데 바로 탤런트 이계인 씨였습니다. 그리고 텔런트 송기윤 씨와도 죽마고우라고 하니 인맥이 참 좋습니다. 지금은 천안에서 용역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집이 서울 잠실 5단지에 있어 서울과 천안을 수시로 오간다고 합니다. 지금도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정순현은 매니저 최승철 씨가 형님으로 모시던 충청도의 유명한 주먹 조일환 회장과 어렸을 때부터 내왕하면서 상당히 친분이 깊었다고 합니다. 선수 때 가끔 용돈도 주고, 식사도 대접받았답니다. 또한 현 KBF(한국복싱연맹)의 이인경 회장과도 잘 아는 사이입니다.

과거 김용현이 구시켄 요코와 WBA 주니어플라이급 타이틀매치를 벌일 때 정순현은 서순종 매니저와 함께 참관한 적이 있습니다. 경기 후 한 후배가 눈에 거슬리게 행동하자 호텔방에서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따끔하게 혼냈을 정도로 정순현의 ‘포스’는 대단했습니다. 그 후배는 WBC 주니어라이트급 세계랭커였던 최충일(현재 미국 거주)입니다.

고생근은 호불호가 명확하고 언뜻 보면 근엄함이 느껴지는 타입입니다. 은퇴 후 삶이 녹록치 않은 것 같았는데 언젠가 “지인에게 잘못 보증을 서는 바람에 제주도에 있는 3층 건물과 약수동에 있는 단독주택을 잃었다”며 진한 담배연기를 내뿜는 걸 봤습니다. 겉모습은 단호하게 보였지만 오히려 속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현재는 모 회사의 이사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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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체육관을 방문한 정순현과 문성길 선배. 그들의 현역 시절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많이들 변했다.


참, 고생근은 우리나라 복싱 선수 중 자식농사에 가장 성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리원칙을 중시하며 곧은 삶을 살았기 때문인지 몰라도 큰딸은 이화여대를 나와 현재 영국에 유학 중이며, 둘째딸은 서울대를 나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막내아들도 명문대를 나와 현재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고생근의 집도 잠실로 정순현과 가까이서 산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정순현은 고생근에게 자신의 집이 잠실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도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받은 트라우마가 혹시 남아있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시인 키플링의 <만약에>라는 한 부분에 ‘승리의 오만에 빠지지 않고,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실패에 부딪혀도 당당히 일어설 수 있다면 비로소 진정한 한 사람의 어른이 될 수 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인생사도 그렇겠지만 승부의 세계인 스포츠에 꼭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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