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장성훈의 언플러그드] 잠 자는 ‘스포츠 중재기구’ 설립 발의안
이미지중앙

그 유명한 변호사 강용석의 '너 고소' 포스터.


‘너! 고소’라는 어느 변호사의 이색 광고문구가 화제다. 누군가를 고소하고 싶은 잠정 고객들의 눈을 확 뜨이게 하기에 충분한 광고임에 틀림없다. 덕분에 이 변호사는 그리 큰 돈 들이지 않고 엄청난 광고효과를 보았다고 한다(본인 주장). 비록 광고 문구가 변호사의 품위를 손상했다 하여 변호사 협회로부터 제재를 받기는 했지만(필자는 변호사에게도 지켜야 할 품위가 있는 줄 이번에 알았다), 이 변호사의 전략은 나름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요즘 변호사들이 TV 시사프로그램에 대거 출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바야흐로 우리나라도 ‘고소천국 시대’가 도래하려나 보다.

‘고소천국’ 하면 떠오르는 나라가 하나 있다. 미국이다. 사회 전반에 걸쳐 고소가 만연되어 있다. 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길거리에 변호사들의 광고 빌보드를 쉽게 볼 수 있다. 변호사 사진과 함께 프로필과 그 동안 자신이 해결한 교통사고 보상 액수를 병기하는 것은 기본이다. TV와 라디오에서 변호사 광고를 보고 듣는 것은 일상 다반사이다. 그래서인지 미국인들은 희한한 일(그들에게는 심각할 수 있다)로 고소한다. 냅킨을 한 장밖에 주지 않았다며 식당을 상대로, 길을 걷다가 빙판 길에 미끄러져 다치자 시를 상대로 고소하기도 한다.

미국 프로 스포츠계도 예외가 아니다. 사무국에서 벌금과 출전 정지 같은 징계를 내리면 해당 선수는 선수노조와 함께 자동적으로 사무국을 상대로 중재자 또는 법원에 고소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부분 ‘감형’된다.

선수들의 빈번한 범죄 행위로 골치를 앓고 있는 미국프로풋볼(NFL)에서의 고소 행태는 그 정도가 심하다. ‘바람 빠진’ 공 스캔들에 휘말린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의 쿼터백 톰 브래디와 선수노조는 4경기 출전 정지라는 징계를 내린 NFL 사무국을 상대로 법원에 고소했다. NFL 커미셔너가 무슨 근거로 자신에게 출전 정지 처분을 내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사무국은 비록 브래디가 이 스캔들에 관련됐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지만 바람을 뺀 것으로 지목된 구단 직원과의 대화가 담겨있을 것으로 보이는 휴대폰을 브래디가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파손한 점을 들어 브래디가 이 스캔들에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결과는 브래디의 승리였다. 법원은 브래디가 잘못된 타인의 행동을 ‘대체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점과 이로 말미암은 징계에 대해 NFL 사무국으로부터 충분한 설명을 사전에 들은 바 없기에 브래디의 출전 정지 징계는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이에 사무국은 즉각 항소했다.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그렉 하디는 심각한 법죄를 저지르고도 사무국에 고소하여 징계가 경감된 케이스이다. 그는 지난 해 여자친구를 폭행한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어 있었으나 피해자가 법정에 나오지 않는 바람에 혐의가 풀렸다. 그러나 NFL 사무국은 그에게 8경기 출전 정지라는 징계를 내렸다. ‘도의적 책임’을 적용한 것이다. 이에 하디는 선수노조와 함께 사무국을 상대로 중재기구에 이의를 제기, 4경기 출전 정지로 ‘감형’됐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금기’로 되어있는 음주운전에 대한 징계는 한 술 더 뜬다. 메이저리그의 경우 음주운전으로 인한 징계는 아예 없다고 보면 된다. 법적 책임만 지면 그만이다. 추신수가 클리블랜드 소속 시절 음주운전으로 경찰에 체포되었지만 벌금과 집행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그러나 사무국과 구단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사무국과 선수노조가 음주운전 징계에 대해 합의한 게 없기 때문이다.

미국프로농구(NBA)와 NFL은 다소 다르다. NBA의 경우 음주운전을 하면 2경기 출전 정지가 기본이다. NFL은 명문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커미셔너가 판단해 징계할 수 있다. 그러나 선수가 이에 불복할 경우 고소할 수 있다.

이미지중앙

지난 8월 대리 운전을 통해 귀가한 후 주차장에서 직접 운전을 하다 주민 신고로 음주운전 사실이 적발된 정성훈.


한국으로 눈을 돌려보자. 추신수가 한국에서 그 정도의 음주운전을 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고무줄 징계이긴 하겠지만 결코 가벼운 징계는 아닐 것이다. LG 트윈스의 정성훈이 아파트 주차장에서 음주운전을 했다는 이유로 남은 시즌 출전 정지 처분을 받은 것이 좋은 예이다. 설사 정성훈이 다소 억울하다 해도 KBO를 상대로 고소할 수 없다. 선수협회가 있기는 하지만, 여론의 싸늘한 시선 때문에 이의제기 또는 고소는 언감생심이다.

프로농구(KBL)의 경우는 아예 고소가 사실상 ‘원천봉쇄’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KBL에서 하라고 하면 선수들은 그렇게 해야 한다. 아무런 죄도 없는데도 선수 자정결의대회에 나오라고 하면 거부할 수가 없다. 나가서 죄인처럼 팬들에게 사죄해야 한다. 불법 도박혐의자로 지목된 선수들은 혐의가 입증될 때까지 출전할 수 없다는 KBL의 결정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 고소라도 한다면 더 이상 선수생활을 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사회 정서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소는 나라별로 달리 해석되고 행해진다. 음주운전에 대해 미국 메이저리그의 경우 ‘사생활’로 치부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턱도 없다. 미국에서는 자신에게 내려진 징계가 과하다고 여기면 고소한다. 그리고 그런 행위에 대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당연한 권리로 존중한다. 선수와 사무국의 관계가 갑과 을이 아닌 동등한 관계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사무국과 선수, 구단과 선수 관계는 아직도 갑과 을의 관계인 것이 현실이다. 선수노조 자체를 불허하는데 무슨 동등한 관계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오해하시지 마라. 그렇다고 미국 스포츠계의 고소문화를 부러워하는 게 아니다. 아무리 ‘사생활’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음주운전을 한 선수를 사무국이 아무런 징계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행위는 그것이 무엇이 됐든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다만, 사무국과 구단이 자기 마음대로 명문화된 기준도 없이 선수들을 징계하는 ‘갑질’ 행위는 지양되어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스포츠 중재기구이다. 돈 많이 드는 법원까지 가지 않으면서 분쟁을 신속하고 공정하게 해결해주는 독립단체이다. 미국과 일본 등 많은 나라들이 이 기구를 활용해 크고 작은 스포츠 분쟁을 해결하고 있다. 우리도 잘만 이 기구를 운용한다면 사무국과 구단의 일방적인 ‘갑질’ 행태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선수들이 거의 일방적으로 당해야 하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는 아마추어 스포츠의 경우 중재기구 설립은 시급하다.

스포츠 중재기구가 우리나라에도 있기는 했지만 실적부진을 이유로 해체되었다. 이에 문대성 국회의원이 2013년 스포츠 중대기구 설립을 위한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2년여가 지난 지금, 아직도 이 법안은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영화 ‘베테랑’을 보면서 우리는 ‘갑’의 황포에 치를 떨었고, 그들의 ‘몰락’에 박수를 쳤다. 사회 분위기도 ‘갑’과 ‘을’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쪽으로 흐리고 있다. 스포츠 중재기구 설립 안도 잠에서 하루 빨리 깨어나야 한다, 더 큰 일이 일어나기 전에. Sean1961@naver.com

*필자는 미주 한국일보와 <스포츠투데이>에서 기자, 체육부장 및 연예부장을 역임했고, 현재 스포테인먼트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sports@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
          연재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