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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산책] (2) 차관철, 홍성식의 ‘알 수 없는 인생’
제가가 아마추어 복싱계를 떠난 지도 15년이 흘렀습니다. 그래도 가끔씩 후배들이 찾아오면 지난날의 기억이 생생히 살아납니다. 비록 어둠 속에 점철된 날들이었다 하더라도 돌아보는 순간만큼은 아름답게 채색되어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가수 이문세가 ‘슬픔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된다’고 노래한 것처럼 말입니다.

얼마 전 차관철(42 홍천고-강원대)과 홍성식(48 고창고-서원대) 두 후배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 비슷한 시기 앞다퉈 제 체육관을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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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아저씨 같은 이 분이 예전 아마추어 때 패배를 몰랐던 천재복서 차관철이랍니다.


차관철의 새옹지마


‘선수’ 차관철은 홍천고 시절 ‘용산공고의 사대천왕’인 최요삼, 최준욱, 임계룡, 백달근을 차례로 쓰러뜨리며 제 가슴에 비수를 박았던 적군이었습니다(제가 당시 용산공고 코치였습니다). 이런 선수가 예전의 적장을 찾아오니 과거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차관철은 홍천중 3학년 때인 1988년 소년체전 금메달리스트(39kg급)로 89년 홍천고에 진학한 후 괴력을 뿜어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인 1990년부터 연맹회장배와 전국체전을 싹쓸이하며 ‘초고교급 복서’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좀처럼 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1990년도 전국체전 본선에서 용산공고 최요삼와 첫판에 맞붙어 일진일퇴의 치열한 접전을 펼친 끝에 승리했습니다. 나중에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이 되는 최요삼은 그 경기를 끝으로 사실상 아마추어 경기를 포기했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아마추어 관계자들 사이에서 "쥐방울만한 녀석이 참 권투 잘한다"는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김광선의 공격력과 오광수의 디펜스를 조합한 완벽한 복서라는 극찬까지 나왔습니다. 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식당 허드렛일을 하는 편모 슬하에서 자라 주먹 하나로 꿈과 야망을 지녔던 차관철은 그야말로 ‘한국 복싱의 미래’로 떠오른 것이죠.

참고로 차관철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1992년에 한국 복싱계는 걸출한 3인방의 탄생에 흥분했습니다. 이름하여 ‘최요삼(용산공고), 지인진(당곡고), 차관철(홍천고)’ 트리오였습니다. 지인진도 세계챔피언이 됐으니 이 평가는 조금도 과장되지 않았던 것이죠. 같은 시기 고교야구에도 임선동(휘문고), 조성민(신일고), 박찬호(공주고) 3인방이 출현했습니다. 정말이지 ‘잘난 73년생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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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교급 선수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의 차관철.


그러나 차관철은 성인으로 나서는, 중요한 문턱에서 어른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첫 단추가 잘못 꿰이고 맙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91년 말, 본인은 한국체대나 경희대로 진학하고 싶었지만 강원도 복싱계의 여론은 모처럼 탄생한 대어급 복서가 타지로 유출되는 것을 염려하여 복싱부도 없는 강원대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어린 차관철은 마음이 상한 데에다가 홍천에서 춘천까지 출퇴근을 하며 운동하는 이중고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운동에 전념할 조건이 갖춰지지 않자, 학교를 휴학하고 상무에 입대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정신적으로 균열이 생긴 차관철은 운동을 소홀히 했습니다. 워낙 타고난 실력이 있어 곧바로 국가대표 선수에 발탁되었고,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등 여러 차례 국제대회에 출전했지만 예전의 차관철 선수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상무를 제대한 차관철은 95년 미련 없이 복싱을 떠났습니다.

이후 차관철은 대학을 마치고, 졸업과 동시에 영국과 일본으로 어학연수를 떠나 새로운 세계에서 견문을 넓혔습니다. 그리고 한 무역회사에 취직하여 60억 원의 매출을 130억 원까지 끌어올리는 등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캐리어를 쌓은 차관철은 2011년 독립, 식품 무역회사를 설립하여 지금 현재는 15억 원의 수출 실적을 올리며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습니다. 향후 10년 안에 100억 원 매출을 올리는 게 목표라고 하더군요. 어찌 보면 차관철은 복싱이든, 사업이든 어떤 것을 해도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진돗개와 같은 DNA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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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를 찾아온 '선생님' 홍성식(왼쪽).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골든보이' 호야의 간담을 서늘케 한 바로 그 '분'이다.


홍성식의 천로역정


차관철과 함께 상무에서 뛰었던 홍성식은 고창고 1학년 때 늦게 복싱을 시작한 까닭에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하는 평범한 복서였습니다. 고교 졸업반 1986년 마지막 전국체전에서 간신히 3등에 턱걸이하며 서원대에 읍소하다시피 사정해 입학할 정도로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88 서울올림픽 선발전(라이트급)에서 강호 이재권(동아대)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면서 복싱인생이 달라집니다. 당시 석패했지만 단번에 큰 주목을 받으며 대형선수로 성장한 것이죠. 대학졸업반인 1990년 서울컵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획득했고, 그 해 벌어진 월드컵 국제대회에서도 쿠바선수에게 패했지만 동메달을 획득하면서 국제무대에서도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역사에 남을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태극마크를 달고 라이트급에 출전한 홍성식은 16강에서 세계선수권 준우승자인 소련의 그리고리안을 꺾는 등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3연승으로 4강에 올랐고, 역기서 그 유명한 오스카 델라 호야(미국)와 숙명적인 한판승부를 벌입니다. 당시 미국 복싱은 호야 외에는 메달권에 든 선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 호야는 연예인 뺨치는 준수한 외모를 가진 까닭에 엄청난 기대를 받았습니다. 결과는 아시겠지만 미국 복싱의 유일한 금메달을 따며 ‘골든보이’라는 별명이 탄생했죠.

홍성식과 호야의 4강전은 정말 명승부였습니다. 파울을 하나 뺏기는 탓에 2라운드까지 4-8로 뒤지던 홍성식은 3라운드에 전열을 정비하여 여러 차례 카운터를 명중시키고 파울까지 얻는 등 전세를 뒤집는 듯했습니다. 최종결과는 아쉽게 10-11. 호야가 한 점차로 이겼습니다. 실제승부는 누가 이겼다고 판정을 내려도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로 박빙이었습니다. 오히려 홍성식의 막판 선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호야는 나중에 인터뷰에서 “한국의 홍성식 선수에게 내용상 패한 경기였다”고 솔직하게 실토하기도 했습니다.

세계를 놀라게 한 홍성식은 1994년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은퇴하고, 1995년 고창군 무장면에 있는 영선중학교로 가 21년째 교직에 몸 담고 있습니다. 이상이 1990년, 1992년 두 차례나 대통령 체육훈장을 받은 복서 홍성식의 스토리입니다.

그들의 인생복기에 나오는 사람들

오랜만에 성공한 사업가로 저를 찾아온 차관철은 중학교 1학년 때 자신을 발탁해 성장시켰던 허병훈(1963년생. 현 삼성체육관 관장) 관장이 지금도 가장 먼저 떠오른다고 회고했습니다. 무보수로 오랫동안 헌신적으로 지도했던 자기 스승에 대한 애정은 평생 남는 것이죠. 많은 지도자들을 경험했지만 허 관장의 지도철학과 이념이 자신에게 딱 맞았던 모양입니다. 어른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복싱인생이 고속도로에서 굴곡진 비탈길로 바뀌었지만, 슬기롭게 방향전환에 성공하여 현재 전도유망한 기업가로서 탄탄한 초석을 다지고 있는 차관철의 말이기에 복싱인의 한 사람으로 마음이 무척 흐뭇합니다.

허병훈 관장은 직간접으로 두 명의 몽골 용병복서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한 명은 몽고 건국이례 최초의 세계챔피언을 지낸 라크바 심(1976년생)이고, 다른 한 명은 한국 라이트급 챔피언을 지낸 김 바이라입니다.

두 선수는 극과 극의 선수생활을 하였지만 현재는 완전히 상황이 역전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도 이문세의 노래처럼 ‘알 수 없는 인생’인 듯해 아주 이채롭습니다. 라크바 심은 거듭된 결혼과 이혼으로 경제적 파탄에 봉착했고, 현재 미아리 근처에서 소일거리를 찾아 하이에나처럼 거리를 배회하는 처량한 신세라고 합니다.

반면, 김 바이라는 현재 몽고에서 광산 채굴 사업체에서 총책임자로 있으면서 자리를 확고히 잡았습니다. 스승인 허병훈 관장을 해마다 몽고에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며 은혜에 답한다고 합니다. 참고로 바이라의 아버지는 레슬링 국가대표 출신으로 몽골에서는 양정모에게 패한 몽골의 제베크 오이도프에 버금가는 명성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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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도자 허병훈 관장(오른쪽)과 몽골 출신 첫 세계챔피언으로 유명한 라크바 심.


끝으로 허병훈 관장에 대해 기억할 만한 것을 하나 소개합니다. 그는 우리나라 복싱사에서 최초로 경기 중에 암호로서 사인을 낸 명 지도자였습니다. 이를테면 '1번'하면 카운터 치고 빠지기, '2번' 하면 원투 치고 스텝인 하면서 다시 원투, '3번' 하면 원투 공격 후 백스텝했다가 다시 원투, '4번' 하면 페인팅 후 카운터…. 지금 생각하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식으로 한 단계 높은 전략을 구사했으니 명복서(차관철)에 명스승인 것이죠. 최요삼이 세계타이틀 매치를 할 때 트레이너를 맡기도 했습니다.

홍성식과도 모처럼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역시 92년 올림픽에 대한 얘기가 흥미로웠습니다. 홍성식이 올림픽 준결승에서 아쉽게 패하자 대표팀의 김승미(1945년생) 감독은 김승연 회장, 오수인 부회장, 이경재 사장(현 한화 프로야구 구단주)에게 “이곳 바르셀로나까지 뭐 하러 오셨냐”며 통곡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한스러우면 그랬을까요. 김승연 회장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홍성식은 94년 은퇴 후 프로행이 나돌았는데 당시 제가 심영자 회장과 독대해 몸값을 3~4천만 원에 조율하기도 했습니다. 당시로는 큰 액수였죠. 그런데 홍성식은 이 제안을 냉정히 뿌리치고 낙향해 지도자의 길을 택했습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현재 교사로, 복싱지도자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으니, 지금 생각하면 당시 그의 결정이 옳은 듯합니다.

정말 복싱을 잘했고, 인생도 멋지게 살고 있는 두 후배,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많은 지인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인사를 전합니다. 노래가사처럼 연락이 없는 것은 서로에게 ‘잘 지낸단 대답’이겠지요.^^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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