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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산책] (5)다시 보는 문성길-허영모 라이벌전과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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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라이벌전을 앞둔 두 선수의 모습. 체력의 문성길(왼쪽)과 순발력과 테크닉의 허영모.


1934년 이땅에 대한아마추어복싱연맹(현 대한복싱협회)이 발족된 이래 수많은 라이벌전이 치러졌습니다. 1972년 뮌헨 올림픽 밴텀급 선발전에서 고생근(51년생 중산체육관)과 김태호(52년생 대경상고졸)의 경기가 그랬고,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라이트 플라이급 경기에서 김치복(52년생 육군대표)과 박찬희(57년생 한영고-동아대)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승부를 펼쳐졌습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아마 복싱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전은 문성길-허영모의 세 차례에 걸친 라이벌전이 백미 중에 백미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우선 허영모(64년생 순천 금당고 1학년)는 1980년 전국체전 결승(45kg 코크급)에서 최점환(63년생 경주상고)에게 패한이래 1984년 12월 14일 문성길과의 첫 번째 격전까지 4년간 단 한 차례도 국내에선 패한 적이 없는 철옹성 같은 존재였습니다. 또한 1981년도 처녀출전한 몬트리올 월드컵에서 은메달을 획득했고, 1982년도 뮌헨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는 등 김동길(한체대)과 함께 한국을 넘어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강호였습니다. 허영모는 이 두 대회에서 불가리아의 이스마엘 무스타포프(60년생)에게 근소한 차로 판정패를 했는데, 무스타포프는 88 서울 올림픽에서 미국의 마이크 카바할을 꺽고 금메달을 획득했던 명복서였습니다. 정말이지 다들 복싱 역사를 장식한 훌륭한 복서들이었습니다.

허영모는 1982년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아시아선수권, 그리고 뉴델리 아시안게임 등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습니다. 이어 1983년에는 킹스컵에서 우승하고, 로마 월드컵에서는 한 체급을 올린 플라이급에서도 은메달을 획득하는 등 한국복싱의 대들보가 됐습니다. 일례로 허영모는 제프 페네치(호주)라는 선수를 한 차례 RSC승을 비롯해 두 번이나 제압했는데, 페네치는 후에 프로에서 복싱 사상 12번째로 트리플 크라운(밴텀급 주니어페더급 페더급)을 달성했으니 국제무대에 허영모가 얼마나 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이 무렵 나름대로 한가닥 한다는 복서들인 김광선(동국대), 오광수, 한정훈(한국체대), 황동용(군산 한국유리), 박윤섭(동아대), 박제석(웅비) 등이 ‘타도 허영모’를 외치며 대항했지만 허영모라는 이름 석자앞에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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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월드컵 복싱 대회에서 베스트 복서로 뽑힌 문성길(가운데).

반면 문성길(61년 영암생)은 1979년 복싱에 입문, 1982년 목포대에 입학할 때까지 전국대회에 8차례 출전해 동메달만 6개를 딴 그저 그런 선수였습니다. 특히 허영모의 순천 금당고 2년 선배인 김창렬(62년생 현 광주광역시 복싱연맹 전무)에게 내리 3번이나 무릎을 꿇었고, 그중 한 차례는 실신 KO패를 당할 정도로 존재감이 미약했습니다. 후에 허영모가 문성길에게 명승부 끝에 3연패를 당했으니 결국 문성길은 순천 금당고 선수와 3승 3패를 기록한 셈입니다. 문성길은 엄청난 훈련으로 핸디캡을 커버한 복서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노력도 재능이고 소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포 덕인고 시절 유달산 새벽운동을 할 때 층층이 계단으로 연결된 정상까지 힘에 부쳐 다른 선수들은 3분의 2지점에서 대부분 퍼지는데 문성길은 정상까지 쉬지않고 끝까지 도달하는 유일한 선수였다고 합니다(덕인고 시절 스승이었던 해병대 출신의 최진태 관장의 회고).

어쨌든 목포대에 진학한 문성길은 킹스컵 본선에 출전해 완차이 퐁수리(태국)에게 아쉽게 패하며 은메달을 땄고, 그해 뉴델리 아시안게임 3차 선발전에서 당시 월드컵 준우승을 차지했던 대선배 장임석(전남)을 KO로 제압하는 대이변을 연출했습니다. 결국 최종 선발전에서 우승했고, 이어 본선에서도 태국에 완차이 퐁수리를 3라운드 역전 KO로 쓰러뜨리며 문성길이라는 이름 석자를 아시아 무대에 각인시켰습니다. 문성길 시대의 도래를 알린 것이죠.

1984년 12월 14일. 온 국민의 관심을 증폭시켰던 역사적인 라이벌전이 결국 열립니다. 허영모가 올림픽이 끝난 후 한 체급 올려 밴텀급에서 문성길의 자리를 넘보자, 둘은 피할 수 없는 외나무다리 진검승부를 펼치게 된 겁니다.

경기는 두 말이 필요없는, 드라마 같은 명승부였습니다. 허영모는 패스트 스타터답게 빠른 스피드를 이용한 스트레이트 연타와 콤비네이션을 잘 섞어 2라운드 중반까지 포인트에서 우위를 점했습니다. 여담이지만 허영모는 1984년 태릉선수촌 체육과학원에서 실시한 테스트에서 전 종목 국가대표선수 중 순발력이 가장 좋다는 평가를 받았고, 문성길은 심폐지구력에서 최고점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태릉선수촌에 전설로 남아 있는 문성길의 불암산 신화도 이 시절 나온 겁니다. 문성길은 불암산 편도 4.5km 아침 로드웍 때 체력이 좋은 유도, 레슬링 선수들이 24~25분대를 기록할 때 21분 7초를 기록했습니다. 정말이지 폭주기관차 그 자체였습니다.

허영모-문성길 1차전은 2라운드 중반부터 분위기가 반전됩니다. 문성길이 실점을 만회하기 위해 강력한 파상공격을 펼치자, 허영모는 순간적으로 안쪽으로 팔을 끼는 클린치를 두세 차례 범했습니다. 이때 한국 아마복싱 심판들 사이에서 ‘포청천’으로 정평이 나 있는 채용석(32년 생, 중산체육관 관장) 심판이 허영모에게 곧바로 파울 하나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분수령으로 승부의 추가 문성길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최종결과는 3-2, 문성길의 판정승. 파울이 없었다는 결과는 반대였을 겁니다. 후에 사석에서 당시 주심을 봤던 채용석 심판에게 그 경기 관전평을 부탁했더니 “2라운드의 파울 하나가 승패를 결정했는데, 정말 고뇌에 찬 결단이었다”는 회고가 나왔습니다. 웬만하면 물에 물 탄듯 넘어갈 수도 있는 흐름이었지만 ‘나이프(knife)’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분이었기에 단호하게 결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채용석 심판은 현재 모 대학병원에서 와병중이라고 합니다. 강산이 세 번도 더 변했으니 전설의 나이프도 삶과 힘겨운 원초적 싸움을 벌이는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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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길-허영모 운명의 1차전, 최종 판정이 내려지는 순간. 허영모(왼쪽)가 박수로 축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허영모-문성길 2차전은 1985년 월드컵 선발전 결승 경기였습니다. 1차전이 워낙 박빙이었던 까닭에 이 경기 역시 엄청난 관심을 모았습니다. 두 선수 모두 많은 준비를 한 것은 물론이고요. 1라운드 공이 울리자 허영모는 1차전과 다르게 초반부터 강공일변도로 나와, 문성길에게 거푸 강타를 명중시키며 두 차례 스탠딩 다운을 빼앗았습니다. 전혀 예기치 않은 허영모의 선제공격에 문성길은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그리고 화룡점정과도 같은 허영모의 라이트 어퍼컷이 돌고래처럼 힘있게 솓구치며 문성길 선수에 안면을 강타했습니다. 이전 두 차례 다운과 달리 파괴력이 증폭된 강펀치였습니다. 순간적으로 필자는 ‘아 게임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조석인 주심(36년생 익산생)은 웬일인지 주심은 다운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일촉즉발의 위기를 넘긴 문성길은 반전의 기회를 어렵사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 잠시 당시 링사이드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허영모 측 감독은 유종만(54년 익산생) 한국체대 교수였고, 유 교수는 당시 주심을 보던 조석인 주심의 제자였습니다. 경기를 중단해도 누가 뭐랄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승인 조석인 주심이 경기를 속행하니 제자인 유종만 교수의 심정은 안타까움 그 자체였을 겁니다.

어쨌든 1라운드 종반 문성길이 한 차례 다운을 뺐으며 추격이 시작됩니다. 2라운드부터 문성길의 강타가 서서히 작렬하기 시작했고, 허영모도 만만치 않게 카운터 블로우를 날리면서 반격을 펼쳤습니다. 마지막 3라운드. 이때부터 패스트 스타터인 허영모 선수의 체력이 조금씩 소진되기 시작하자, ‘체력왕’ 문성길의 동력페달이 가속도가 붙으면서 거센 몰아부치기가 시작됐습니다. 이런 가운데 경기 종료 벨이 울렸습니다. 결과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경기 진행답게 또 다시 3-2로 문성길의 승리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숨어 있는 비화를 하나 꺼내보겠습니다. 조석인 주심은 왜 1라운드에서 경기를 스톱시키지 않았을까요? 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인 유종만 씨가 세컨드를 보고 있는 허영모 측에 심적으로 기울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말입니다. 사정은 이렇습니다. 문성길이 고등학교 3학년 때 전국체전 준결승과 우승권대회 준결승에서 조석인 씨의 제자인 이리남성고 최주영에게 석연치 않게 두 차례나 패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조석인 주심은 가슴에 연민의 정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고등학생 문성길은 링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면서 통곡했거든요(문성길의 친구로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라이트헤비급 금메달리스트인 홍기호 씨의 회고. 홍 씨는 개그맨 홍기훈 씨의 사촌형입니다). 마음에 빚을 지고 있던 조석인 주심은 한 번 문성길에게 기회를 주자고 생각한 겁니다. 이는 조석인 관장이 수년전 제가 근무하는 문성길복싱클럽을 방문해 직접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그 2차전 3라운드에서 허영모가 클린치를 심하게 해 경고를 줘도 되는 상황이었는데, 찰나의 순간 마주친 허영모의 눈빛을 보니, 그 애잔하게 바라보는 모습에 마음이 뭉클해져 파울을 주지 못했다고도 회고했습니다. 문성길과 허영모에게 한 번씩 어드밴티지를 준 셈입니다. 어쨌든 2차전도 결국 승리의 여신은 허영모를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세 번째 대결은 1986년 아시안게임 최종 선발전 결승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은 허영모가 컨디션 난조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1, 2차전 때 대등한(혹은 우세한) 경기를 벌이고도 석패한 탓에 3차전에 임하는 의욕이 반감되었던 모양입니다. 한 마디로 이 경기는 허영모가 초반 다운을 당하는 등 다소 일방적인 양상으로 끝났습니다. 결과는 문성길의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이었습니다.

문성길은 허영모와의 3연전을 통해 비약적으로 실력이 상승했습니다. 허영모 같은 세계적인 선수를 꺽기 위해 다른 선수들을 제압할 때와는 다르게 공격패턴 등 테크닉을 한층 더 발전시켰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문성길은 3차례 경기에서 경기를 거듭할수록 눈부신 기량발전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치 프로야구에서 56호 홈런을 치면서 아시아신기록을 세운 이승엽(삼성)의 뒤에 53개의 홈런을 때리면서 턱밑까지 추격해온 라이벌 심정수(현대)라는 경쟁자가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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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복싱 세계선수권에서 건국 이래 한국의 첫 금메달을 따낸 문성길.


이후 문성길은 세계선수권에 출전, 불가리아의 알렉산더 리스토브, 쿠바에 아놀드 메사, 독일의 브라이트 바로토을 연파하고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이 세 선수는 허영모와 싸울 때보다 훨씬 수월했다고 문성길은 회고했습니다. 특히 문성길은 준결승 때 오른손에 골절상을 입자, 진통제를 맞으면서 금메달을 따내는 투혼을 발휘했습니다. 결승전은 오른손 부상이 아니었으면 충분히 KO로 이길 수 있었던 상대였다고 회고하면서 최우수복서로 선정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밝혔습니다.

문성길은 86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지만 경기력이 예전만 못했습니다. 이유는 오른손 통증의 후유증이 계속됐기 때문입니다. 이에 아시안게임이 끝난 후 아마추어와 작별인사를 하고 1987년 3월 프로로 데뷔합니다. 그리고 6년 8개월 동안 프로생활을 하면서 두 체급을 석권하는 위업을 달성합니다. 아마추어 때 메이저대회인 세계선수권과 월드컵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데 이어 프로에서도 WBA 밴텀급과 WBC 슈퍼플라이급을 잇따라 석권한 것입니다. 문성길은 20대 이미 아마와 프로를 평정했던 대한민국 최초의 복서이자, WBC 슈퍼플라이급 베스트 복서로 선정된 슈퍼스타였습니다. 제가 농담으로 문 챔프에게 한마디 하곤 합니다. 동양 역사에서 서양인에 필적할 만한 4대 인물 중에 하나라고요. 그 4인방은 징기스칸, 스즈키 이치로, 매니 파퀴아오, 그리고 돌주먹 문성길, 이렇습니다. 이 찬사를 문 챔프는 가장 좋아합니다. 제가 이 멘트를 날리면 웬만하면 거의 술을 사지않는 돌주먹 문성길도 술을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문성길의 은퇴 후 삶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세상사의 만만치 않은 변수로 링에서보다도 더 험난한 강타에 여러차례 맞으며 흔들렸습니다.

허영모는 1989년 여수 여도중학교 교사로 임명되어, 안정된 직장에서 무난한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허영모는 1986년도 아마추어 해태소속 선수일 때 무려 600만 원의 월급을 수령할 정도로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복서였습니다. 또한 독학으로 영어를 마스터해 외국원정 경기를 나가면 원어민과 통역없이 원활하게 대화할 수 있을 정도로 회화실력이 출중했습니다. 그리고 1986년 윤재근 MBC기자와 함께 김현치 동아프로모션회장을 세 차례 만나 프로행을 제안 받았는데, 이때 스카우트 계약금이 1억 원에 육박했습니다. 그런데도 허영모는 프로행을 고사하고, 그 동안 받아온 수많은 상패와 메달을 폐기처분하면서 복싱계와 인연을 싹둑 끊고 선생님의 삶에만 매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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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BA 밴텀급 타이틀 방어전을 벌이고 있는 문성길(왼쪽).


지나고 나서 말인데 허영모는 문성길이라는 암초를 피해 페더급으로 두 체급 월장할 수 있었는데 왜 그런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을까요? 알고보니 신장이 173cm인 허영모는 페더급에 국가대표였던 박형옥(64년생 전남 보성-경희대)과는 조약돌이라는 모임의 같은 회원이었고, 고향도 비슷해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문성길은 후에 “(허)영모가 페더급으로 직행했으면 스타일상 무난하게 대성했을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삶은 대나무의 마디처럼 한가닥 한가닥 연결되어 인생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으로 집대성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폭죽처럼 시원하게 터지는 승리의 쾌감도 한 순간의 승리이며, 쓰라린 패배감과 좌절의 상처도 한 순간의 패배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남보다 빨리 간다고 최후의 승자는 아닙니다. 너무 일찍 많은 것을 이루면 후반에 이룰 것이 적은 법이죠. 이문세의 노래처럼 ‘알 수 없는 인생’인 겁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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