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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정힐스에서 만난 사람]'포즈(pause)의 미학'-SBS 배기완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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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기완 아나운서와의 1시간 인터뷰.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천안=채승훈 기자


SBS 편성본부의 아나운서 부장. 13일 코오롱 제58회 한국오픈 마지막 날 중계를 마치고 나온 배기완 아나운서의 명함 공식 직함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생각보다 타이틀이 굵다. 나이를 확인해 보니 55세. 정말 동안이다. 그랬더니 “하하. 직업상 제가 좀 동안이에요. 사적인 자리에서 친구들과 편하게 얘기하면 젊은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함부로 말한다고 쳐다 보는 사람도 있어요”라는 답이 노타임으로 나온다. 말하는 게 직업인 사람과의 인터뷰, 역시 유쾌하게 시작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물론 흥미로웠지만, ‘재미’보다는 ‘배움’이 많았다. 뭐랄까, 고수에게 한 수 지도 받은 느낌! 혹시라도 아나운서를, 스포츠 캐스터를 꿈꾼다면 이 분을 좀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음악, 그리고 놀기를 좋아했던 청년

말 잘 하는 사람인 만큼 기선 제압이 필요하다. 그래서 공격적으로 개인사를 물었다. “생물학을 전공하셨네요.” 그런데 대답이 한 10분간 이어졌다. 줄줄줄.

“제가 노는 걸 좋아했어요. 대학에 들어가기 전부터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 등 그룹사운드를 목표로 했어요. 음악한다고 엄청나게 놀았죠. 보컬보다는 주로 기타를 죽어라 쳤죠. 그러다 보니 공부는 관심이 없었고, 1학년 마치고 공대에서 자연대로 옮겼어요. 더 놀려고요. 음악하는 데 전공은 상관없잖아요. (중략)그런데 각종 가요제 예선에서 죄다 떨어졌어요. 마음과는 달리 음악성이 모자랐던 것 같아요. 한번은 무슨 가요제에 나갔는데 음악하시는 분이 ‘너는 목소리가 가수보다는 아나운서가 낫겠다’라고 조언했어요. 이게 제 인생에서 아나운서라는 직업과 처음 조우한 겁니다. 그리고 신기하게 이후 음악 다방에서 DJ를 하고, 군대에서도 각종 장교모임에 사회를 보는 그런 일을 하게 됐어요. 제 DNA가 그렇게 설계돼 있었나 봐요.”

그럼 아나운서는 어떻게 됐을까? 이 스토리도 생각보다 길었다. 그리고 이것도 성공보다는 실패가 훨씬 많았다.

“제약회사는 낙방했고, 한 사회단체에 취직했어요. 하지만 아나운서 꿈이 있으니 직장을 다니며 84, 85, 86년 3년 연속 MBC 아나운서 공채 시험에 응시했죠. 그런데 모두 2차 아니면 최종에서 떨어졌어요. 낙담했죠. 그만 포기하려고 하는데 86년 말에 MBC에서 전화가 왔어요. 춘천 MBC가 아나운서 1명을 특채로 뽑는다고 하니 응시해 보라고요. 그래서 87년 초 춘천에서 마이크를 잡게 된 겁니다. (중략)스포츠 캐스터요? 그건 SBS로 오면서 시작했죠. MBC 아나운서였던 한선교 선배(현 국회의원)와 좀 친했어요. 96년인데 당신은 프리 선언을 해 놓고, 제게는 SBS가 경력 아나운서를 뽑는데 지원해보라는 연락이 왔어요. 윤세영 회장님이 직접 나선 면접이었고, 최종 6명 정도가 남았죠. 그런데 알고 보니 스포츠 전문 아나운서를 뽑는 거였어요. 제가 마지막으로 들어갔는데 스포츠 중계 경험이 있냐고 묻더라고요. 근데 저는 춘천 시절 1년에 두 번씩 라디오로 마라톤 중계를 한 경험이 있었어요. 이를 어필했죠. ‘마라톤 중계하면서 많이 배웠다. 계속 왼발 오른발 할 수도 없고, 스포츠 중계가 참 어렵고,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고요. 나중에 들었는데 회장님이 꼭 짚어 저를 뽑으라고 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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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기완 아나운서가 이렇게 웃으면서 사적인 얘기를 풀어 놓으면 그 자체로 무척 흥미롭다. 천안=채승훈 기자


쇼트트랙, 피겨, 수영, 양궁 그리고 골프


“울어도 좋아요. 울어도 좋아”(2008 베이징올림픽 수영 400m 결승에서 박태환이 우승하자), “그녀가 있어서 정말 행복하고 고맙습니다”(2010 밴쿠버 올림픽, 김연아 우승), "왜 들고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2014 소치 올림픽 갈라쇼에서 소트니코바가 형광색 깃발을 들고 나와 실수를 연발하자), “태극기를 단 단복을 입은 것만으로 충분히 박수 받을만 합니다”(2014 인천 아시안게임 개회식)….

이상은 ‘개념 어록’으로 불리는 배기완 아나운서의 역대급 멘트다. 어록이 말해주듯 스포츠 캐스터로 배기완은 널리 알려져 있다. 피겨스케이팅 중계는 '배방라인(배기완 아나운서, 방상아 해설위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김연아 전성시대에 큰 사랑을 받았고, 쇼트트랙 수영 양궁, 그리고 종합대회 개회식 등에서 배 아나운서는 스포츠팬 들과 함께 감동을 나눴다. 자신의 이름이 걸린 교양프로그램(배기완-최영아-조형기의 좋은 아침)을 오랫동안 진행할 정도로 재주가 있었지만 주로 스포츠중계에 전념했다.

“제가 중계방송 때문에 바쁜 것으로 소문이 나 있기에 요즘은 (교양쪽에서)연락이 잘 안 와요. 물론 그래도 가끔 출연 요청이 있지만 정중히 거절합니다. 제 일도 그렇고, 스포츠중계를 담당하는 아나운서들 사이에서 제가 할 일이 많거든요.”

SBS 입사 이후 야구는 라디오로 일주일에 3번씩 중계할 정도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부터 쇼트트랙과 피겨 등 빙상과 인연을 맺었고, 김연아와는 한 시대를 풍미했다. ‘박태환의 스승’ 노민상 감독과 호흡을 맞춘 수영중계도 유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한골프협회장을 역임한 윤세영 회장이 SBS를 통해 한국 골프발전을 주도하면서 일찌감치 골프중계도 담당했다. 유협 전 SBS 아나운서 실장으로부터 많은 걸 배웠고, 그 바통을 이어받아 SBS 골프중계의 간판이 됐다. 그리고 운도 좋았다. SBS가 지상파 3사 중 가장 막내지만 그가 관여한 메이저 이벤트의 시청률 대전에서 좋은 결과가 나왔다.

“최근만 봐도 런던 올림픽 2위, 소치 올림픽 2위, 그리고 지난 해 인천 아시안게임 개회식에서는 1위를 기록했어요. 뿌듯하죠. (김)연아와는 2010년 금메달 획득 후 은퇴하면서 피겨를 놓았고, 2011년 복귀하면서 다시 맡았고, 2014년 소치를 끝으로 다시 끝냈죠. 지금은 저 개인보다는 후배들과 회사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앞서 야구는 2012년 런던올림픽 이후 후배들에게 넘겨줬습니다. 아직 골프는 제가 좀더 끌고가야 하기 때문에 이제는 골프에만 전념하게 됐죠. 또 중계 말고도 후배들을 챙기는 것도 해야 합니다. 예컨대 요즘 축구에서 인기가 많은 배성재 아나운서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가 스크린을 해 조언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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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등 스포츠 중계에 대해 말할 때 배기완 아나운서의 표정은 좀 진지해 진다. 천안=채승훈 기자


'포즈(pause)의 미학'


그럼 아나운서 배기완의 특징은 무엇일까? 이번에는 답이 조금 뜸을 들인 후 나왔다. “처음 아나운서를 하면 10년 정도는 말을 잘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습니다. ‘2초 이상 말이 없으면 방송사고’라는 얘기가 있는 것처럼 말을 안 하면 큰 일 나는 줄 알죠. 그런데 15년 20년 이렇게 하다 보면, 즉 그걸 넘기면 포즈(pause)의 미학을 알게 돼요. 골프를 예로 들면 이래요. 김경태 선수가 마지막 18번홀에서 우승을 판가름 하는 중요한 버디 퍼트를 한다고 쳐요. 그럼 시청자들은 이전 상황과 자막 등을 통해 다 알고 있어요. 무슨 긴 말이 필요하겠어요. ‘김경태, 18번홀 중요한 버디퍼트’ 이러면 다 되는 거에요. 시청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경기 자체에 몰입하고, 감상할 여유를 줘야 합니다. 피겨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외국중계도 많이 접했는데 선진국일수록 중계가 정제돼 있어요. 본 경기 때는 멘트를 절제해요. 그리고 리플레이될 때 충분히 말을 하죠. 포즈의 미학, 감상의 미학, 이런 게 필요합니다.”

배기완 아나운서는 해설자와의 호흡에 대해서도 “서로 역할이 있는 겁니다. 아나운서가 다 알아도 해설자의 입을 통해서 나와야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걸 아나운서가 다 말해 놓고 의견을 물으면 해설자는 '예, 아니오' 말고는 할 말이 없어지죠. 자연스럽게 해설자가 설명할 수 있도록 중계를 이끌어야 합니다.”

포즈의 미학. 처음 듣는 표현이지만 동양화에서 말하는 여백의 미(美)처럼 운치가 있다. 같은 뜻인 감상의 미학도 그렇다.

배기완 아나운서는 가장 기억에 남는 골프 중계로 2011년 호주에서 열린 프레지던츠컵을 꼽았다. 당시 한국은 최경주-양용은-김경태 3명이 동시에 출전했고, 김경태가 미국의 기대주 웹 심슨을 마지막 날 싱글 매치에서 이겼는데 그렇게 뿌듯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 한국 남자골프가 침체에 빠진 것이 더 안타깝고, 이날 중계를 마친 코오롱 한국오픈에 더욱 정이 간다고 한다.

긴 인터뷰를 마칠 때쯤 당분간 골프에서 배기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에 안도감이 들었다. 예능 프로처럼 내용은 없이 목소리를 높이는 스포츠 중계가 많은 시대에 ‘포즈의 미학’을 좀더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중계에 대해서는 줄곧 진지하기만 하던 배기완 아나운서가 살짝 ‘멘트 하나 치면서’ 인터뷰를 끝냈다.

“저, 김재열 해설위원(골프)과 제가 동갑인 거 아시죠?” 첫 질문을 받아치는 얼굴얘기. 졌다. [우정힐스CC(천안)=유병철 기자 @ilnamhan]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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